저자소개
지은이 이기형
1917년 함남 함주 출생.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독립운동에 눈뜸. 1933년 이후 작가 한설야, 시인 임화, 작가 이기영 선생 등을 만나 조선독립 및 문학의 역할에 대해 모색함. 1938년 몽양 여운형, 한용운, 이광수를 만나 독립문제를 토론함. 1942년 일본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 2년 수학. 1943년∼45년까지 '지하협동단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수차례에 걸쳐 피검. 함흥경찰서·경기도 경찰부·용산헌병대 등지에서 1년여 동안 복역. 945년∼47년까지 《동신일보》 《중외신보》 정치부 및 사회부 기자 역임. 기자생활 중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과 이승만,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등을 만남. 1947년 7월 19일,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이후 33년 간 사회활동을 중지하면서 서울 뒷골목에서 칩거, 두문불출.
980년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제씨 등을 만나 분단조국하에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시작활동 결심. 시집 {망향}, {설제}, {지리산}, {꽃섬} 출간. 전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및 기행문 {시인의 고향} 출간. 1989년 7월,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 정동익 구속. 필자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됨. 대법원 기각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2년 선고. 1993년 3월 6일 사면복권 됨. 1991년 9월, 제5시집 {삼천리 통일공화국} 출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민족예술인총연합' 고문, '주월간 기자회' 고문.
출판사 서평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림을 열망했던 민족지도자.
미·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의 자주적 생존방법은 무엇이었나?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인간 여운형의 삶이 많은 증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40여 년에 이르는 민족분단을 생각할 때 새삼 떠오르는 인물에 몽양 여운형이 있다. 그는 민족의 힘을 키우며 독립을 준비해 왔고 좌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양자를 아우르며 민족의 진로를 제시했다. 여운형 노선의 올바른 평가를 위한 개정판.
불운의 민족지도자, 여운형을 재평가한다!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의 정계에서 몽양과 같이 미·소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 자주적인 정치인은 설 땅이 없었다. 일종의 기회주의라는 불신의 눈이 잦았다. 지금 생각하면 몽양이야말로 민족자주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이었는데도 당시의 정치풍토로서는 그러한 몽양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지금 민족은 핵의 위험 속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위기를 벗어나 민족에게 통일과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려면 미·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자주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몽양의 정치노선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미·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의 자주적 생존방법은 무엇이었나?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인간 여운형의 삶이 많은 증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40여 년에 이르는 민족분단을 생각할 때 새삼 떠오르는 인물에 몽양 여운형이 있다. 그는 민족의 힘을 키우며 독립을 준비해 왔고 좌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양자를 아우르며 민족의 진로를 제시했다. 여운형 노선의 올바른 평가를 위한 개정판.
불운의 민족지도자, 여운형을 재평가한다!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의 정계에서 몽양과 같이 미·소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 자주적인 정치인은 설 땅이 없었다. 일종의 기회주의라는 불신의 눈이 잦았다. 지금 생각하면 몽양이야말로 민족자주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이었는데도 당시의 정치풍토로서는 그러한 몽양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지금 민족은 핵의 위험 속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위기를 벗어나 민족에게 통일과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려면 미·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자주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몽양의 정치노선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