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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양과 6.15 시대(1) / 조영건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2-20


   몽양과 6.15 시대(1)

                 


조영건(경남대학교 명예교수)



 1) 몽양 60 주기의 함의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가교이다. 역사는 바로 현재이다"라고 개념하였다. 올해로 우리는 몽양 서거 60주년을 맞는다. 우리가 몽양을 되새김질하고 몽양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오고 7주년, 대결과 불신의 민족상잔으로부터 화해와 협력, 그리고 교류와 통일지향의 남북관계 기조와 정향성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궤도로 정착되어가는 국면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던 6자회담에서 9.19선언을 구체화하는 북미간 2.13합의로 한반도의 평화구조 한민족의 통일지형이 급변할 수 있는 전환적 정세에서 통일독립의 대의를 놓지 않고 이른바 좌우합작 ․ 남북연합의 험난한 정치행보로 생을 마감한 치열한 정치인, 큰 정치인, 진정한 정치인 몽양에게서 시대의 경륜과 지혜와 전망을 시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몽양은 생의 마감에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어 '조선 (Korea)'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로 우리민족은 20세기 전과정을 자주독립통일을 위한 1백년 전쟁을 치르면서 21세기에 당도했다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존재태라고 했을 때 이것은 우리민족의 성소(成素)가 아닌 외세가 나를 갉아먹는, 그리고 우리민족 속에 스스로가 되기를 거부하는 민족반역과 매국,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를 준엄하게 준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참으로 우리민족의 근현대사는 침략과 저항, 분단시켜 통치하는(devide and rule) 제국주의 농간에 민족이 분열상쟁하는 고난과 혼돈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왔다. 몽양의 삶과 죽음은 민간의 자존, 민족의 존엄, 인류의 품격을 온몸으로 지켜내는 자기희생의 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몽양에의 인식과 평가가 중립적이고 가치유보적 입장, 나아가 비관적인 입론과 주견에 있는 관점에서라 할지라도 정치의 장을 극단주의와 테러로 파괴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게임의 룰에 위배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제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장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범주에서 몽양을 재해석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과제가 부과된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현대를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이라고 규정했다. 문명과 정치의 선진영역에서 파시즘, 전체주의, 군국주의 극단이 창궐했으나 그들 내부진영에서는 자정되고 극복되었다. 그리고 UN이라는 기구를 통하여 인권과 민주주의, 호혜평등과 평화를 세계질서의 전범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ideology 냉전대결 구조와 정치경제적 세계재패의 신제국주의 패권주의의 속성은 민주주의적 이성의 상위에 군림했고, 그 횡포는 타율적 냉전의 사각지대 한반도에서 모르모트적 실험의 극을 나타냈다. 전쟁범죄국 일본에 대신해서 식민지 피압박의 한반도 한민족에게 강요된 분단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생명체의 본능이며 민족이 민족공동체 속에서 자주자율로 살고자 하는 생태적 저항이다. 이 정합적인 보편의지의 결정체를 담아내는 정치 지도자의 역사적 역할과 몫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 지도자들의 민주주의적 장에서 통합된 자주통일의 협력적 실현이 담보될 수 있다. 해방국면에서 몽양은 가장 선두에서 순발력과 열정의 정치력으로 활동하다가 희생되었다. 찬탁과 관련 고하 송진우가 이미 암살되고 설산 장덕수도 암살되었다. 그리고 반탁과 반공의 첨병에 싫던 백범도 단선단정·민족분단 반대의 장에서 암살되었다. 자유당 정권하 평화통일 주창의 죽산 조봉암의 법살도 1956년 대선 득표에 전율한 정치모살이며, 쿠데타 정권하 김대중 납치살해기도와 김영삼 초산테러도 분단시대 반민주주의의 극단적 반칙이다.


몽양은 해방이후 단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무려 10차례 테러를 당했고 끝내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첫 번째 테러는 해방 3일 만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 귀가하다 머리를 난타당해 금싸라기 같은 날들을 치료에 들여야 했다.


