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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金午星,『指導者群像』여운형론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24

 여운형론



여운형! 이 이름은 오늘 우리 민족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의 일구수 일투족이 우리 민족 재건에 있어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자 없으리라! … 여운형씨는 경기 양평 출신으로 부유한 양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호방한 성격이 있어 항상 승마와 운동 경기를 즐겼으며, 양반으로의 예절보다 평민적인 활동을 즐겼다. 그리고 남다른 의협심과 뜨거운 동정심을 소유하고 있어 그가 집을 떠날 때는 자기집에 예속된 종과 머슴을 일체 재산을 주어 해방시킨 일이 있다. 여운형씨는 1913년 일제의 합박 밑에서는 그의 호방 불패(不覇)의 생애를 가질 수가 없어 고국을 탈출하여 만주로 나아갔다. 이 땅에서 그는 조국 광복을 획책하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 만주의 온갖 사정은 그의 장지(壯志)를 이해하고 협력할만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의 실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결의 밑에서 남경으로 가서 금릉대학을 졸업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상해에 가서 모 서양인이 경영하는 서점에서 고용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기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종소리가 높아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여운형씨는 온갖 탈을 벗어버리고 민족 해방의 전면에 나섰다. 1919년에는 김규식씨와 더부렁 파리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도록 계획하여 김규식씨를 파리에 파견하였다. 이것이 조선민족 해방을 위한 씨의 거대한 구상의 첫 시험이었다. 그 뒤 여운형씨는 곧 시베리아로 갔다. 연해주 해삼위에서 영문으로 조선독립선언문을 만들어 각국에 산포하였다. 그리고 일크스크에 가서 이동휘씨 등의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였으며 그리하여 이동휘씨 등 선배 및 혁명 동지들을 이끌고 상해로 돌아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


1921년 여운형씨는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서 출석하여 조선의 실정과 조선민족의 자주 독립에의 욕구를 토파(吐破)하였다. 이때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요, 세계 혁명의 모범자인 레닌을 회견하였는데 씨에게 있어서는 이 회견이 생애를 두고 망각할 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고 씨는 늘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씨는 모스코바에서 과세하고 1922년 봄에 상해로 돌아왔다. … 1925년부터 씨는 중국 혁명에 참가하였다. …


1929년 봄에 여운형씨는 남양군도(南洋群島)의 민족들의 요청으로 방문 여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싱가폴, 마닐라, 자바, 수마트라 등 각 중요 도시를 역방(歷訪)하면서 영어로 약소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연을 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씨의 영웅적인 활동은 일본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1929년 7월에 상해로 돌아오자, 일본 영사관 경찰은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7월 11일 상해 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다가 드디어 체포되었다. 씨는 경성을고 압송되어 1930년에 3년간의 징역을 선고받고 대전 감옥으로 이감되어 형기를 마쳤다. 옥중의 씨의 일상 생활을 독서삼매(讀書三昧)이었으며, 모범수이었다 한다.


1932년 출옥하자, 씨는 당시 중외일보의 사장으로 추대되어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편, 씨가 좋아하는 체육 방면에 큰 공로를 끼쳤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표면적인 일이요, 씨는 조금도 쉬지 않고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여 반일 사상의 고취와 조선민족 해방에 대한 이념의 선전에 분망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략을 개시한 이래 일본 정부의 씨에 대한 유혹과 위협은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근위(近衛)와 동조(東條)는 두차례나 여운형씨를 초청하여 장개석씨와의 교섭을 청하였으나, 씨는 시종일관하게 거절하였으며, 투옥과 학살로서의 위협에도 불굴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1940년 동경서 돌아오던 길에 씨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7개월간을 무서운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다.

1943년 봄부터 여운형씨는 동지를 규합하여 건국동맹을 지하공작적으로 결성해가지고 동지들을 전국 각처에 파견하여 동지 획득과 대중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러는 동안 징병 학병 등이 있어 총독 당국의 유혹과 권고와 위협이 있었으나, 그리하여 모든 지사들이 절개를 폐리(弊履)처럼 버리고 대일 협력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도 여운형씨는 끝끝내 고절(高節)을 지키고 불응하였을 뿐아니라 건국동맹을 적극 추진시켜 한편으로 건국방략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외 혁명 단체와 연락하여 내외 호응으로 일대 반일 투쟁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시켰으며, 그리하여 사건의 단서가 발각되어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등 그 화가 씨 자신에게 미칠 위험의 전야에 8월 15일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도 악랄하고, 오만하던 일본제국주의자도, 패전 민족의 신세가 됨에 참으로 못나고 비겁한 자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8월 15일 정무총감 원등(遠藤)은 어제까지 얼르고 달래고 마음대로 모욕하던 여운형씨를 초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등이 일본인의 생명 보호를 애걸함에 여운형씨는 (1) 감옥에 있는 정치범 직시 해방, (2) 청년 학생의 자치대 결성, (3) 정치적 활동의 자유, (4) 3개월간의 식량의 확보 등 4개조를 조건부로 응락하고 돌아오는 길로 동지들로 하여금 자치대를 조직 활동케 하는 한편, 감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혁명가들을 맞아 지하에서 조직되었던 건국동맹, 공산주의 제 그룹 등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탄생시켰다.

해방의 감격에 휩쓸린 인민 대중의 앞에 나타난 여운형씨는 그야말로 민족의 거상(巨像)이었다. 인민의 환호는 이 노투사를 최고의 민족 지도자로서 아낌없이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씨는 인민의 거화(炬火)로서 그의 족적에는 인민 대중이 따라, 불과 한달여에 전국의 각군 지부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건준이 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자, 씨는 겸허하게도 그 최고의 지위를 해외의 망명가에게 돌리고 자기는 부주석에 나아갔다. …


(金午星,『指導者群像』, 大成출판사,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