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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북에서 존경받는 포용과 신념의 민족지도자 / 서중석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08

                                             



                                 남북에서 존경받는 포용과 신념의 민족지도자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세월이 흐를수록 존경받는 민족지도자 
 
대 민족국가가 형성된 이래, 그 나라에서 크게 존경을 받는 인물은 민족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활동하였거나, 민주주의나 인민을 위해서 무한한 애정으로 헌신한 경우, 또는 근대화나 민족국가 헝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드골은 서거한 이후 더욱 존경을 받고 있고, 1990년대에 와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독일 히틀러의 전격작전에 프랑스가 베르덩의 치욕 이래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고, 프랑스 인민이 실의와 패배의식에 빠졌을 때, 드골은 지유 프랑tm를 이끌며 프랑스 인민들을 격려하였다.
프랑스가 나찌로부터 해방될 때, 드골부대는 연합군의 앞장을 서서 자랑스럽게 파리로진격하였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는 언합국의 일원이 되었고,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획득하였다.
1950년대 말 알제리 인민해방전쟁의 격화로 프랑스의 국론이 양분되었을 때, 프랑스 인민은 다시 드골을 불러와 명예롭게 해결짓도록 하였다. 1968년 거센 학생운동에 다시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노(老) 거인은 명예롭게 유유히 퇴진하였다. 코큰 드골은 프랑스의 자존심이었고 긍지와 영광의 상징이었다.
한국은 프랑스와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드골 같은 사람이 출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민족해방운동이 하나의 중심을 갖기도 어려웠고, 해 방 후 미 ·소 두 나라가 점령한 상태에서 민족 전체를 통합하는 구심력을 갖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드골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거나, 그러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인물로 한 두 사람을 꼽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여운형이 아닐까.
  

여운형이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에서 힌트를 얻어, 국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순발력 있게 재빨리 신한청년당을 조직한 것의 의의는 적극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진에 있는 김규식을 오도록 하여 파리 베르사이유궁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장덕수, 선우혁, 김순애 등을 국내와 일본 둥지로 보내 여러 인사들을 접촉하게 하고, 여운형 자신은 만주와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에 가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고무한 것은 의의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한청년당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동경 2·8독립선언이나, 3·1운동의 추진에 영향을 미쳤고, 노령과 만주 등지의 독립운동에 자극을 준 것은 사설이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만큼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일어난 3·1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의 선발대 역할을 했다는 정도에서 그 의의를 평가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19년 8월 15일 해방된 날 아침부터 보여준 여운형의 활동은 한국인으로서는 길이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족적이었다.
일제의 철저하고 악랄한 탄압으로 국내에서 무력을 포함한 민족해방 운동을 전개하는 데 제약이 많았고, 만주의 지리적 여건 등도 작용하여 무장투쟁 등 항일민족해방투쟁이 상당부분 국외에서 전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족해방운동이 국내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 다수가 국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 한 이후 국내에서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일제와 싸우며 건국을 준비한 단체는 여운형의 건국동맹밖에 없었다. 몇몇 공산주의자 단체도 국내애서 활동을 하고는 있었으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한국인 각계각층을 망라하거나 여러 층을 포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 조직도 상당수는 여운형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제 말에 가장 중요한 지역인 국내에서 전국적 규모로 여러 층을 포섭하고 여러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벌인 건국동맹의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여운형은 수년 동안 여러 조직을 만들어 민족해방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1941년 8월 11일 아침 엔도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치안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였을 때,
① 전 조선의 정치범 경제범 즉시 석방, ② 경성 식량의 확보, ③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④ 학생 훈련과 청년 조직에 간섭하지 랄 것, ⑤ 각 사업장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는 데 방해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여,
이제 한국인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국가 건설을 해나가고, 그 일환으로 스스로 치안을 담당할 것을 선언하였다 우리가 해방을 상당부분 주체적으로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전체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역량이 그 만큼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여운형과 건국동맹원들에게 가장 큰 공로를 돌려야 할 것이다.
  
