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Youngman Mongyang
Revolutionaries of freedom and independence
National leaders ahead of the times

몽양 자료실 > 글과 논문

글과 논문

제목 2) 몽양과 6.15 시대 3) 6.15시대와 몽양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 조영건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2-20


일제 식민통치의 완벽성과 가혹성에 저항한 광복투쟁은 다른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동적인 것이었으며, 국내에서의 철망탄압과 회유 변절의 초토화 조건에서 몽양이 건재하고 몽양이 버텨 해방전야 건국동맹 군사준비를 했던 것은 불시에 찾아온 전변기 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해서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일제 총독부를 무혈제압하고 정무총감 엔도로부터 항복문서에 방불하는 치안유지권 접수로 몽양이 다음 5개조를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전승이었다.

 1. 전 조선에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1. 집단생활지인 경성의 식량은 8, 9, 10월 3개월분을 확보하라.

 1.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 말라.

 1. 조선에 있어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 말라.

 1. 전 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

 

몽양은 건국동맹을 기축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지도부에 위원장 몽양 여운형, 부위원장에 우파 민세 안재홍, 그리고 좌파 허헌을 추가로 결속하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1.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1. 우리는 일시적인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1945년 9월 6일 건준 전국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건준은 발전적으로 해제한다. 8.15해방에서 미군이 상륙 남한지역에서 통치권을 선포하는 군정 시발까지 정치적 공황상태에서 민족주권 국민정부의 틀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며 몽양의 정치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자주독점국가건설 1. 일제와 봉건잔재세책일소 1.세계민주주의국가와 제휴


 9월 7일 인천에 상륙한 하지 사령관 미군은 극동사령관 맥아더의 포고령을 발포하고 미군정 체제하에서 일체의 자주정권 및 인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주민 배타적 이민족 정복자로 등장했다.

몽양의 연합국에 대한 관점은 처음에는 손님 접대 How do you do? 다음은 환영 Thank you, 마지막으로는 자주 관철 Good bye였다.


인공은 산하에 지방조직으로 인민위원회가 뻗어나갔다. 그것은 1. 인민과 연결되어 있는 정치형태 1. 행정과 입법의 완전 통일 1.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하고 또 간단히 배제할 수 있는 정치 조직 1.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통치기구를 완전히 청산 그 잔재를 일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전쟁에서의 민관 절충적 농민자치 행정기구 집강소의 발전적 완성판이었으며 민중 저력이 검증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공은 미군 진주로 시련의 벽에 부딪히고 또한 민족 내부진영에서도 임정과의 갈등, 특히 이승만의 귀국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설립과 합작거부로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인민주권 창달의 주체로서의 민중(=인민대중, 국민대중) 동태가 인공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판세로 진행되었다. 3.1운동을 전환기로 한 1920년대로부터의 국내 사상운동은 화요파의 주도체계로 되고, 이 계열이 1925년 조선공산당 출범 전국적 이니셔티브를 쥐게 된다.