두 번째 테러는 인민공화국 수립 다음날 9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가 있던 날이자 인공에 반대하는 국민대회소집준비위가 결성된 날에 자행되었다. 이 테러로 몽양은 불면증과 두통의 건강손실을 입고 20여일 치료로 정치공백이 생겼는데, 이 기간 인민공화국의 조직적 기반이 박헌영 측에 넘어가고 인적 조직적 지지기반이 좌편향으로 되었다.


세 번째 테러는 1945년 12월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였는데 처소를 옮겨 무사할 수 있었다.


네 번째 테러는 1946년 1월 창신동에서였는데 출타중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테러는 1946년 4월 18일 관수동에서 괴한에 포위되었으나, 행인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이다.

위의 테러는 암살의도까지는 아닌 위협수준이었으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전개되면서 정치폭력의 도는 생명위협 수준으로 달라졌다.


여섯 번째 테러는 1946년 5월 8일 수류탄 테러였다. 연합군 전승기념대회가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개최되는 서울운동장에서 몽양을 표적한 수류탄 테러 미수는 변절 친일파와 이승만 관련의 노골적 표출이었다. 이 지경에서는 몽양 가족의 안위로 엄습했고 몽양이 수학중인 둘째 딸 연구와 셋째 딸 원구를 안전처 평양에 보낸 배경이다. 그것이 1946년 7월 초였다.


일곱 번째 테러가 종로에서 위기모면이며, 여덟 번째 테러는 신변위협으로 전전하던 몽양이 김용기 장로 집에서 머물다 인근 신방동 비취 중위 집에서 좌우합작 회담을 비밀리에 마친 1946년 7월 17일 밤 9시 넘어서였다. 몽양이 입원증인 김규식에게 긴급히 연락하고자 나선 길에 3인조 권총 테러범이 몽양을 납치, 정치 포기각서를 강요하고 눈을 가려 원예학교 산중에서 포박, 처결직전 백 여척 산비탈로 굴러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인왕산 웃대택견을 청년시절부터 단련해온 결과 기본품 활갯짓으로 비탈길 경사면을 짚었고 그만큼 몸의 층격을 완화할 수 있었는데 결정적 위기에서 주민과 동지에게 구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승만의 단정발언으로 테러리스트들의 독이 올랐고 살해위협의 장에서 민전은 하지와 러치 군정장관에게 항의했으나 경무부장 조병옥, 경기도 경찰정장 장택상은 형식적 대응으로 면피했다.

아홉 번째 테러는 평양회담 이후 1946년 10월 7일 계동자택 휴식중 유인을 받아 강제 납치되었다. 좌우합작 7원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헌영측 소행으로 폭로되었다.

남로당 측에서는 몽양과 김규식을 입법기관 창설의 미군정 주구라고 매도, 악선전했다.


열 번째 테러는 1947년 3월 17일 계동 몽양 자택에서의 폭발사고이다. 집이 반파되고 몽양은 출타중이었고 가족도 피해가 없었다. 이 시점은 몽양이 정치활동을 재개한 때이다. 몽양은 남로당에서 배척된 사람을 중심으로 신당을 계획했다. 근로인민당을 준비하면서 지방 순회중 몽양은 인도 뉴델리 범아시아 회의에 남한 정계대표로 학계 백낙준, 언론계 하경덕, 여성계 고황경을 이끌고 수석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미군정 요정을 일단 승낙한 상태였다. 좌익이 미군정의 하향지명을 문제 삼고 근민당 준비위도 반대했다. 몽양은 뉴델리행을 포기했다. 미군정과 관계가 예각상태로 되었다. 우익 테러범은 일단 잡혔으나 미군정, 경찰, 검찰은 몽양을 질타하는 내부세력에서 문제가 발단되었다고 언론 플레이로 몽양을 모욕하는데 주력, 테러범을 무죄로 석방했다. 사건 무마 방침은 몽양에 대한 적대적 관점의 표현이었으며, 몽양은 암살의 음모망에서 희생될 수 있는 위험수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열한 번째 테러는 1947년 5월 12일 최초의 총격사건이었다. 오후 7시 보성중학교 입구 운행중 자동차 후미에서 권총발사가 있었으나 몽양은 부상당하지는 않았다. 테러범은 도망가고 미군정과 경찰은 더 이상 몽양을 보호하지 않았다. 정가에서 몽양 암살은 상식처럼 널리 유포되고, 특히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적 전망을 열어 놓으면서 몽양이 통일된 조선의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정권을 탐하는 소영웅주의와 권력추구의 사이비 애국자 정상배들의 시기질투가 몽양에게 독화살을 겨냥한 것은 당연했다.