미국과 영국 둥은 소련이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계획을 일찌감치 세우고 있었다. 그 리고 해방 후 그 계획을 구체화하였던 바, 그때 미국은 신탁통치 실시의 명분으로 표면으로는 한국인의 자치력 결여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지적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8월 15일 바로 그날부터 건국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8월 말까지 전국에 140개 이상의 건준 지부를 만들어 치안를 유지하는 등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건준의 존재는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실증이었다.
한국인의 민즉해방투쟁은 만난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국내와 국외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해방된 그날 국외의 유력한 민족해방투쟁세력은 고국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김구, 김규식이 이끄는 대한 임시정부는 중경이라는 오지에 있었고, 김구는 그날 서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은 서안에서도 더 들어가는 연안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 최용건 등의 만주 빨치산은 흑룡강 너머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집결해 있었다.
이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설사 급히 고국으로 달려온다 하더라도 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므로 건준이 경향 각처에 조직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자치 능력이 결여된 민족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운형은 한국민족의 독립 의지와 자주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2. 여운형의 민족주의와 미·소

항일민족해방투쟁을 벌여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민족의 해방을 희원하는 마음이 여운형 못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여운형 못지 않게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김구 같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만주 독립군의 무명의 병졸이더라도 해방을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하였을 것이고, 기약없는 세월 속에서 전선에 자신을 바쳤다.
해방 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을 갈구한 사람 또한 무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운형의 민족주의는 김구의 그것과 달랐고, 여운형의 노선은 공산주의자 다수의 그것과 달랐다. 여운형은 시종일관 통일합작의 방법, 곧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또는 좌우합작의 방법을 통하여 민족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의 목표하는 바와 그것의 달성 수단간에 괴리현상을 보여주었다. 집념이나 집착,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이성적 판단이나 대국적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일이 참으로 많았다.
김구는 국외에 있을 때에도 그러하였지만, 15년 11월 23일 귀국한 이래 적어도 1947년까지는 줄기차게 중경임시정부 추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중경임시정부 추대 운동은 민족적 정통성이 취약하였던 이승만이나 한민당에 일시적으로 이용당하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실제로 실현될 수가 없는 주장이었다. 남의 좌익과 북의 좌익, 소련이 용납하지 않았고, 미국 정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승만이나 한민당에서도 1947년에는 공공연하게 반대하였다. 김구와 한독당이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경임시정부 추대 운동을 벌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합리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김구가 반탁투쟁을 벌인 것이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였거나, 자주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였다면 그것도 목적과 수단간에 현저한 괴리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탁통치는 여운형과 백남운도 반대하였다. 여운형은 1946년 1월 14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반 하지 중장과 회견하고 조선사람은 탁치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나는 금일이라도 속히 우리의 완전독립를 요망한다고 하였더니 하지 중장은 그 말은 인어로 보아서 '돕는다'는 말이라 하고, 또 탁치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 다만 제의된 것이므로 앞으로 박치가 실현되지 않도록 노력하겠고, 만일 탁치가 된다면 그 기간이 가장 짧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점령군의 장관이 신탁이 없도록 노력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반탁투쟁은 자주독립정신으로 한 것과 친일파들이 한 의도와는 크게 다르지만, 독립운동세력의 주관적인 즉시독립 희구와는 차이가 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도 언명하였고 미 국무부에서도 경고하였듯이, 그것은 자칫하면 국제 고립, 민족 분열, 독립 지연을 초래하게 되어 있었다. 