그러나 고양되는 노동운동․소작쟁의 대중역량을 결집치 못하고 파쟁과 분열로 이른바 종파주의의 극단적 한계성으로 조공은 해체되어 해방국면까지 파편화되고 개별적 잠복기간을 거치면서도 해방이후 재생·재건되게 되고 대중조직인 전평·전농․청총․부녀동맹을 외각조직으로 수렴하면서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몽양이 우려하는 급진 좌경화와 분파분열 속성의 발현으로 몽양의 건국 설계도는 일그러지게 되고 여기에서 몽양의 정치역량의 한계와 몽양 노선에 대한 근원적 도전이 제기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몽양의 장점과 단점, 실천과 좌절, 성과와 한계의 정치가적 전체상 - 몽양의 사상, 몽양의 정치철학, 몽양의 지도력, 몽양의 정치조직력, 몽양의 대중장악력, 몽양의 국면타개의 주도력이 다면적인 정치경쟁 무대에서 기라성 같은 정치지도자와 정치결사체 정당과의 경쟁을 통하여 검증받아야 하는 냉혹한 장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국면에서 진주미군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워싱턴 미 국무성과 동경극동사령부의 양날개를 배경으로 하는 지역정치기구, Pax Americana 전략정책 집행의 점령지구 통치기관으로 군국일제의 구시대적 식민통치 메커니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적 물적 역량과 현대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일제와 맞섰던 몽양의 담력과 협기가 그대로 관철되는 상황이 아니었고, 몽양의 정치적 경험축적과 개인의 엘리트적 메리트로는 돌파할 수 없는 장벽과 그물망의 정치지형이었다. 문제는 정치세력이었다. 그것은 정당이었다. 몽양의 위기의식은 조선인민당 창당으로 귀결된다. 조선인민당은  1.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1.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고 전민족 완전해방 1. 진보적 민족문화를 진행하고 인류문화에 공헌한다는 강령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농민문제 해결의 토지개혁 강령에 덜 철저했고 그것이 공산당 류의 사회주의 노선과 차이나는 것이다.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대립과 합작은 내포적 갈등의 운동 형태였으며 인공과 임정의 관계는 외연적 대결국면이었다.

건국과 통일전선 그리고 남북연합에서 몽양과 쌍두마차로 관련된 박헌영은 몽양에게는 동지로보다는 숙명적인 천적으로 현상했다. 몽양이 건준을 출범시키고 인공의 틀을 짠데 대해서 박헌영이 인민위원회 하부조직과 대중 주도를 장악한 것을 몽양은 후발 편승과 분열파쟁으로 경원지지할 수도 있었고, 박헌영은 이데올로기가 빈약한 몽양을 동지로서는 거리를 두는 동반자로 취급, 상층 통일전선에 주력하는 몽양의 역량을 허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박헌영은 일제하 주의자 진영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실패와 과오의 정치조직이라 할지라도 최초의 전국적 공산당 조직체계의 코민테른 공산당을 장악한 만만치 않은 정객으로 해방국면에 재현한 것은 몽양에게는 가위 눌리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광복투쟁이 국내에서의 제약조건을 빗겨 해외에서 주도된 것과 관련하여 해방국면에서 귀국한 해외 명망 지도자의 면모는 몽양을 압도하는 거목 군상들이었다.


백범 김구는 동학농민전쟁 참가로부터 일본장교를 처치한 과단성 있는 반일항쟁 애국 테러리스트의 경력을 가지고 중국에 망명 임정의 주석의 지휘탑에서 윤봉길, 이봉창을 육탄으로 항일에 산화시킨 신화적 애국투사의 명망이 있는 민족주의자로 일제하 유일의 망명정부의 후광을 안은 지도자의 큰 축이었다. 백범의 건준 대결과 미소공동위 결정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극렬 반탁과정에서 몽양과의 좌우합작의 공간을 소진시킨 갈둥은 몽양에게는 큰 타격과 하중이었으며,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노정에서 시차를 두고 희생된 두 지도자의 비극은 추세를 살아가는 민족의 고난으로 고스란히 승계된 것이었다.


