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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행길에 뿌린 민족주의자의 염원 / 정병준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7-16

북행길에 뿌린 민족주의자의 염원


"몽양이 비명에 숨졌을 때 내가 기억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도달한 결론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이들 미소 양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중립적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
- 윌리엄 랭던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


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 1886∼1947)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직함과 경력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차장, 일본제국의회에서 조선 독립을 일갈한 식민지의 청년 애국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특별당원, 레닌·트로츠키·손문과 한국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좌파 지식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처음 주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자 조선체육회 회장, 해방공간을 뜨겁게 달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좌우합작 운동의 선봉, 남북연대·연합을 위해 38선을 5차례나 넘나든 최초의 정치인, 그리고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희생자.

그러나 민족주의자에서부터 자유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여운형이 '태양을 꿈꾸며(몽양)' 라는 호를 붙인 게 김일성 '장군'이라는 태양을 흠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실상 그의 호는 어머니가 태양을 품는 태몽을 꾸었기에 붙여진 것이었다.


나무를 자를 수 없는 은도끼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에 대한 훼예와 포폄 역시 극단적이었다. 자주적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여운형의 질주는 대중들의 예찬과 추종을 이끌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악의 비난과 질시를 자아낸다. 해방 직후 여운형에게 큰절을 했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여운형을 미군정의 주구가 된 야심가라고 비난했고, 거꾸로 극우세력들은 여운형이 조선공산당의 허수아비라고 주장했다. 좌익세력의 지도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우익세력과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미군정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가 여운형을 만났을 때 던진 첫 마디는 "일본놈에게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지?"였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참가시키려고 여러 차례 회유와 협박, 뒷조사를 병행하고 공작정치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미군정은 일본에 장교를 파견해 전 조선총독부 고관들로부터 여운형의 친일과 자금수수에 관한 존재하지도 않은 증거를 수집하려 혈안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는 여운형을 미군정 자문기구에 끌어들이기 위해 권력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미군정의 주구'가 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고 회유하기까지 했다. 미군정은 때론 여운형을 합리적이고 대중의 인기를 몰고 다니는 지도자라고 했다가, 때론 좌익 괴뢰극을 연출하는 사기꾼이자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소군정도 한때 여운형을 미소공위로 수립될 임시정부의 수상후보로 내정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미군정의 장기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또한 여운형과 5차례 이상 만났던 김일성 역시 민족통일전선 결성에서 여운형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그가 미군정의 품으로 날아갈지 모른다고 조바심을 내곤 했다.

도대체 여운형은 어떤 인물인가? 미군정은 해방정국의 한국 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별명을 붙였는데, 정치적으로 심약하고 육체적으로 병약했던 김규식은 그의 영문 이름을 빗대 '병약한 김규식(Kim Kyu Sickly)'으로 안두희의 말마따나 통제할 수 없는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김구는 '흉악한 호랑이(Black Tiger)'로, 여운형은 '은도끼(Silvwe Ax)'로 불렀다. 겉으론 번드르하고 윤기가 나지만 은도끼로 나무를 자를 수 없듯이, 여운형도 언뜻 보기엔 유용하게 써먹을 만한데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당시 좌익내부관계, 좌우익 관계, 미군정과 맺고 있었던 복잡한 관계,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까지 끌어넣으면 여운형은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인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여운형이 해방 공간에서 점하고 있던 독특하고도 중요한 정치적 위치를 반증하는 것이다.

해방후 민족통일이 논의되거나 시도되는 자리에는 늘 여운형이 있었다. 그런데 여운형은 언제나 풀 수 없는 암호와도 같았다. 때로는 원칙주의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또 어떤 때는 혁명가로 나타났다가 어떤 대는 좌익의 혀와 우익의 위장을 가진 인물인 듯도 했다. 여운형은 원칙없는 대중주의자, 팔방미인형 정치가, 정치적 곡예와 줄타기를 하는 기회주의자, 좌익과 우익·미군정과 소군정 양자의 의혹의 눈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등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운형에게는 유일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독립이었다. 그에게 익(翼)의 좌우와 친미·친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미국과 소련을 한반도에 찾아온 '손님'이라 불렀고, 손님은 대접해 되돌려 보내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은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해방정국은 한국인과 여운형 모두에게 희망과 절망의 최상급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운형이 주목받는 시점은 해방 후 최대의 민족적 과제였던 독립정부 수립을 둘러싼 대립과 논란이 벌어지는 와중이었다.