여운형이 다시 열릴 미·소공동위원회가 또다시 실패하면 한국은 엄청난 위기와 비극을 맞이할 것을 예견하면서, 1947년 1월에 반탁지도자들은 즉시 반탁투쟁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혹 그들이 기어코 한다면 대중은 속지 말기를 갈망한다고 토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성적 판단의 소유자인 김규식이나 김병로, 안재홍도 감정적인 반탁투쟁은 한국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고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지만 겉다르고 속다른 단정운동세력의 반탁투쟁에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였던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반탁투쟁은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바로 통일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하루 빨리 미·소공동위원회에 협조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에 따르면 먼저 한국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고 천명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결의 3항의 후단에 있는 신탁통치는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의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짜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맹렬히 반탁운동을 벌였던 김규식 등은 먼저 임시정부를 구성 하고 나서 민족의 총의로 임시정부가 신탁통치 실시를 반대하면 연합국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운형과 손잡고 미 ·소공동위원회의 임무가 성공하도록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편협한 당파적 이해의 소유자들, 분단체제 속에서만 기득권을 계속 누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반탁투쟁의 이데올로기적 효용성을 중시하였고, 단독정부 수립에의 길을 닦는 데 그것을 연결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그들은 잇달아 체포되었지만, 계속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상재,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과 협동하여 신간회를 만들었는데, 이미 그 이전에 천도교 구파세력과 함께 6·10만세투쟁을 조직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협동노선 대신에 계급 투쟁노선을 내세웠다. 1928년에 코민테른이 좌경화하고, 그 해에 코민테른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지침으로 12월테제를 내려보냈던 바, 1929년의 세계경제대공황의 영향, 부르주아세력의 친일화 경향과 민족개량주의세력의 대두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19.11년에는 신간회 해소 결의가 나왔다. 그 후 공산주의자들은 12월 테제의 지침에 따라 활동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에도 민족의 해방을 제1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12월테제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노선에 따르는 한, 민족해방투쟁을 효율적으로 벌이기는 쉽지 않았다. 12월테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부르주아지한테도 창끝이 돌려져 있었고, 부르주아민족주의자는 공산주의자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규정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자와 정력적으로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서 채택한 8월테제는 12월테제에서의 계급 배치와 별다름없는 노선을 설정하였다. 지주 부르주아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민족급진주의자도 배격 대상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공산당에서는 "오늘 조선의 정치적 분열은 좌우의 분열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와의 원칙적 분열이며, 오늘에 있어서는 '중간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좌익은 민주주의세력, 우익은 비민주주의세력이라고 정식화한 것이었는데, 김규식, 안재홍 등도 비민주주의세력이라고 규정한다면, 한국에서는 미·소의 대결과 직결된 좌우의 필사적인 투쟁밖에 남을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공산당·남로당의 편협한 입장은 좌우합작운동시기에 민전 5원칙에서 다시 표명되었고,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 기간에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공산당은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밝혔을 때부터 단정 수립을 적극 반대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이 기필코 성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에는 그것의 성공을 위하여 대대적인 군중시위집회를 가졌다. 남로당은 임시정부 곧 통일정부가 들어서지 않고 분단이 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의 일은 성사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공산당·남로당의 노선은 임시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친미우익세력이 포함되지 않는 임시정부 구성에 미국이 동의할 리 없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우익의 상당부분이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하도록 오히려 유도하여야 했으며,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인 의사를 보인 김규식 등의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우익과 앞장서서 제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기간이나 좌우합작운동 시기에 보여준 입장은 그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17년 4월 김규식 둥이 앞장서서 극우단정운동세력을 견제하며 입법의원에서 마샬 미 국무장관에게 공동위원회 재개에 대한 감사의 전문을 발송하자, 남로당에서는 "극흉한 계획하에 3상결정을 반대하는 그들 자신이 공위 속개가 (가능하게 되자: 필자) 체면도 염치도 없이 공위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3. 각계의 힘을 합쳐 건국하려 한 포용의 지도자

 여운형은 민족해방운동이 최대한의 역량을 가지려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합작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해방 후 그는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북위 38도선를 경계로 에 들어와 있는 이상, 좌우합작만이 통일민족국가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일제시기 해방 후에 여운형과 같은 민족의식, 정치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도자들이 김규식, 백남운, 안재홍, 김병로 등 적지 않았지만,여운형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 남과 북을 포용하려는 지도자는 없었다.
   