몽양의 좌우합작 통일전선의 진행표가 작동이 일그러진 한계상황에서 5차례 방북 국면마다의 김일성과의 회동은 민족문제를 통일건국의 그림표로 설계한 몽양 스케일의 정치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걸음이었으며, 몽양의 정체성과 독자성의 입장에서 제시되는 김일성과의 토론과 담론은 통일의제를 중심과제로 한 좌우합작․남북연합을 포괄하는 역사적 유의미성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그 출신이나 활동무대가 식민지 통치중심과 정치무대로부터는 변방으로 항일투쟁도 하나의 지류라고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군국 전시상황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가장 지구적으로 가장 최고수준의 무장 항일투쟁을 한 실증적 리더란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법인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미소 한반도 양단 점령국면에서 소 군정의 후견을 받는 프리미엄을 안고 등장하는 신참자라는 측면보다도 만주항일 과정에서 항일운동의 단계적 진화과정을 밟으면서 축적된 정치경험과 조직력 - 동만주 항일연군에 독자적 조선인 부대로 지속했다는 점, 일국 일당 중국 정치공간에서 독자적으로 잔존할 수 있었다는 점, 소위 민생단사건으로 불리는 극좌 분파과정에서 편향에 대립하고 대중적 저변을 넓혔다는 점, 그리고 조국광복회라는 전민 통일전선을 시도했다는 실험적 정치경력은 해방국면에서 북한을 장악하는 만만치 않은 근원이 되고 복잡다단한 남한 정치영역에 개입하는 또 하나의 배경으로 추적된다. 한국전쟁 휴전협정 당사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쓴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란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을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방법으로, 부적절한 장소에서, 부적절한 상대와 싸운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이란 종장의 기록에서 김일성이 웨스트포인트의 수재 지휘부와 대결할 수 있는 게릴라 역전의 팀워크를 가지고 있었다는 술회는 군사적인 측면의 분석에 한정된 것이고, 그것이 해방국면 정치무대에서 남한에서의 이승만과 대항마로 북한에서 패권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연유와 정치적 역학관계의 정치분석은 지금부터의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혈통의 복벽성에 더하여 구한말 개혁개화 독립투쟁으로 무기징역 선고, 옥고까지 치르고 도미하여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발군의 선구자로서 그 명망 값으로 미국 무대에서도 상해임정의 대통령으로 추대받을 수 있었고, 해방국면에서 귀국 이전에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될 만큼 국민적 수퍼 지도자로 상해임정, 하와이, 워싱턴, 해방이후 서울에서 난맥상의 정치게임에서 특유의 배수진 전략으로 기어이 권력을 장악해내는 필승무패 불사신의 마키아벨리스트. 이 정객이 친일파·지주·관료․경찰·군인을 대담하게 안고 미군정을 견인하고 압박하여 단정을 장악하고 분단사도로 등정한 것은 역사반동의 정치예술(political art of the historical reaction)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


몽양은 이와 같이 박헌영, 김구, 김일성, 이승만이 등장하는 해방공간의 정치투쟁의 본선 장에서 타이틀매치 혹은 리그전 혹은 복식전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몽양은 인공도 실패하고, 민전도 실패하고, 3당합당도 실패하고, 그리하여 좌우합작도 남북연합도 공상적 시나리오로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몽양이 선도적 순발력으로 정치의제를 주도하고 통합정치를 추동하였지만 대목 대목 몽양의 좌철과 끝내는 좌파 파편을 수집하는 비주류로 밀리고 왜소한 근로인민당을 분신으로 남겨 정치생명을 마감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국면의 양 주도권 진영-남한에서의 미군정과 북한에서의 소련 군정을 이양받고 있었던 인민위원회의 양쪽에서는 몽양의 위상과 역할 및 정치력 잠재력을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놓치지 않았다. 몽양에 대한 각론적 연구는 유관자료의 전면적 공개와 집적 그리고 검증과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 통일의 가치론으로 미래세계를 기필코 창조하겠다는 실천적 의지의 합의의 장에서 진척될 수 있다.


몽양에 대한 검증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지도 모른다. 당면하게는 인간 몽양, 정치가 몽양의 그릇을 사려 깊지 못한 수준의 현학적 강단학자가 재단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상황적 복잡성뿐만 아니라 몽양 행동의 정치적 범주와 운동적 연관관계가 매우 광범하고 다양한데 기인한다. 그러나 몽양이 민주주의 자주민족통일을 최고의 중심가치와 목표로 하여 그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던 정직성과 진정성을 우리는 검증의 결과물 결정체로 상재하게 되는 것이다.