경찰수뇌 조병옥, 장택상은 무슨 우익집단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기 위해 관련자를 암살할 계획이라는 보고를 내었다. 김구 측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것은 스케이프 곳(희생양)의 모략의 성격이었으며, 하지도 이승만에게 공개적으로 암살중지를 요구하는데 이것도 예상되는 암살 이후 미군정 당국의 면책을 위한 계산법과 무관하지 않다.


1946년 7월 1일 서재필 귀국, 동 7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의 환영대회 이후 창덕궁 비원 연회에서의 몽양 암살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이승만 둥 우익계 인사의 참가자의 소동이 우려되는 결과 예상으로 몽양 암살이 모면되었다.

운명의 7월 19일은 토요일이었다. 열두 번째 테러는 비극의 종장이었다. 아직 독립국은 아니었지만 조선은 다음해 런던올림픽 참가가 허용되었다.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체육회장인 몽양은 경축종합기념 경기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양평행 아니면 체육대회로 갈 것인가, 편하지 않은 심경의 망설임에서 고국에의 일시체류 재미동포 조선사정소개소 회장 김용중의 성북동 숙소에 들렀다. 몽양은 유서가 된 편지를 전했다. 편지 원본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령 위의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 선호한다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그 반대쪽으로 가려하고 있소. 좌익 내지 극우파가 아닌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이다.

1941년 1월 6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세계는 네 가지 기본적인 인간자유를 구축해야 한다고 선포했소. 

1. 언론의 자유, 2. 종교의 자유, 3.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오.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허용된 친일파 손아귀에서 고통받고 있소이다."(Letter of Lyuh W. H. to  Kim Y. J., President of Korean Affairs Institute, 1947. 7. 18. 12G 332)


1946년 7월 19일 낮 1시 15분 혜화동 로터리를 회전하던 중 괴트럭이 가로막고 차 뒤편에 올라타서 저격한 하수인 암살범 한지근의 흉탄에 몽양은 끝내 쓰러졌다.

몽양의 죽음은 저격 정황과 저격범 실체를 넘어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엉켜 있는 정치음모의 실타래였다. 규명된 것은 우국으로 치장한 극우 깃털 배후였다. 그러나 몸통 배후는 악질적인 친일파, 극우 파시즘으로 무장한 세력, 그리고 단정세력으로 정리된다.


미군정은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미군사령관 하지의 술회는 "여운형은 암살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으며 그는 백합이 아니라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그를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감쪽같이 배반했다. "로 기술되어 있다. (Hodge's conversation with Wedemeyer. 27 August, 1947 RG332 (WN12C) Box 44)

뉴욕타임스도 몽양 암살보도에서 "Lyuh W.H., leftist chief is killed in Korea(여운형 좌익 수뇌가 한국에서 살해당하다)"라고 보도했다.


몽양은 타율적인 냉전분단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간단히 좌익으로 규정되었으며, 이후 분단 한반도 남쪽에서 몽양 류의 정치지향은 이분법 적백(赤白)논리로 금기대상으로 제약되었다. 2005년 3월 1일 몽양이 독립유공자 그것도 2급 서훈을 받음으로써 독립운동사에 부활되고 이제 6.15시대 몽양의 평가가 서장에 접어들게 되었다.