1921년 만난신고를 무릅쓰고 몽골의 고비사막을 넘어 이르쿠츠크를 거쳐 다음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이 대회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이때는 러시아에서 적군과백군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해로 영군이 들어오고 루마니아로 프랑스군이 모이자, 러시아의 우경파들이 "공산당에게는 패하여도 다시 흥할 수가 있지만, 외국에게 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산당과 합작을 하고, 제정파 군인들이 붉은군대와 합작을 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였다. 외국의 압력을 받을 때에,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계급과 당파를 떠나 민족적 단결을 하는 것에 여운형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레닌 등과 만나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관하여 격의없는 의견을 나눈 여운형은 곧 중국으로 돌아와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위하여 뛰어다녔다.
한편 1922년 7월에는 독립운동세력들이 대립하고 또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각계각층의 주장과 이익을 충분히 토의하여 최선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안창호, 신숙, 김구, 이동녕, 원세훈 등 50여 명이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일도 무위로 돌아가자 김구, 이유필, 조동호 등과 함께 곧이어 한국노병회를 만들었다.
   
여운형이 일제의 진주만 기습 이후 동분서주하여 만든 진국동맹의 강령은 세 가지로 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이었다. 실제로 건국동맹에는 각인각파가 망라되어 있었다. 해방이 되어 건준의 부서를 짜고 그것에 인원을 배치할 때, 여운형은 우익과 중도파와 좌익이 균형있게 들어가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건준에는 안재홍 등 우익 인사들도 적지 않게 참여하였고, 정백·이영 등의 장안파공산당 간부, 이강국·최용달 등의 재건파공산당도 들어와 송진우세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함께 일하였다.
여운형이 보기에, 미·소 두 나라 군대가 한국을 점령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한국은 좌우협동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방에서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이 접합하는 위치에 있고, 세계 최강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자주국가의 건설과 유지·발전은 좌우의 통일 협력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인식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민족이 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여운형은 1946년 6월 기자들에게 진실한 통일정부는 좌우의 완전한 합작에서만 수립되게 되어 있지, 좌나 우의 어느 한쪽만으로는 수립되지 않을 것이며, 수립된다고 하더라도 지속성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는 1946년 10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현하 우리 민족이 처하고 있는 내외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우리 자주정부의 수립이 민족통일과 좌우 연립을 전제로 함은 명백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주적으로 일정한 형태의 내부적 연합을 먼저 실현할 수 있을 때에는 오히려 조선문제에 관한 미·소의 일치를 촉진하면서 건국의 과업을 전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문구에서도 좌우합작이 이루어져야만 민족의 주도성 또는 자주성이 지켜질 수 있음을 시사하였지만, 여운형은 좌우합작이 제대로 되어야만 자주성을 견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우선 여운형은 8·15해방이 단지 연합국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이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며, 우리 동포가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게속해온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따라서 우리 스스로 자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미 15년 8월 11일경 이만규에게 연합군에 첫번 교섭할 4개 조건의 첫번째로, "조선해방은 연합군의 선전 결과라고 보아 감사하다.
그런데 조선민족 자체도 합병 전후로부터 금일까지 맹렬히 싸워온 것을 해내·해외의 혁명운동 예를 들어 말하고 조선인 자체의 피흘린 공이 큰 것을 저들에게 인식시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으로 그는 건준을 조직하였고, 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여운형의 자주성은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더라도 도식적으로 이식해서는 안되고 그 나라의 현실에 토대를 두어 창조적으로 적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맑스주의는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가 되었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러시아나 중국과 사정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 점에서도 그는 당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여운형의 자주정신은 해방 직후 미군문제에 대하여 송진우 등한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군이 고마운 손님이며, 여기 와 있는 것은 좋을지 모르되, 우리 살림은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손님들이 하루 바삐 돌아가실 수 있도록 초당파적 견지에서 우리는 국가 건설에 힘을 합하는 것이···."
 
그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을 때 이렇게 피력하였다.
 