 

 3) 6.15시대와 몽양


몽양이 빈 정치공간에서 좌우와 남북을 균형 잡아줄 중심추가 없었다. 극단과 분단으로 쏠리는 한반도 정치지형을 지탱해줄 지렛대가 없었다. 자주와 민주주의 통일의 이상과 소망은 반자주․반민주․반통일 친일전제권력의 폭력에 무수한 민중의 희생을 수반하면서 고사되어갔다.


몽양은 추대받는 민중 속의 정치지도자였다. 그 스스로 권력의지(Wille zu Macht)를 강변한 적이 없고 그의 욕망은 민족을 위한 의지(fille für Nation), 인민을 위한 의지(Willle fur Volks)였다. 몽양이 그렇게도 신뢰하던 민중은 몽양 유지의 화신이 되어 2.7투쟁, 4,3제주도민 항거로 단선단정을 반대하다 무리로 희생되었다. 좌우합작․통일전선 계선에서 이합집산으로 종내 분열되던 수많은 정치가와 정당들이 미군정 파트너로 점지된 이승만과 미군정의 밀월에서 새벽별처럼 명멸해갔다. 그리고 서울에는 추락하는 민족 명운을 기사회생시킬 지도자들이 증발되어갔다. 1948년 4월 16일부터 4월 23일까지의 평양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우사 김규식은 뒤에 납북되었다.  인공과 신탁통치의 장에서 그렇게도 몽양에게 등을 돌려야만 했던 백범 김구도 분단 결사반대의 화신으로 반역자의 흉탄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많은 민족주의자와 중간파 인사가 서울을 뒤로 했다.


몽양의 역할이 더 연장될 수 있었다면 단선단정의 역사 거역의 책략은 능히 반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전쟁없는 남북정치 경쟁을 속행시킬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는 것은 절규의 역사적 가설이다. 그것이 희망적 주관적 관측이라고 할지라도 해방국면 첫 단추 정치의 장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적 규범의 공정성에의 정치권의 동의, 동참이 있었다면 민족공동체의 발전적 추동을 담보할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정치지도자와 깨어가는 민중이 광복투쟁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온 '우리민족호'의 난파를 힘겨우나 능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담해본다


몽양의 건준과 인공에 동참했던 소박한 민초는 좌익이 되고, 탈색 양민의 은전을 부여받는다는 보도연맹에 묶여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폴란드 유태인과 같이 집단학살되었다. 그리고 국민없는 권력(Macht ohne Nation), 민중없는 권력(Macht ohne Volks)의 독재자는 민주주의를 청소하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이솝 우화의 옷 벗은 임금의 추태를 만끽했다.


이제 영웅은 가고 무리로 죽어간 민초의 거름에서 새 순이 돋아 올랐다.

 그것은 자유! 자유였다.


1960년 4월 혁명은 해방한국사의 암흑의 중세기를 종언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새 지평을 틔었다. 그러나 분단에서 사회발전 동력으로 성장한 학생세력이 이승만 자유당정권을 뒤집어엎은 국면에서도 분단에서 성장한 물리력 군대가 훨씬 더 강했다.

군사쿠데타의 물적 토대는 거대했고, 군사정변은 성공했고 그것은 일백년 친일과 수구 분단 반공을 재생 재활용했다.


그러나 성장한 임금 노동자 대군의 문제에 봉착해야만 했다. 강권적 억압과 통제는 자본제 질서와 산업사회에는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이데올로기만 회자되던 해방국면에서의 노동자의 문제, 몽양의 표현과 범주로는 근로인민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정치의 새 중핵과제로 부상되었다.


