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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양 여운형에의 회상 / 이기형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19



 

 



몽양 여운형에의 회고

 

 

 

이기형

 

 

 

1941년이면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이다. 그때 25살의 홍안흑발이었던 청년이 지금은 77세의 노인백발이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52년이 지났다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고 덧없는 동시에 격동스럽고 꿈만 같다. 그때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했고 지금은 분단된 조국의 남반부에서 드센외세에 갇혀 반역사․반민주 독재세력이 득세하는 혼돈속에서 내일의 빛을 찾아 오늘을 응시하고 있다.

1941년 3월부터 필자는 일본 동경 예술대학 예술과에 적을 두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신문배달, 우유배달로 학비를 대거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홀어머님을 고국에 남겨둔 채 큰뜻을 품고 바다를 건너 식민지 종주국 수도에 온 청년에게 좌절이나 굽힘이 있을리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달라붙어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해 겨울의 평양박치기

 

그해 12월 8일, 무모한 일본 제국주의는 ‘미․영 박멸’ 구호 아래 드디어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보다 앞서 진작 하와이 진주만을 소위 ‘가미가제호’ 로 육탄폭격을 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날 아침 등교하자마자 학생들을 모두 운동장에 모아놓고 총리대신 도조의 선전포고를 들으란다. 우선 지나(중국)전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에 파견된 장병의 무운을 빌고 쇼와천황의 무병장수를 비는 묵념을 올리라는 교련장교의 구령이 내렸다. 얼마 안되는 우리 조선인 학생들은 아니꼽고 반감이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하는 체했다. 저쪽 떨어진 지점에서 ‘왈칵’ 하는 소리가 터지자 누군가가 냅다 뛰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릴 수 없는 그러한 계제였다. 선전포고식이 끝나자 바늘이 자석에 끌려모이듯 우리 조선인 학생은 저절로 모였다.

필자는 같은 창작과의 심연수와 이모, 그리고 영화과의 정모와 제일 친했다. 이모가 소란 소식을 들려주었다. 평양 출신이라는 체격이 다부진 학생이 학생이 묵념을 안하고 빳빳이 서 있었다. 이것은 언짢게 본 일본인 학생 하나가 “이 짜식, 왜 묵념을 안해?” 하고 모욕적 언사를 뱉었다. 순간 평양 학생은 그 사무라이 후손인 일본학생을 그 유명한 평양박치기로 ‘윽’ 받아 넘어뜨리고 내뺐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찌나 통쾌했던지 저마다 나직이 ‘야하!’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야기 와중에 같은 창작과 여학생 하나도 끼어들었다. 우리 다섯은 슬금슬금 일본아이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잘도 떠들어 식민지 학생들의 울분을 발산했다. 우리는 다같이 평양 그치의 용기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동시에 각자 자신의 용기 없음과 비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반일감정의 폭발이 반일투쟁의 일환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용감한 학생은 용케 잘 도망갔는지 아니면 경찰에 잡혀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날부터 거리거리의 확성기에서는 침략적 군가소리가 요란스럽게 흘러나왔다. 소위 ‘대동아전선’ 에 임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앙양, 고무시키려는 군국주의자들의 허망한 수법이었다.

 

 

무사시노에서의 멋쟁이 독립투사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40년 봄부터 경성(서울)과 동경을 왔다갔다 하며 전 수상 고노에, 육군대학 교수 오카와,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등과 만나 일본 중추 수뇌부의 동향파악에 주력했다. 동시에 체육인이요 사학자인 이상백, 일본전선회사 연구소 연구원 여경구, 와세다대학 장동휘, 중앙대학 전사옥 등 청년학생들을 은밀히 지도하고 있었다.

1942년 여름방학 어느날 필자와 심연수는 여선생을 모시고 동경 스가모 유원지와 그 일대 무사시노를 찾아 뜻깊은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무사시노라는 광활한 벌판은 푸른 구릉과 계곡이 잘 어우러져 경치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구니키다는 무사시노의 아름다운 경치와 서정에 반해 일생동안 무사시노에 얽힌 소설만 썼다는 일화가 있었을 정도의 명승지다.