"조선의 건설은 조선인이 맡아야 된다. 불원 수립될 신정부도 조선제(메이드 인 코리아)가 되어야지 외국제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어디까지 조선인이니까 언제든지 조선의 주인이요, 조선 건설의 주체다. 외인의 원조는 받을망정 그 괴뢰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원조를 받아 자립할 뿐 편향과 의존은 절대 금물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율통일이 없는 곳에 조선제 정부도 없을 것을 잊지 말자."
 
이 발언을 한 얼마 뒤 여운형은 38선을 넘었다. 북의 지도자들을 만나 '조선제'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여운형처럼 폭넓게 자주성을 살리기 위하여 북의 지도자들을 만나러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서로의 당파적 이해에 집착하거나 소아적 자주성에 얽매여 자신의 세력 중심으로만 사고하려는 경향이 만연되어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편향과 의타를 특히 경계하였다. 외국을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도, 외국에 무조건 의존하려는 것도 정부 수립을 오히려 방해하고 천연시키고, 국제간의 불화를 조성하여 민족의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반탁투쟁의 소용돌이가 일단 진정된 1946년 1월 2일, 인민당에서 김구의 중경임시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권고문을 보낸 것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해방도 타력에서 결정되고 정부도 타방에서 수립된다면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탁치를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임정은 인공과 각당각파를 합쳐서 어서 건국회의를 열고 여기서 참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미·소회의가 열리기 전에 완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력으로 안된다면 결국은 민족적 자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조직할 때 남북조선의 민주주의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의 공동협의체를 구성하여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임정 수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과 4개국 원조에 응할 한도와 방법을 협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여운형의 제의는 1947년 9월 한국문제가 국제연합으로 넘어감으로써 분단의 국제적 절차를 밟게 될 때, 근민당 등 중도파 정치인들의 남북지도자회의 소집 요구로 나타났다. 그리고 분단이 확정된 시기에 와서야 남북협상 또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가 이루어졌다. 너무나 때늦었지만, 그것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4. 의회주의를 통한 '제3의 건국'의 길 구상

 여운형의 민족주의는 그가 어떠한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는가에 잘 나타나 있다. 여운형은 해방 후 어떤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을까.
이것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20년부터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할 때까지, 왜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들과 줄곧 동지관계에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자진 월북한 사람들도 그러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공산주의와 광의의 사회주의가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내내 혼재해 있었다. 또한 한국에는 일제 강점 초기건 남로당 시기건, 맑스주의나 레닌주의를 정확히 요해하고, 레닌주의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닌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점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착취와 수탈에 반대하여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수준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경우도 많았다.

여운형은 러시아 혁명의 중점은 민족과 계급을 해방하는 데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약소민족을 압박하고 계급적으로 대중을 착취하는 일은 전인류의 불행이요, 화란의 근원인 바, 러시아혁명은 다름아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항쟁이었으므로, 속박을 당하고 있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혁명가로서는 누구든지 귀를 기울여 이 혁명의 외치는 소리를 똑똑히 듣지 않을 수 없고, 눈을 크게 뜨고 이 혁명의 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앞서 말한 바, 맑스주의는 소련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으니 조선에서는 두 나라와 달리하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맑스주의자, 특히 레닌주의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논리를 왜 여운형은 펴고 있는가. 여운형은 맑스주의를 착취를 없애는 주의로 이해하여 각각의 나라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의 것이 덧붙여져야 보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곧 각각의 나라 또는 사회에서 당면한 임무를 가장 올바르게 실현시킬 주의로 서유럽에서는 맑스주의를,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를, 중국에서는 삼민주의를 꼽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운형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 개인으로서의 주의는 맑스주의자이다. 또한 조선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행동을 한 것이다. 러시아에 레닌주의가 있듯이, 중국에는 삼민 주의(손문주의)가 있고, 조선에는 여운형주의로써 하는 것이 '조선 해방'(따옴표는 필자가 한 것임)의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에서는 계급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의 각 주의를 고집하는 것도 불가하다. 전 민족은 각기 그 주의를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공동의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현단계에서 가장 가능 적합한 프로그램에 그 총역량을 집중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여운형은 맑스의 『공산당선언』,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영문판), 영국노동당 관계자의 직접행동을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공산당 당원이었고 중국공산당에도 가담하였지만, 그는 유럽 맑스주의자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이동휘와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레닌이 자신한테 "조선은 과거에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지금 민도가 낮으므로 공산주의를 실행하려 들어서는 잘못이고 지금 민족주의부터 실행시킴이 현명한 일"이라고 말하였던 바, 그것이 자신의 의견과 같음을 확인하고 돌아와 상해임시정부 개조 등에 착수하였고, 코민테른의 권유로 손문의 중국혁명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르주아민족주의자와는 달랐다. 애국열이 불같은 혁명투사 이동휘처럼 그도 일본의 억센 제국주의세력을 구축하는 데에는 인류정의를 부르짖는 사회주의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바로 상황이 이와 같았으므로, 공산주의자와 광의의 사회주의자 또는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은 서로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함께 동지로서 싸웠다. 그 반면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은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고자 하였고 미온적 비전투적이었기 때문에, 너무 적극성이 없었고 투쟁력도 약했다.
  