기득권이 없는 근로하는 계층은 민주주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분단 고착에 편승할 이유도 그로부터 얻을 이익도 없었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은 국민대중이 요구한다. 이것은 매우 정합적이며 정당한 것이었다. 주권과 자유, 생존과 진보, 이것이 군사권력 권위주의적이고 압제적인 강권사회에서의 저항적 국민요구였다. 정당과 의회의 형해적인 제도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동되어야만 한다는 요구는 불가항력이었다. 민주주의의 궤도에서 탈선한 권력은 보다 본원적이고 심충적인 민중의 요구-자주와 평화통일 민족공동체에서 참다운 삶의 질을 실현하고자 하는 염원과 요구에 편승하면서 권력위기의 순간에서 역사적 명제에 굴복해 오는 것이다. 이것이 7.4공동성명에 영합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도 극단의 한 끈에서 초토화된 전쟁참화를 경과하고 진영동맹 소련이 사회제국주의로 군림해오고 자국 생존에 변색되어 가는 중국의 사회 이기주의와, 이들 중소대립에서 세계 속에서의 생존법을 감각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단의 내력만큼 남과 북은 대결과 동반의 양축 구성체란 현실론을 인식했을 법도 하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to be or not to be) 이분법에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민족의 고뇌의 막다른 장면에서의 산물이 7.4공동선언일 수 있으며, 1. 통일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한다. 1. 통일은 평화적으로 한다. 1. 민족 대단결한다는 선언은 너무나 당연한 민족의 자연태를 복원코자 하는 의지의 재확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대와 대결은 지속되었다. 헌법 전문과 모든 정당의 강령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평화통일은 불생산적 막다른 분기점에서 비로소 현장 정치이슈로 승격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불가침 화해교류협력 남북기본합의서라고 할 수 있다.


얄타체제에서 몰타체제로-탈냉전 통합세계질서의 전개는 우리민족에게는 도전과 기회였다. 그것은 자결적 분단 문제해결의 촉매제였다고 할 수 있다.


카이로선언과 얄타협정은 한국독립을 강대국 입맞(in due course)과 이해에 맞게 타율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며, 분단관리를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냉전선언은 분단이 과거의 역사로 퇴출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세계는 이것을 승복하고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몽양의 자주통일 노선은 분단 한반도 정치의 최고 강령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을 이루자"는 세기적 민족염원을 외면한 한국정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속류 정치가 통일문제를 프로그램적 정책으로 표류시키는 동안에도 통일을 생애와 생명과 바꾼 사람들이 수다히 나왔다.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영국 백인지배 인종차별철폐 독립평등사회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20년 감옥살이를 한 것이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현대의 비민도주의 고발의 압권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40년 넘는 통일수인이 허다히 나왔고, 분단의 질곡에서 백순 노모와 팔순 자식이 60년 만에 첫상봉이 실현되는 기막힌 비극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분단의 희생으로 법외 학살된 기백만 단위의 양민의 기막힌 한, 분단 권력에 군번없는 그림자 인생의 희생자들의 기막힌 신음이 망령처럼 산 자와 공생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보다도 분단, 상생보다도 대결을 생리로 고수하는 근성에 완고한 금권의 주류 수구가 있고, 그것을 지지하는 후견이 상존하는 조건에서도 자주 평화 민족단합의 통일선구자, 통일선지자 한국판 세례요한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 에너지를 배경으로 막힌 조국의 혈맥을 뻥 뚫고야 만 것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 간의 6.15공동선언이다. 6.15공동선언은 변화무쌍한 일기예보나 배신의 러브콜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민족장전이며 대결과 불신을 해소하고 화해와 협책 그리고 상생의 길을 역지사지하며 진정성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적 약속의 이행서이다.


6.15 공동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힙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1.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진행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1.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둥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1.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올해로 6.15공동선언 7주년을 경과한다.

 6.15선언실천은 당국자 간의 수준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남, 북, 해외 민족 공동위원회 민간 상설기구를 창설시키고, 6.15와 8.15 민족축전 공동행사를 남과 북에서 번갈아가면서 하고, 부분 지역의 다방면적 교류를 확대해 왔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정부와 민간합동으로 6.15실천 대단합을 실현하고 당국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추동했다.