2) 몽양을 검증한다


현재성의 역사적 인물을 고찰할 경우 우리는 생애와 평가라는 용어를 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현장이 민족 내부관계의 씨줄날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내외 상충하는 세력의 중층적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의 대립구조가 복합적으로 표출되고, 이것이 정치현상으로 전개될 때 정치의식과 정치행태와 연동되는 정치주체로서의 지도자는 좀 더 엄격히 소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하여, 독립운동사의 진위, 친일파의 진위 그리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계선에서의 진정성과 짝퉁을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맥을 바로잡고 역사교훈을 제대로 계승하며 진정한 민족이익(=국가이익 national interests)과 민주주의를 역사현장에 관철시킴으로서 굴절의 역사를 반복하지 싫도록 쐐기를 박는 것과도 관련된다. 그러므로 검증이라는 용어를 투입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검증은 윤리 도덕적 수준 혹은 물리적 역량 수준을 검증하자는 말은 아니다. 시대적 지향성과 사회공동체의 요구에 인구에 회자되는 정치지도자가 얼마나 역사적 정합성을 가졌는가, 그리고 실제적 진정성과 헌신성 그리고 기여도의 정도를 실증적으로(positively) 검증해보자는 것이다.

공정한 검증작업에는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첫째 사실 소명의 역사적 자료, 사료의 내용상 진위를 판별한 이후에 과학적 종합판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하면 건국준비위원회를 이은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받은 이승만이 당시 좌파주도의 인공조직에 대한 의사표시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일치협력하여 평화와 안녕의 길에 함께 나갈 것을 희망하며, 원컨대 이때는 우리들의 사사로운 정이나 사감을 버리고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정치적 기만이며 사술이다. 

몽양의 죽음을 평가한 하지의 대담 사료의 검증도 유의미한 소재이다. 해방국면에서 군정장관은 소장 아놀드였지만 점령군 최고사령관은 미24군 중장 하지였다. 하지는 어리어리한 무인으로 폄하받아 왔지만 실제로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작전통이었고, 그에게는 치밀한 정보망과 유능한 정치고문, 세련된 공작방법이 조직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방대한 정보자료로 남한의 정치․사회·정계․문화적 흐름을 손금처럼 명료하게 파악하고 국면을 장악하고 있는 사령탑이었다.

미국식 공작정치의 시대 하에서 결정적인 정보파악과 상황주도가 보장될 때까지 하지의 영향력 있는 인물에 대한 계략과 접근은 신중하고 은밀하게 추진되었다.

여운형은 1945년 10월 5일이 되어서야 하지를 만났지만 첫 만남에서 더할 수 없는 개인적 민족적 모욕을 당했다. 미국과 몽양간의 불행했던 관계를 회고한 몽양의 편지는 김용중이 발행하고 있던 Voice of Korea에 게재되었다.  하지와의 첫 만남에 대해 몽양은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 진주한지 약 한 달여가 지난 후인 1945년 10월 중순 경, 하지 장군과 아놀드 장군은 짐짓 나를 환영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 장군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고 내 대답은 "없소“였소 그러나 다시 "왜놈으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지?"라고 묻더이다. 대답은 역시 "그런 적 없다 "였소 나는 그의 질문과 비우호적 태도에 완전히 당황했소이다.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하지는 나에게 군정청 고문회의의 고문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기꺼이 승락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호출된 열 사람 중 김성수, 송진우 이외는 평판이 나쁜 무명 인사였소. 고문회의 의장 김성수로 완고한 친일진영을 구축했고 내 견해는 완전히 묵살했소. 그래서 나는 사임했소.


