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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화로 남은 마지막 큰 정치가 / 이주헌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09
 


               신화로 남은 마지막 큰 정치가







여 운 형

1886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남
1914~17 중국 금릉대서 영문학, 철학공부
1919  상하이 임정 참여, 외무총장, 의정원장 역임
1933  <조선중앙일보>사장 취임
1944  건국동맹 결성
1945  건준, 인민공화국 수립
1947  암살당함



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양쪽 총리가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남북은 분단이래 처음으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통일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온갖 영욕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 정치사 속으로 사라져간 인물 가운데, 아직도 수다히 가슴졸일 장애를 앞두고 있는 이 합의를 가장 가슴 뿌듯이 지켜볼 사람은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 선생을 우선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외세의 원심력과 이념의 갈등으로 민족이 갈리는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다가 바로 그 이유로 마침내 한 극우청년이 쏜 총에 맞아 스러졌다. 최근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통일 기운이 싹터옴에 따라 그의 삶과 사상 정치노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몽양의 인물 됨됨이와 정치성향을 평하여 '영원의 청춘' 융합과 포용의 정치인' '진보적 민주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 '인간적 민주적 사회주의자'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노선이 중도적인 민족자주노선이자 중립노선으로 재정립돼야 할 것"(권두영 민족통일연구소장)이란 데 있다.
최근 들어 활발한 그에 대한 조명은 몽양여운형 선생 전집 발간위원회의 <몽양여운형 전집>과 심지연 교수(경남대)의 <인민당연구>출판으로 나타났고 앞으로 강덕상 교수(일본 일교대)의 <여운형 전기> 이정식 교수(미국 펜실바니아대)의 <8.15와 여운형>, 심지연 교수의 <여운형 노선 연구>등이 출간되는 것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몽양전집 발간위 편집간사 여현덕씨(연세대 박사과정)는 "비록 4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제 남북화해가 시작되고 있으므로 지금이 바로 몽양이 조명돼야 할 시기이며 그의 업적이 새롭게 빛날 수 있는 시기"라며 어쩌면 몽양은 시대정신의 면에서 40~50년을 먼저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몽양은 1886년 4월 22일 (음력)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아버지 함양 여씨 정현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내고 자유당 선전부장과 민주공화당 고문을 지낸 여운홍씨가 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몽양은 조부 여규신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구한말 중국 정벌을 내세우고 결사를 꾸미다 유배를 갔다 온 조부의 웅지를 그는 늘 높이 우러렀다. 이를테면 자주정신을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셈인데 이런 자주정신은 그의 항일독립운동 이력과 맞물려 후일 3.8선을 가르며 남북에 진주한 미국군과 소련군에 대해 그로 하여금 철저히 합리적이면서도 주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나는 연합군에 대한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하우 두유 두"라 인사할 것이고 두 번째는 '탱큐'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것이고 세 번째로는 '구드 바이'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런 자주노선은 해방공간 당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의 국제 노선과 잦은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해방 전후 몽양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이란씨는 "몽양이 박헌영과 만난 '지금 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민족의 단결과 통일정부 수립을 통한 독립국가 건설 그리고 외세축출이 급선무' 라고 강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고 회고한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15살 때 서울에 올라온 여운형은 배재학당·홍화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는 14살 때 용인 유세영씨 장녀와 결혼했다. 4년 만에 사별한 그는 충주군의 진씨와 재혼했는데 이후 최근 북한여성대표로 남쪽을 찾은 여연구씨를 비롯해 4남3녀 7남매를 슬하에 두었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개화사상에 눈떠 이듬해 노비문서를 불살라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상투를 잘라 봉건인습과의 단절을 꾀했다. 문중 소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여운형은 한일합방 다음해인 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4년에는 중국 난징으로 가 이후 3년간 금릉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정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기까지 그의 중국시절은 그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자라나는 성장의 시기이자 국제정세의 흐름과 역학관계를 몸으로 파악, 후일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균형감각을 갖는 밑거름이 되어준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두루 가입해 국공합작에 적극 협조하면서 그는 민족해방에 있어서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일제는 후일 좌우분립과 분단의 단초가 될 지배방식을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금릉대학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들어간 여운형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외무총장.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다. 그 전해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당수로 취임했으며 20년에는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해 21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만든 것은 그 해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 를 보내고 이듬해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독립을 요구하면서 조선민중의 의지를 대표할 명분있는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규식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씨는 "몽양의 활동은 3.1 운동의 상황요인이 아닌 원동력" 이라며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를 국내로 파견해 만세 전 민족대표 등과 연락하게 해 놓고 몽양 자신은 만주.베이징 등을 돌며 동지들간의 연락을 취해 3.1 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고 주장한다.


이후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해 레닌과 요담하고(1921년), 중국 국민당의 쑨원, 공산당의 진독수 등과 교우를 맺으며 '한중호조사' 를 조직하는 등 정치적.외교적 활동에 중점을 둔 독립운동을 펼쳤다.
29년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돼 조선으로 끌려와 30년 4월 경성지법서 3년형을 언도받고 32년 7월까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한 그는 석방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망명정치가의 딱지를 뗴고 조선땅 안에서 합법.비합법 공간을 활용한 항일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조선중앙일보>는 36년 8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돼 이때 몽양도 사장직을 물러났다).
시국은 더욱 암울해갔다.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변절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지하로 잠적한 이 시기 조선체육회장 등 명사로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면서도 그가 드센 전향압력과 친일 회유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 감화력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 때문이었다.
이란씨는 총독부를 얼르고 뺨치며 그 요구를 들어줄 듯 하다가 결국에는 미꾸라지처럼 빠지는 몽양의 정치수완을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는 유도 기술 같은 것" 이라고 평한다. 이런 그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은 후일 우익쪽으로부터 "친일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공개적 활동을 할 수 있었느냐" 는 조작된 비난을 듣는 원인이 된다.