한국민의 열망을 담은 자주적 건국운동,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민의 열망을 담은 자주적 건국운동,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위원장으로 나섰다. 건국동맹과 건준은 항일투쟁과 건국준비를 향한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일제 패망을 예견한 여운형이 194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항일투쟁과 건국준비의 두가지 과제를 담당할 조직체 건설에 부심하다 조선민족해방연맹(1943. 8)을 조직하고, 1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조선건국동맹(1944. 8)을 결성한 것이었다. 항일투쟁과 건국준비에 분망했던 건국동맹은 좌우를 불문한 애국세력의 항일통일전선으로, 해방후 건준이 결성(1945. 8. 16)되는데 토대가 되었다. 해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불현 듯 다가왔지만, 이처럼 오랜 시일 항일독립을 준비해온 이들에겐 예견된 감격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건준은 하루 아침에 급조되거나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은 친일단체가 아니라, 엄혹한 전시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최소한 2년이상의 준비작업과 조직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해방의 첫 기쁨을 실감하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정치·경제·사상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단초를 연 건준은, 1945년 8월말 전국 145개 도·시·군에 지부를 둘 정도로 폭발적 성장을 보였다. 구래의 억압적 통치와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던 한국인들에게 건준은 조국해방과 인간해방을 향한 최초의 도약대였다. 이후 건준은 미군의 진주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그 내부에는 해방과 독립, 인간적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는 한국민들이 열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운형은 한반도를 해방시킨 미소가 구체적인 한국정부 수립방안을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상의 방법은, 한국인들이 남북·좌우를 불문하고 통일·단결하여 자주적으로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준·인공은 그 첫 번째 시도였지만 실패로 귀결되었다. '혁명의 시대에 구질서를 대변'하는 세력과 친일세력들이 임정 봉대를 명목으로 건준에 반대했고, 미군정도 한국인들의 자치권이나 행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건준, 인공의 실패이후 여운형은 온건 좌파 정당인 조선인민당,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의 당수로 정당통일을 통한 정부 수립에 나섰다.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연결할 수 있다면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에게 쏟아진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는 좌우합작 운동에서였다. 제 1차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1946. 5) 뒤 전개된 좌우합작 운동에 대한 평가도 양극적이다. 일제시대 신간회 이래의 좌우연합노선이며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지는 민족통일 노선이란 평가가 있는가 하면 미군정의 공작정치의 산물이라고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좌우합작의 출발점고 귀결점이 달랐고, 좌우익을 반반씩 연합하는 좌우합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1차 미소공위가 휴회된 뒤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합작 운동의 핵심은,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는 세력과의 연대였다. 이는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 가장 현실적인 정부수립방안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운형은 남한 내에서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는 우익세력과의 합작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추구한 좌우합작 운동의 지향점이었다. 여운형과 합작한 김규식 등 온건 우파는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반탁을 주장하며 미소공위 재개에 동의했다. 이 양자가 좌우합작 운동의 주체였다. 물론 이들의 정치적 성향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양자가 손바닥을 마주치듯 일치한 점은, 임시정부 수립이 시급하다는 점고 임시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외세가 아닌 한국인이 가져야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출발 당시 좌우합작 운동의 목표이자 지향점이었다.

반면 미군정은 처음부터 좌우합작 운동을 정치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군정의 목표는 온건파들의 이름을 빌려 미군정으 자문기관인 과도 입법기구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온건 좌파인 여운형을 극좌파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좌익 분열과 세력약화를 꾀하고, 분노의 표적이 된 미군정의 대중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온건 좌우파로 수립된 자문기구는 미소공위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혹은 단정 수립의 매개체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군정은 이처럼 처음부터 노골적인 공작의도를 갖고 개입 시기와 기회만을 노렸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극좌파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시도했고, 박헌영은 좌우합작 운동이 미군정에게 놀아나는 공작의 산물이라며 격렬히 방해했다. 결국 여운형과 박헌영의 대립과 갈등이 정점에 이르자 미군정이 개입함으로써 좌우합작 운동은 최초의 목표지점과 상반되는 과도 입법의원 설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좌우합작 운동에서 손을 떼었지만, 좌우·남북으로부터 쏟아진 온갖 비난과 모함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 구상이 처음부터 남북합작과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남한 내에서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는 좌·우익세력이 연합한 후 북한과 연대한다면, 어떠한 외세의 간섭하에서도 자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남한 내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연결함으로써 통일·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여운형의 구상은, 남한 내에서의 좌우합작 운동과 평양방문으로 이어졌다.