 첫 만남에서 하지로부터의 봉변은 충격적이었고 시정잡배 취급을 넘어 몽양을 변절자, 사기범, 민족반역자로 몰고 가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몽양이 해방 최선두로 미군진주 이전에 건준 자치기구를 만들고 자주정부로 이행할 인공위원장인 것이 괄호 밖으로 내모는 조치였다. 이미 미군정은 동반자에 대한 본능적 감각으로 한민당을 파트너로 선택했고 몽양은 미운 오리새끼로 찍혔을 뿐이었다.



 1945년 9월말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미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여운형을 정치적 기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이기적이고 사욕적인 지도자'라는 매도와 아울러 '현재 조선의 군정청은 미군이 점령한 지역정부이다. 인공은 괴뢰극이고 몽양은 괴뢰극을 연출하는 사기한'이라는 딱지는 종장에는 몽양 죽음의 예찬사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지와 군정을 검증하는 객관적인 자료일 수는 있어도 몽양을 검증하는 자료로서는 주관과 편견 그리고 이해관계의 목적성이 게재된 위증적 자료, 몰가치한 것으로 판별된다.


둘째 역사의 전체상에서 정치지도자 인물과 정치노선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5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에서 몽양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조선에 적색이 어디 있느냐.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제할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다 같이 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냐. 많고 적고 하는 것은 결국 인민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노동대중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겠다. 우익이 만일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이론은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인공을 적색이라고 아는 사람은 소학교 일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하겠다. 나누면 무너지고 합하면 이룬다. 한민당, 국민당, 건준이 모두 국민 총력을 집결해야 할 터인데 이것을 인민이 하여야 한다. 사대주의와 배외사상은 철대 배척하여야 한다. "


또 민전결성대회 의사록은 다음과 같은 몽양의 말을 적고 있다.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지하운동 시대를 생각해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닥친 연후에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말하며 껴안고 어쩔 줄 모르던 혁명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인민대증을 위하여 싸우려면 노동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싸우려는 공산주의자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노동대중을 위하여 싸우는 공산주의자가 왜 나쁘다고 하는가.


또한 『학병』1권 1호 '우리나라의 정치적 진로'에서 몽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통일은 하루 빨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낙원은 노동자, 자본가, 민주파, 공산당 등 각계각파가 모여서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처음으로 건설될 것입니다. 내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을 때 방신들이 대동아공영권이란 낙원을 만들려면 일본인만 있어도 안 될 것이요 조선인도 중국인도 다같이 생존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도 각 정당이 존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국가의 건설발전에 조화를 하지 않고 그것을 저지시킨다고 하면 안 될 것으로 오늘날 같아서는 무엇보다도 통일전선을 꾸려 대동단결 완전 자주 독립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몽양을 분단이 고착된 분절정치 지형에서 사상 재단한다는 것은 몽양의 전체상을 시간적, 공간적 제약조건에서 왜곡 폄하할 수 있다. 몽양을 매카시즘이 창궐하던 미국에 갖다놓고 검증하는 것이나, 스탈린시대 소비에트에 투입해서 검증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몽양의 자주와 민주주의의 통일 이상을 좌절시킨 분단정치자형 냉전논리에 대입하여 한정한다는 것은 신발에다 발을 맞추는 것과 같은 격이다. 몽양을 저어하던 미군정 그리고 친일 보수세력 그리고 친미 극우파가 아니더라도 좌우익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중도파 인사 세력이라는 부분에서도 몽양에 대한 평가가 다기다양하고 더러는 후한 것만은 아니고 우에서는 좌로, 좌에서는 우로 핑퐁질하며 몽양을 팔방미인, 정체성 없는 정치인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몽양은 자주와 통일, 통합과 민주주의 실천론을 비켜가거나 넘어서서 스스로를 무슨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표상한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몽양을 진보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중도좌파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몽양은 그것을 저어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제약하지 않았다. 몽양의 에토스(ethos)는 민족정신이며 그것이 구심이 된 외연적 실천 에너지는 자주독립이고 통일건국이었다.