남과 북은 이미 서먹서먹한 상대가 아니고 더 이상 대결로서 얻을 이익이 없는 것이 쌍방간 확인되었다. 서로의 차이가 드러나고 그것이 보다 분명히 알려지고 차이를 인정하고 통합의 해법을 경험적으로 모색해보는 과정을 겪어 왔다. 상호침투 상호변화의 서로 닮아가는 새 양상도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 본모습 (proto-model)이 흙 털린 금이 쏟아내는 빛과 같이 찬연해졌다. 그리고 민족 일체성의 재확인을 토대로 민족이 살아갈 현실적 질서와 민족이 만들어 갈 실질적 공동체를 어떤 구성체로 만들 것인가에 관한 지혜를 교환한다. 정부 수준에서는 연방연합체 실시를 위하여 예비를 착실히 할 과제

를 안고 있으며, 민간은 그 그릇을 채울 질료를 잘 정제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여운형에 관한 당대 몽양과 함께 했던 인사들의 평가를 정리해본다.

최근우는 몽양을 잃어버린 거성이라고 했다. 30대 몽양이 적도 심부에서 일본 육군대신이 "독립만세라고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것이 조선인이다"라는 독설을 맞받아 새벽에 닭이 울면 다 따라 운다고 응수했고, 동경대학 교수 요시노가 몽양은 동양 최고의 인사라고 술회한 것을 전하고 있다. 미국신문 사장단의 정치노선 질문에 몽양은 통일노선 자주노선이라고 천명하고 미소로부터는 중립을 견지한다고 했다. “귀하가 통일국가 원수가 되어 소련이 청진항을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미국이 진해만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답변했다.  최근우는 몽양을 민주주의자라고 평했다. 오히려 몽양과 인민당을 같이 했다가 뒤에 전향하여 보도연맹 실무책임을 맡았던 정백은 몽양을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강영선은 몽양을 자유주의자라고 했다. 몽양의 장점으로는 중도와 민주주의 노선이라고 했으며 단점으로는 박력이 부족하고 청렴, 겸허, 포용이 현실정치인으로서 오히려 단처로 평가된다고 했다.

김남천은 몽양은 개방성의 인사로 지사연하지 않으며 풍채와 웅변이 뛰어나나 고집이 세지 않다고 했다.

김오성은 이승만은 반민주주의자이고 몽양은 민주주의자라고 했다.

유광렬은 몽양은 뜻은 크나 행(行)은 따르지 못한다고 했으며, 이수영은 몽양을 센티멘털리스트 방랑자로부터 상해에서 일본 조야에 픽업되면서 일변했다고 했다. 소련의 보로딘과 함께 몽양이 손문의 2인(人) 고문이 되고 중국혁명을 위하여 구추백 요청으로 중공당 당원 대우를 얻은 것도 민족주의자로서 조선독립을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김동환은 몽양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했으며, 주운성은 몽양은 모순 속에서 명랑성이 돋보이는 개방 낙천가라고 평하고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 중도좌파라고 했다.

미국영사 윌리엄 랭든은 몽양을 친미인사라고 하고 미소철수를 희망하고 분단을 반대한 정치인이라고 했다.

이동화는 몽양을 진보적 민주주의자, 혁신적 민족주의자라고 했으며, 한대수는 민족적 민주사회주의자라고 했다.

몽양의 동지였으며 사돈지간으로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쓴 『조선교육사』 저자 이만규는 몽양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구질서를 매장하고자 투쟁한 정치가라고 평했다. 몽양은 중화민국 건국자 손문과 소련 건국자 레닌에 버금가는 세기적 인물로 그들은 자기나라를 일으켜 세웠으나 뜻을 다하지 못하고 요절했지만, 봉양은 건국도 못 이루고 생을 다한 것을 애석해 하였다. 그는 몽양을 가슴에 담았으며 몽양 정치활동 중 가장 충실하게 몽양을 보필했던 사람이다.


몽양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몽양을 이렇게 정리했다.

1. 화석화된 몽양이 아니라 살아있는 몽양이다.
1. 몽양은 활동에 치중한 정치가이다.