그러면 여운형은 어떠한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는가?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여운형이 레닌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져 반가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상으로서는 공산주의에 찬성하지만 실행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을 먼저 자본주의를 발달시키고 그 후 공산주의를 실행하여야 한다고 피력한 바를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여운형은 이와 같이 즉각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러시아의 노농독재정치도 비판적으로 보았다. 해방 후 여운형은 이념이나 체제에 대해서 명확히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리와 시기에 따라 정치적으로 발언한 경우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10월 학병동맹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그 전후를 살펴볼 때 그의 의중을 상당부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저 노서아를 보십시오 무산자독재이던 나라가 ‥‥이번 전쟁을 통하여 10여 민족을 위하여 싸워 완전히 통일되므로 인하여 노농독재는 해소되고 민주주의화하였으며,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에서도 6-7년 고생하여 전승한 처칠 수상은 물러가고 대신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노동당의 아트리가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당 독재정치가 아니라 의회를 통하여 순민주적인 입장에서 개혁하는 것입니다. "
 
   이 강연에서 여운형은 노농독재와 보수적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진보적 제3의 길을 그 대안으로 삼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길도 폭력이 아니라 의회제를 통해서였다. 그것은 그 자신과 호흡이 맞는 정치제도였다. 여운형이 1946년 11월 기자들에게 현 단계를 부르주아혁명이라고 규정하면서 진보적 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봉건적 소작제를 철폐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취지로 보이나, 전보다 자본주의에 더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마도 여운형이 해방 직후 바람직하다고 느낀 정치체제는 앞의 학병동맹원들 앞에서 말한 바, "우리들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낙원은 노동자. 자본가, 민주당, 공산당 등 각계각파가 모여서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구성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여운형이 그것을 건준, 인민공화국, 인민당에서 추구하였음은 각각의 '선언'이나 정책 정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운형이 일제에 투옥되었을 때 한 다음의 말은 두고두고 음미해 봐야 할 것이다.
 
"조선 해방에는 종시 일관 조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나아갈 심산이다.
전체가 공산주의를 해야만 하게 되면 곧 공산주의를 실행할 것이요, 수정되어야 될 것이면 곧 수정하여 실행할 뿐이다. 결코 언제든지 일부 소수인을 위하는 운동가는 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이 독립되면 나라일은 민족 전체의 의사대로 해나갈 터이다. "
 