몽양을 평가할 때 몽양은 전제조건으로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라는 자기 제약적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분단학계와 분단정치의 한계성이었다.
몽양에 대한 검증의 엄밀성과 객관성 과학성을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론과 방법론이 불구화되고 형해화된 분단역사의 정신사적 배경과 내력을 먼저 재검하는 것이 순서가 될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 그것이 해방국면의 좌우대립과 분단체제의 산물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며 타율적인 것이다. 그것은 봉건사회, 식민지 봉건사회, 식민지 자본주의로의 타율적 이행과정에서 유라시아 대륙권 속에서의 지역적 근접점으로서의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과 그 사상의 접목,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의 유일한 외부지원으로서의 희망적 기대, 그리고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해방투쟁의 실천적 국제연대의 가능공간에서 독립운동 속에 사회주의가 용해해 들었고 노농대중의 조직과 운동의 성장과 같이 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 계열이 지배적 주류로 되는 국면에서 일제가 반일계열 중에서도 사상관찰 ․ 사상통제, 이른바 주의자의 탄압에 주력한 통치정책의 산물로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식민통치의 국책으로 대중을 위협하고 유리시키는 수단으로 되었던 것이다. 실제 공산계열의 항일투쟁에 대한 처형은 특별가중 악형이었으며, 탄압과 희생에 수반한 저항이 무장력으로 항일무장투쟁으로 고양되고 상시적인 유격전과 전쟁수준의 긴장과 대치로 총독부 예산의 절대액이 여기에 배분 투입되었다. 이에 공산주의는 반인간적이고 반인륜격인 공적으로 재단되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패가망신의 공포의 적으로 각인된 것이다. 여기에서 혜택을 얻는 부분은 친일파 기득층으로서 해방 국면에서 건준, 인공의 민중적 기세에서 움츠러들다가 미군정의 파트너십에 힘입어 일제 반공이데올로기를 그대로 계승하고 민족주의계열·민주주의계열·중도계열․사회주의계열 모두를 공산계열로 한 묶음으로 사그리 붉은 색칠로 거세시키는 것이 식민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냉전분단의 승자로 주류를 차지한 친일주구세력·분단세력·신(新)앙시앵레짐은 불변의 반공이데올로기·반공정책·반공제제로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사상의 뇌성마비 인식의 협심증을 낳게 했다. 이 땅을 사는 모두가 잘 순치되어 온 이런 인식과 방법론으로는 몽양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Da sein) 검증한다는 것은 가능할 수도 과학적일 수도 없다.