1. 몽양은 언론인이며 체육인이다.

1. 역사에 묻힌 몽양정신은 끝나지 않았다.

1.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했다.

1. 교육과 이상향 건설에 힘썼다.

1. 몽양 철학과 실천은 좋은 나라 재창조에 있었다.

1. 몽양은 부단히 자기를 쇄신한 사람이다.  
1. 몽양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제3의 길을 탐했다.

1. 몽양은 서민배려의 통일국가를 꿈꿨다.

1. 마지막으로 21세기 민족통일로 몽양은 부활할 것이라고 했다.

 

1997년 50주년을 즈음한 때는 이직도 몽양이 냉전 동토의 한설에 묻혀 있을 때로 냉동 몽양의 시신에 활생법으로 온기를 불어넣던 시절이었다. 간단치 않던 시절에 맞추어 고만고만하게 정리한 몽양 평가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60주년 몽양 학술토론에서는 6.15 자주통일시대, 21세기 민족통일의 대진운 속에서 부활하는 몽양의 모습을 본다.


1946년에 들어 하지가 38선 월경금지 조치를 내리고 포고령 위반으로 다스린다는 엄포 속에서 몽양은 다섯 차례 공개, 비공개로 통합정치와 화합통일을 위해 방북했다. 하지의 경고에 몽양은 "내 집안에서 내가 다니는데 윗방에 가든 아랫방에 가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맞받았다. 몽양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은 6.15통일시대, 6.15선언실천 이행과제로서 정치지도자와 정당이 감당해야할 짐이 되었다.


몽양의 방북은 1. 좌우합작․남북연합 1. 인민당․민전대표 자격으로 북한지역 제정당과의 의견조율 및 인민당 조직확대 1. 민족통일의 책임적 주도에 그 목적이 있었다.

1차 1946년 2월 인민당북한지부 설치와 미소공동위원회 대처.  
2차 1946년 4월 미소공동위원회 성명과 임정 수립반대 관련 토의.

3차 1946년 7월 좌익 3당 합당문제.

4차 1946년 9월 좌우합작, 3당통합문제.

5차 1946년 12월 좌우합작 몽양정계복귀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몽양은 김일성, 김두봉, 최창익 뿐만 아니라 조선신민당 한빈, 조선민주당 조만식, 천도교 청우당을 포함하는 북한의 좌우익 정방을 두루 접촉했다. 몽양의 무대가 남북통합의 장인 것을 감안해서 몽양은 진보적 민족주의자에 더하여 연공적(聯共的) 민족주의자로 명명하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몽양은 다른 정치인이 못해내는 전인미답의 통일통합의 길을 개척한 탐험적 선구자임에는  틀림없다.


6.15시대 몽양의 선구적 개척은 오늘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정당교류 정치협상으로 폭넓게 진척되고 있다. 냉전대결 시대, 음모와 책략의 정치형태, 밀실권력 정치가 남북문궤를 독점했던 시대로부터 공명정치·공익정치·공화정치 속에서 자주통일을 사생결단의 의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선험지석 희생적 족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이 완전통일을 이루고 있지는 못한 단계이나 일국양제의 대륙과 홍콩, 마카오 체제는 천하통일의 중화의 위력이며 대만성 독립과 일국통합 양제 자치론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목하 황화(黃禍)를불러오는 위협적인 대륙의 용의 부상은 손문의 연소연공 1차 국공합작과 일제침략에 공동 대응한 국민당-공산당 2차 국공합작 그리고 오늘의 3차 신통합의 행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중국 경제성장의 투자재원이 홍콩과 대만 그리고 화교자본이고 그것이 중화민족 경제를 흥기시키고 있는 것은 한반도 통일 민족경제 모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경우 원시적 근대적 축적과정에서 국내 계급계층의 양극화 그리고 침략과 패전의 역사적 범죄와 부침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선진국 G-7의 유일국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민주주의-대정민주주의와 전후민주주의 좌우 공화 협의질서의 의회정당 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세계화의 시대 아시아의 양각 양익을 점하고 있는 일본, 중국정치를 반면교사로 하여 한국정치는 60년에 몽양이 못 다한 자주통일 쟁취를 위한 민주주의 균형정치의 가치론을 재음미해야만 한다. 줄여서 통합의 정치라고 언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정치의 이해절충, 역사 비전을 차위로 두는 통속적 통합정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통합정치의 실천론은 중도가 옳다. 그러나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산술적 이해의 평균치로 이해되는 것은 곤란하다.