어쨌든 일제시기에 꿋꿋이 정도를 걸으면서도 꾸준히 그물망같은 지하조직을 형성해 44년 건국동맹(맹원 1만명).농민동맹을 결성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띄울 수 있었던 몽양의 능력은 그가 탁월한 적응력을 가진 항일운동의 지도자요 동시에 대중정치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해방 뒤 해외에서 활동하던 이승만.김구 등이 속빈강정식의 화려한 허명에 싸여 귀국한 것과는 달리 몽양은 국내에서 민중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인정받은 지도자로 자신을 키웠던 것이다.
몽양은 건국동맹 결성 당시 3.1운동의 교훈도 있고 하여 독립을 준비하되 무장력의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현역장교로 복무하던 박승환은 특히 몽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지시에 따라 만주군 사이에 건국동맹원을 포섭하고 이 무장력의 군대편제를 계획하는 등 몽양의 구상을 핵심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신용하 교수(서울대)는 몽양의 이런 무장력 확보 의지가 국내진공계획까지 이어져 있던 것으로 파악한다.
국내에 있으면서도 무장력을 확보, 일본 패망이 다가올 때 이를 활용해 독립국가를 조속히 이루는 데 필요한 국제적인 명분을 얻은 생각으로 꾸민 정치적 계획이었던 것이다.


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조선땅에서 물러나야 할 운명을 맞은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하루 전날인 14일 여운형에게 조선의 치안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제가 여운형을 치안을 맡길 핵심 인물로 선정한 것은 그가 최후까지 투옥될 만큼(42년말 그는 다시한번 투옥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대중운동과 관계가 있어, 일반 대중한테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5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돼 여운형은 위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민중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던 건준은, 정치범을 석방하고 8월말까지 전국에 지부로서 인민위원회를 1백 45개를 세우는 등 활발한 치안, 통치 선전을 활동을 벌였는데, 남쪽에서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고 말았다.
통일전선이 아니면 한민족의 미뤄져온 역사적 과제인 근대민족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울 가지고 좌우합작에 주력한 그였지만 그러나 몽양은 결국 미,소 분점 아래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교정'하지는 못했다. 통일민족국가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에 총역량을 쏟은 좌우 사이의 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때맞춰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정착 돼 가는 실정이어서 그의 중도좌파로서의 입지가 점점 부식돼 갔기 때문이다.

몽양이 암살된 47년이 본격적인 냉전체제가 시작되는 해임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속에서 그가 안은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미군이 아직 진주하기 전인 45년 9월 6일 건준이 모체가 된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이승만이 주석으로, 여운형이 부주석으루 추대됐다.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그해 10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해 총재로 취임했다. 인민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민주주의민족전선, 미소공위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노선을 같이하는 등 좌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주류파는 온건성이 강했다. 이때부터 얼마 안되는 세월이지만 그는 10차례에 가까운 테러를 받아가며 죽기까지 좌우합작·통일전선을 위한 피눈물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쏟았다.


몽양은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의 한사람으로 선출됐다.
45년말∼46년초 신탁통치 찬·반으로 좌·우익간의 격한 대립을 보이던 정국이 46년 3월 열린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기대로 잠시 잦아드는 듯하다가 공위가 결렬되면서 다시 정국은 마찰양상을 보였다.

이승만은 그해 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쪽으로 자신의 마각을 드러냈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7월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토대로 한 '신전술'을 채택해 미군정에 대해 강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9월 전평이 주도한 총파업에 뒤이어 10월 인민항쟁이 전개되는 혼란의 와중에서 여운형은 중도좌파를 대표해 중도우파의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남북분단과 민족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느 정도 진전되는 듯하던 이 위원회의 좌우합작 노력도 때맞춰 미군정이 좌익이 극력 기피하는 입법기관 수립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좌파분열책으로 좌익인사를 다수 검거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해 몽양은 북한 지도자와 4차례에 걸쳐 만나 좌우합작·남북통일에 대해 논의했다.

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재개된 미소공위가 성공하도록 노력하는 등 좌우합작운동에 계속 헌신하던 여운형은 47년 7월 1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단정을 지지하는 극우 청년 한지근이 쏜 총에 맞아 62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좌우합작이 점점 어려워가면서 주위의 측근들에게 "나는 결국 죽을 거야. 그렇지만 죽더라도 분단을 막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라고 내뱉곤 했다는 그의 '예언'처럼 그는 분단의 제물로 사라져 간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광범한 민중적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민족지도자는 몽양 여운형이었다. 또 여운형의 정치노선은 일반적으로 가장 훌륭한 통일노선으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그의 노력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40여년 뒤 통일을 위한 남북의 노력이 조금씩이나마 구체화되면서 과거의 통일노력 유산을 새삼스럽게 재조명하게 되기까지는 그의 노력을 그렇게 포말로 부서진 채 흘러다녀야 했던 것이다.
                                                                                                         

 - 이주헌 (91.12.29)                                                                          

 

한겨레 신문사 간,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3>중에서 채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