우리는 선행연구와 제한된 사료를 토대로 역사 속에서의 몽양의 전체상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몽양이 상해에서 피검되어 경성으로의 압송 공판에서 검사가 묻는다. "피고는 공산주의자인가." 몽양이 답하기를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이익보다도 조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몽양은 상해에서 약관 30대에 터키의 케말 파샤가 건국혁명으로까지 도달시킨 정당 모형을 본받아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독립의 청원서를 기획해서 보내고 정당 형태보다도 구성과 토대가 빈약한 논란의 임시정부에 외교부 차장으로 결합한다. 중국침략과 무단통치의 무리수에서 역량한계에 부딪힌 일제가 일제군부와 의회의 자치론 회유의 선발인사 초청에 낙점되어 적도의 심장부 동경의 내각과 의회에서 자주죽정을 강변한 센세이션으로 몽양은 일약 비중있는 인사가 되고, 모스크바 원동피압박자대회에 참석하고 국민당 중국혁명에 동참한다. 중국혁명과 북벌진행에 고무되었다가 장개석의 반동에 좌절해서 일시 생업에 복귀한 즈음 남경 금릉대학에서 익힌 영어 전공으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부하린의 『공산주의 독본』 그리고 영국노동당의 『행동교범』등을 번역하기도 한다. 임정의 이동휘 공산당 계열 이르쿠츠크 공산당 그리고 레닌, 트로츠키, 당대의 혁명지도자와의 토론과 중국공산당 구추백과 같이 손문 고문으로 역할하면서 그 어느 동아시아인보다도 국제 공산주의운동 계열의 중심과 수부에 접촉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몽양의 의식개발과 세계관 확대 그리고 실천철학으로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몽양은 생태적인 자유주의자였다고 추상된다. 몽양의 자유주의는 유물론으로부터 해방뿐만 아니라 종교와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14살 몽양이 미국 유학 선구자 삼촌 여병현의 주선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서는 그 종은 수학 기회를 예배 불참에 대한 불이익에 저항하여 민영환의 흥화학당으로 옮기기도 했으며, 몽양은 기독교 광동학교를 설립하는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하여 클라크 목사의 조수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고 그를 수행하여 만주를 섭렵하고 중국에 안착, 김규식 장로를 벗으로 동지를 얻는 기독교적 계기와 배경의 성장역사가 있다. 그러나 몽양은 크리스천도 그것도 외국 선교계의 이해관계의 소속인이 아니 되었다. 기독교가 구미세력이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얼마나 그것이 편이한 안전벽일 수 있었고 특히 해방이후 미군진주의 조건에서 기독교와 영어, 이것을 전가의 보도로 써먹을 수 있었는데 수많은 기독교도 영어해독 통역 아류들이 기생하는 미군정 정치권력 판에서 몽양은 스스로 고고했다는 것은 돋보이는 면모이다.

몽양은 1908년 약관 22세 때 부친 탈상후 노비를 해방시킴으로 스스로의 봉건 기득권을 버렸다. 몽양의 탈봉건, 서구 기독교 접촉, 공산주의 섭렵은 자기진화의 한 과정이며 이데올로기에의 종속이 아니었다. 몽양은 스스로는 인용한 적이 없는 마르크스의 명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세계를 어떻게 변혁하는가 하는 것이다. "라는 실천변증법은 몽양에게 내화된 자유인으로서의 활성 체질로, 필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진화와 변증적 자유로 줄기찼던 것인지도 모른다.


몽양이 몸을 가꾸고 체육을 좋아하는 것과 정신단련은 매우 인도의 영육합일의 일원론 세계관과 닮아 있다. 몽양이 뉴델리대회에 참석하여 인도적 사유와 문화 그리고 정치를 관견했더라면 몽양에게 흥미로웠던 인도 식민해방투쟁과 인도식 민주주의 평화주의를 또 체화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와랄할 네루류의 인도 지도자와 교우할 수 있었으면 몽양의 인간상과 사상상이 조급 더 자유주의자로 선명히 부각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몽양은 생태적으로 인간주의, 인본주의, 인도주의 화신인 것으로 그 상이 간추려진다. 몽양은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공동체의 일체성으로 민족집단 민족공동체를 최고 가치로 하여 그것의 전통적 독자성, 인격적 자존성, 정치적 자주성을 불면불휴의 변증적 실천력으로 과시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몽양을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라고 불러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몽양이 일본육군대신 다나카(田中義一)와의 담판에서 다나카가 무적황군을 위세부리며 조선인 반항은 2천만 멸살도 가능하다고 위협했을 때, 몽양이 맞받아 "그대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三軍之帥는 可奪이지만 匹夫之志는 不可奪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하찮은 한 지아비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라는 응전은 송운대사 사명당의 임란 왜군 가등청정 담판에서 가등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사명당이 "너의 모가지가 보배다. "라고 한 담력과 같은 민족정기로 이것이 민족사상 계승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족주의는 서구 부르주아 민족주의와는 물론 파시스트 민족주의와도 다른 문화적 혈통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몽양의 血濃於水(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경구는 몽양 민족주의의 에센스이며 정맥이다.