그날 하늘도 푸르고 공기도 맑았건만 핍박받는 조국을 생각할 때 짓눌린 가슴은 무거웠다. 그러나 일세의 대지도자 여운형 선생을 가까이 모시고 있다는 기쁨과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선생도 아주 기뻐하시는 모습이었다. 선생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스타킹을 신고 회색 헬멧을 썼었다. 윗도리는 연한 하늘색 잠바차림이었다. 압박과 착치에 들볶이는 조국의 형제를 생각하면 가슴은 무거웠지만 오늘만은 독립운동의 멋쟁이 대투사와 함께 있어 마음은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은 결정적 패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어. 미. 영을 상대로 싸운다는 건 말도 안되지. 강아지가 호랑이에 덤비는 격이거든.” 몽양의 발언은 단호했다. 우리 둘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몽양은 일찍이 1937년 7월 7일 북중국 노구교에서 무모한 일본군이 중국 송철원 부대와의 침략전쟁을 터뜨린 그날에도 일본의 패망을 예언할 정도의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였다.

 

몽양의 화제는 다양했다. 일본의 경치는 인공적이요. 자질구레하지만 중국의 경치는 자연적이요.웅대하다고 했다. 조선 중아일보 사장시절 다망한 중에도 두만강에서 청년들과 천렵을즐기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중국 양자강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뱃놀이를 즐기던 추억담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노신의 혁명문학과 곽말약의 망명도 언급했다. 일보 치바에서 일본인 부인과 망명생활의 울적한 나날을 보내던 중국의 대문학자 곽말약이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병풍 너머 아기숨소리를 마지막 들으려니 가슴이 메어진다. 고국을 떠나 10년 세월 이제 향관에 다달아보니 싸움터 징소리 은은해 만감이 가슴에 이는도다’라는 시를 남기고 표연히 중국으로 떠나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가 장만해가지고 간 점심이 비록 조식조찬이었지만 그렇게도 맛있게 드실 수가 없었고 헤어질 때에는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어두라”는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중절모와 개화장을 든 계동의 여운형

 

모두에게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필자는 지금 50여년 전 즉 반세기 전 이야기를 쓰고 있다. 조국 분단 48년을 맞는 엄혹한 상황하에서 분단선 이북 함경도가 고향이요 거기에는 금년 97살인 홀어머님이 기어이 악착같이 살아계시리라는 비원을 안고 이 글을 엮어나가니 만감이 가슴을 치밀어 억누를 길이 없다.

이쯤에서 우리의 <길>지 독자들은 그렇다면 이글의 필자는 어떻게 해서 여운형 선생을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궁금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필자는 1938년 지방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진학하지 못한 채 청운의 꿈을 안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당시 조선 최고의 지도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대단했다. 그래서 우선 동향 출신으로 보성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문석준 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학자로 유물론적 입장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최초로 쓴 선각자요 독립투사다. 그날 선생은 다락 안의 원고뭉치를 가리키며 집필의 고충을 들려주기도 했다. 문선생의 소개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 후 이승만의 독립발언 단파청취사건 주모자로 피검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의 빛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16일 비통하게도 옥사하셨다. 일제의 잔혹성으로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유물변증법적 관점에서 조선역사를 최초로 기술했다.’는 뜻깊은 족적을 남겼다. 풍문에 의하면 해방 후 이북에서 ‘문석준의 조선역사’를 한 때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쨌든 진보적 사학자요 독립운동가인 문석준의 소개로 당대의 대지도자 여운형을 만났다. 그때의 감격을 어찌 잊겠는가. 1938년 초여름이었다. 55년전 일이지만 바로 엊그제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문선생이 가르쳐준 기억 속의 쪽지를 들고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 휘문고보 옆 계동 골목을 더듬어 찾았다. 골목을 직선으로 올라간 오른편 마지막 한옥집이었다....

‘경성부 계동 140-8’이라고 적힌 문패가 걸려있었다. 문을 노크하며 인기척을 하니 점잖은 중년부인 한분이 문을 열며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은 외출중인데 저녁때 돌아오신다고 했다, 할수없이 골목 위쪽 언덕 너머에서 시간을 보내며 골목 어귀쪽을 내려다보곤 했다. 드디어 중절모를 쓰고 개화장을 든 얼굴이 훤한 신사 한분이 유유히 걸어올라 오는게 눈에 띄였다. 여선생이 틀림없다고 걸어내려가며 두사람의 거리를 좁혔다. “여선생님이십니까?” 하고 인사를 올렸더니 “네”하고 환히 웃으시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선생의 뒤를 따라 서재 겸 응접실로 들어갔다.