불교에서 중도는 양극양변을 제어하는 원융화합의 공(空)을 의미한다. 무욕 무탐은 올바른 행의 출발점이다. 정치에서의 중도는 공익과 공동선의 도덕규범을 기초로 하는 보다 높은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중핵이 되어야 한다. 분단 현실에서는 민족적 가치로 관통되는 전민족 단합의 노모스(큰집=정치 생활의 공동체)를 담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몽양은 6.15통일시대에 확실히 부활했다. 몽양의 정치생활의 험로를 헤쳐간 낙천 그리고 신념은 오늘의 통일 대업에 더없는 보약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몽양을 체취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인구 절반의 수도권, 정치·경제·금융․언론․문화 시장이 집중되어 터져나갈 것 같은 서울공화국에서 대기의 오염과 정치오염을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영서면에서 탄생하여 성장의 계절도 정치의 영욕도 그리고 생의 마감도 매일 지나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마감한 일상적 공간대에서 더 현장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을 이렇게 불러본다.

몽양은 생활 속에서, 민중 속에서, 민족 속에서, 현실 속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민족근간과 전통을 계승하면서 가장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감각과 이미지를 가진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시대사조와 인류 이상의 사상조류를 가감없이 흡수 용해하면서도 민족 에토스의 정체성을 원소(물보다 진한 피)로 상용과 통합의 정치도덕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인도주의자, 평등주의자, 평화주의자, 민주주의형의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테러 폭력에 굴하지 않았던 관용의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투명하고 담대한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정직하고 청결한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헌신과 살신성인의 정치지도자이다.

몽양은 그의 경구 그대로 정관매진(正觀邁進)-진리와 정의를 향하여 불면불휴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한 정치지도지이다.

하여 몽양은 날로 새로워지는 민족과 민중의 가장 큰 무게의 정치지도자이다. ◆

 


필자에 대하여

[이 글을 쓴 조영건(曺永建) 교수는 1940년 경북 울릉군에서 출생. 서울대 법대를 거쳐 건국대 경제학 박사. 1971년부터 2006년까지 건국대, 청주대, 경남대 교수. 영국 런던대학교 LSE 연구교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대학, 블라디보스토크대학에서 강의하고, 중국 상해 복단대학 경제학부 교환교수, 경남대학교 경상대학장 등을 거쳐 경제사학회 부회장,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 사월혁명연구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상임대표, 6.15실천남측공동대표 경남상임대표의장, 6.15실천남측학술상임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편자]
 
<출처 : 몽양추모학술심포지움 논문자료집에서  >
 




항목선택

카테고리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55 2) 몽양과 6.15 시대 3) 6.15시대와 몽양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4 몽양과 6.15 시대(1)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3 해방정국과 몽양 / 송남헌 몽양사랑지기 2021-02-09
52 몽양 여운형을 생각하며 / 문익환 몽양사랑지기 2021-02-01
51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수립에 대한 몽양의 심정 / 이기형 몽양사랑지기 2021-01-29
50 여운형은 누구인가? / 김영식 몽양사랑지기 2021-01-18
49 몽양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 김형민PD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8 신한청년당과 몽양 여운형 - 3ㆍ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 김삼웅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7 몽양 여운형의 독백 (2) 몽양사랑지기 2020-11-22
46 몽양 여운형의 독백 (1) 몽양사랑지기 2020-11-22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