5. 넓은 식견과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
 
여운형은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 뛰어난 견식과 통찰력이 있었다. 그의 교유범위는 손문 등 국민당 주요 지도자, 모택동 등 공산주의자, 레닌 등 소련의 지도자 등에 미치고 있었고, 일본의 경우도 극우파시스트 군국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이러한 데에서 여운형의 풍도를 읽게 해주는 것이지만, 위대한 정치가로서 여운형이 부닥친 정치 환경은 너무나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1919년 11월 대담하게 일본에 가  코가(古賀) 척식국 장관 등을 만났을 때에도 많은 비난이 있었고, 심지어 위해까지 가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적도(敵都)의 한복판에서 독립운동이 내 평생의 사업이라고 말하며, 한국인의 민족국가 건설을 당당히 피력하여 일본사회에 영향을 준 것은 만주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못지 않게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여운형은 1920년대에 중국혁명에 참여하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가지면서 상해 등지에 오는 외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만났던 바, 그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상해의 우국지사 가운데에는 위정척사의 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비타협 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강직성은 높이 살 만한 것이었지만, 일제 때나 해방 후나 한국이 처해 있는 복잡성은 여운형 같은 폭넓은 정치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여운형을 가장 괴롭힌 것은 위정척사파의 비타협성보다는 자신과 함께 일해온 공산주의자들의 교과서적인 원칙론이었을 것이다. 여운형이 원칙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그는 확고부동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과 성격은 1930년대나 해방 직후에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컨대 1930년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주류는 계급주의를 견지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데, 여운형은 인민이 바라지 않으면 노농독재는 실행해서 안되고, 민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비타협적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전투적 공산주의자들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는 인민공화국도 비상조치로 세운 것이었으므로 언제든지 명칭도 내용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재건파 공산주의자들은 인공 사수가 원칙이었다. 그는 좌나 우로 갈라져 편싸움하는 것이 갖는 파괴성과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또 민족 대다수가 바라는 통일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좌우합작은 조금도 물러설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었다. 그러나 간부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간파라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으며, 좌와 우는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전 5원칙과 같은 원칙으로 대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여운형이 얼마나 의지가 강하고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였던가는 일제 시기 계급지상주의자들의 비난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도, 특히 1946년 2월 민전 결성 이후 극좌의 공격을 공박의 형태로건 협박이나 테러의 형태로건 서거할 때까지 끊임없이 받아왔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동요하지 않았던 것에서 잘 인지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초에 젊은 공산주의자로부터 '양서류적 존재'라는 얘기를 들었고, 좌우합작운동의 시기에는 기회주의자 또는 반동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자신과 같은 편'으로부터 들었다. 동지관계에 있으면서도 자신과 노선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험악한 비난이 쏟아졌던가는 백남운이 『조선 민족의 진로』를 쓴 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 신봉자들이 공개적으로 쓴 글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오죽하면 여운형이 민전 5원칙이 나왔을 때 박헌영이 체포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남로당이 결성된 직후인 12월 4일 '자기비판의 서'를 발표하여 한 병졸로서 여생을 건국사업에 바치겠다고 말하였을까.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포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운형은 넓은 경륜과 개방성 속에 언제나 최선과 진실을 지켜가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들과 만나서는 십자가에 의를 위해 순사한 청년기독의 정신을 버린 위선적 신앙을 성토하였다.
그러나 언제 보아도 서민적이고 활달하고 호탕하며 뇌락지기(磊落之氣)를 지닌 풍도가, 큰 눈, 활활 뻗은 두 귀, 시원한 이마 때문에 더욱 돋보였던 여운형은 그렇지만 자주 외로움과 답답함을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1921년 늦가을 몽골의 고비사막을 걷고 타고 하며 횡단하던 무렵을 회상하며 1936년에 쓴 글의 다음의 앞대목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수많은 민초와 민족해방운등 지도자들이 같이 느꼈을 터이지만,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른 인상을 주는 여운형이 쓴 글이기에 깊이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그러나 나의 생애의 과거가 이제 나의 상념의 세계로 보내어주는 추억과 회상의 흐름은 너무나 황량하고 적막하다. 이 단조하고 우울한 회색의 흐름을 밝게 하여줄 아무런 꽃다운 빛도 찬란한 광채도 없다.
그리하여 마치 황혼의 모색(暮色)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쓸쓸한 폐허나 바라보는 듯이, 나는 나의 눈앞에 흘러가는 기나긴 생활의 기억을 바라본다. 기쁨과 유락의 자취는 그곳에 없고, 다만 곤난한 사명과 의무에 충실하려는 끊임없는 초조와 우려의 연속을 발견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