책장에는 양서와 인문과학서적이 꽉 차 있었고 벽 두면에는 ‘가마귀 싸호는 골에...’,‘ 이몸이 죽고 죽어...’ , ‘삭풍은 나무 끝에...’, ‘한산섬 달 밝은...’등의 명시조가 붙여져 있었다. 당대 쌍벽을 이루었던 여류서예가 이각경 이철경 자매의 유려한 필적이었다.

그날 여선생은 참된 지도자론을 말씀하셨다. 지도자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남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몸소 대중의 선두에 서서 대중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히틀러나 뭇솔리니 같은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 대중과 역사를 거스르는 불장난꾼이라고 했다.

 

이날 여운형에 대한 필자의 인상은 이러했다.

풍채가 좋고 용모가 잘 생겼다. 이마가 넓고 번듯하고 눈이 인자하게 빛났다. 사람됨이 꾸밈이 없고 성격이 소탈해 대중적이어서 친근감이 들었다. 소개자의 탓도 있겠지만 사람을 탁 믿고 이야기를 거침없이 술술 풀어나갔다. 한마디로 '대인물 대지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에는 선생 주거지 부근에는 형사가 무시로 출몰하고 때로는 방문자와 맞부딪치는 일도 있다고 했는데 그날 아무런 사고도 없이 선생과의 상봉을 끝마칠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다.

 

그 당시 여운형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중국 망명에서 돌아와 징역을 살았고 조선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걸출한 독립운동가라는 것뿐이었다. 한데 그후 그의 전기를 쓰기 위해 그의 출생, 성장, 망명, 신한청년당 창당,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일본 동경 독립발언, 모스크바 극동 피압박민족대회 참가,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 ABC>번역, 옥중생활, 중앙일보사 사장, 지하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건설,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조직, 찬탁, 좌우합작 등 그의 눈부신 투쟁상황을 조사, 연구해본 결과 참으로 뛰어난 선각자, 애국자요, 독립투사, 혁명가, 진정한 민주주의자,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대의 도산이나 백범을 훨씬 뛰어넘은 선진사상의 소유자였다.

 

 

백색테러, 다시 대지도자를 기다리며

 

그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우익 백색테러에 쓰러졌다. 그 암살 배후는 지난해 백범의 암살범 안두희가 증언했듯이 이승만과 그의 심복 각료들임이 분명해졌다,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대다수의 국민은 지난 48년 동안 잘못되고 근거도 없는 반공정책의 탄압 밑에서 숨죽이고 짓눌려 살아왔다. 여운형 역시 애국자로서의 예우를 못 받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한 후 건준과 인공을 부인, 턴업, 말살하고 조선의 진정한 애국세력을 제외한 친일잔재 반민족 세력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반민족적일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 전통도 이어받지 못한 죄악덩어리 정부였다. 이런 잘못된 출발로 하여 우리는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의 참극 속에 신음하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의 주장대로 좌우합작을 하고 찬탁을 해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대로 조서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웠더라면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은 미연에 방지되었을 게 아닌가

 

우리 국민은 44년간 반민족적, 반역사적 독재정권에 시달려왔다. 지난 연말 대선에서도 역시 숙원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피눈물을 머금고 장차의 승리를 다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일수록 여운형과 같은 대민족자가 그리워진다. 역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이런때 몽양이 있었더라면...’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회고조 영탄조는 부질없는 일이고 우리 민족의 대중속에서 몽양을 뒤따르는 대인물이 반드시 창출 될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아니 이미 그 우렁찬 새싹이 악의 가시밭을 헤치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을 필자는 똑똑히 보고 있다.

 

 

<필자 약력>

1917년 함남 함주 출생

42년 일본 도쿄대학 예술부 창작과 수학

43-45년 지하항일투쟁관련혐의로 수차 피검

45-47년 동신일보, 중외신보 등 기자생활

47년 정신적 지도자였던 몽양 서거, 이후 33년간 사회활동 중지하며 칩거

80년 시작활동 결심

89년 시집 <지리산>필화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불구속기소

현재 민족문학작회의 고무, 민족예술인총연합 지도위원 등

저서: 시집 <망향> <설제><꽃섬> <삼천리 통일공화국>

전기 <몽양 여운형> 기행문 <시인의 고향> 등



<예전에 컴에 저장해두었던 글인데 글 속의 내용들로 보아 1993년 '길'지에 기고된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제목이 쓰여있지 않아서 제가 임의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