몽양의 상해 교민회장 시절 조공대표로 모스크바 원동피압박자대회에 참가하는 죽산의 여권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나,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아산 충무공 현충사 보수사업, 그리고 백범 김구의 모친과 자제를 중국으로 보내준 것은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 민족주의자의 헌신이었으며 그 백미는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제패 일장기 말소사진을 과단성 있게 조선중앙일보가 제1판에 게재케 한 것이었는데. 그 사진을 떠서 동아일보가 전재한 것이 동아일보의 민족지 명성으로 되었고, 동아일보는 총독부와 타협하여 정간,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몽양의 50대는 시련과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몽양은 정년정치인, 독립혁명가로서 성숙시켰던 중원대륙에 귀향(Heimkehre)하고자 했는지도 모르며, 몽양의 해외로의 엑서더스의 고뇌가 회자되기도 한다. 탄압과 좌절의 계절에서 몽양은 1937년 6철 4일 재만 김일성 부대의 국내 보천보 습격에 고무받고 혜산 보천보읍을 둘러보았다는 것이 재북 몽양의 직계 여연구의 『나의 아버지 몽양』에서의 기술이다. 이미 6월 7일자 동아일보 호외 서범석 특파원 취재의 전면특집에서 철통일제의 조선반도에서 가능할 수 없었던 대사건이 소상히 취재 보도되어 전말이 공개되었다. 언론인 경력을 가진 몽양이 부정확한 사태파악이 아니었을 것인데, 딸의 자서전은 몽양이 동북에서의 무장투쟁을 현지에 가서 알아가는 것으로 불명료하게 되어있다. 6.15선언 이후 언론사 사장단 방북 때 방시 동아일보 사장이 보천보 진공전투 전모와 김일성의 실체 및 인적 배경, 그 부대구성 그리고 근거지 소묘를 한 호외 전면을 금판으로 떠서 선물한 것이 지급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몽양은 만주뿐만 아니라 연안의 독립동맹의 무장투쟁에도 연계를 시도하고 중경임정과도 연락을 시도했다. 일제는 몽양에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가며 중국 왕정위 정권과의 교섭을 요구하고 회절을 유인했으나 몽양은 불변이었다. 몽양의 2차 투옥은 시련이었으나 단말마적 일제패망의 국제정보와 확신적 전망 속에서 건국동맹을 작심하게 된다. 몽양이 농민동맹, 노농청년의 무장된 준비력으로 해방을 예비했다는 것은 국내 유일의 준비된 지도자의 반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몽양은 우리 나이로 지천명의 60세에 해방을 맞는다. 몽양의 광복공간에서 2년은 정치가로서 몽양이 완결편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절대절명의 기간이었다.
이제는 원초적 단계의 몽양론에서 정치가 몽양의 완성단계의 실천적 선택과 결단, 그리고 그 총체적인 역사적 근량을 객관적으로 가감없이 계량해보는 냉엄한 검증의 시점에 왔다. 정당, 통일전선, 남북연합의 행보가 그 검증의 주된 내용으로 될 것이다.
해방국면에서 한반도에서 기동한 정치계열과 지도자들의 건국을 향한 새 질서 새 체제를 위한 각축과 합동연정은 세기적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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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 몽양과 6.15 시대 3) 6.15시대와 몽양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4 몽양과 6.15 시대(1)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3 해방정국과 몽양 / 송남헌 몽양사랑지기 2021-02-09
52 몽양 여운형을 생각하며 / 문익환 몽양사랑지기 2021-02-01
51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수립에 대한 몽양의 심정 / 이기형 몽양사랑지기 2021-01-29
50 여운형은 누구인가? / 김영식 몽양사랑지기 2021-01-18
49 몽양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 김형민PD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8 신한청년당과 몽양 여운형 - 3ㆍ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 김삼웅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7 몽양 여운형의 독백 (2) 몽양사랑지기 2020-11-22
46 몽양 여운형의 독백 (1) 몽양사랑지기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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