다섯차례의 북행길


미군정은 이미 여운형과 북한의 접촉을 알고 있었지만, 여운형이 암살당한 직후 그의 손가방과 계동 자택을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주고받은 서한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표면적으론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던 하지는 1947년 8월말 대통령 특사로 남한을 방문한 웨드마이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운형은 암살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 그는 흰 백합이 아니라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그를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서 감쪽같이 배반했다."

여운형의 방북을 둘러싼 논란은 그의 사상적 지향을 둘러싼 논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그의 방북이 온건 좌우합작 운동의 지지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여운형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또한 여운형이 남한에서 벌인 좌우합작이 다양한 조명과 평가를 받은 데 비해, 남북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감춰지는 게 미덕인 양 여겨져왔다. 즉 남북관계, 남북연합은 몽양이라는 빛을 가리는 먹구름 정도로만 인식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좌우합작만을 가지고 해방 후 여운형이 걸어간 길을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여운형의 노선은 크게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이란 두 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정치적 좌표는 좌우·남북을 떠난 민족통일 완성과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의 정치적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진가도 이 속에서 발휘되었다.

여운형을 정적으로 여겼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뒤,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또한 무자비했던 한국전쟁의 물신성이 남겨놓은 폐해, 곧 양 극단의 이데올로기만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속에서, 좌익 3당합당의 주역이자 좌익 통일전선인 민전의 의장으로 북한과 접촉했던 여운형은 당연히 공산주의자여야만 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그의 자제들과 동지·추종자들은 월북했고, 남한에 잔류한 상당수의 추종세력들은 그후 좌익이나 혁신계로 몰려 감옥살이를 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여운형의 좌익적 성향을 분명히 보여주는 북한과의 접촉은 , 폄하되거나 눈감아버려야 할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로만 말해야하며, 과거는 미래를 열어가는 빛이 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속에서 여운형이 북과 맺은 관계는 정당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과연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방북했고, 북한과 맺은 관계는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하는 것일까? 조심스러운 결론은 결코 그렇지는 않다는 쪽이다.

방북은 여운형이 자신이 떳떳하게 여겼던 일이었고, 당시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활동이었다. 여운형이 추구한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수레는,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바퀴와 남북연합이라는 또 다른 바퀴를 연결해야만 제 모습이 드러난다.

적어도 1948년 남북연석회의 전까지는 여운형을 제외하고 저명한 남한 정치가가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관계설정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북한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형성에 노력한 사람은 오직 여운형뿐이었다. 이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와 여운형의 방북을 비교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연석회의는 이미 한반도에서 국토분단과 분단정권 수립이 목전에 도달한 시기에 시도된 마지막 민족통일 시도였다. 반면 여운형이 방북한 1946년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정치적 관심이 집중된 때로, 대부분의 남한 정치인들은 정권장악을 위한 주도권 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여운형은 민족통일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남한 내부의 좌우합작, 북한과의 남북연대를 내세우며 이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1946년에만 모두 5차례 방북했다. 또한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의 지도자와 최소한 10여 차례 이상 편지로 왕래했다.


다섯차례의 방북 과정에서 여운형이 김일성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입장과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며, 또한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나아갈 길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과 김일성은 서로의 만남에 대해 각자 다르게 해석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명망있고 유력한 남한의 노정치가 여운형과의 연대를 통해 남한 정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전 한반도 차원에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려 앴을 것이다. 김일성은 1947년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해 남로당에서 쫓겨난 좌익 인사들을 집결시켰을 때 성시백 등을 파견해 이를 적극 후원했고, 2차 미소공위의 와중에서 여운형이 암살되자 크게 애석해했다. 훗날 여연구 등 몽양의 자녀를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너의 아버지는 조국통일을 하겠다고 환갑의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투쟁하였는데 그만 아깝게도 너무 일찍 갔다. 너의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 조국통일을 하자면 이론가보다 여운형같은 정치가, 선동가가 필요하다. 너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편 여운형은 미·소라는 외세로부터는 자주적 입장과 태도를 지키려 했고, 민족 내부에서는 통일·단결을 이뤄내려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적진인 일본의 제국의회까지 달려가 싸웠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과 무슨 일이든 못하겠느냐는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그에게 사상·이데올로기적 성향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다섯차례의 방북은 여운형의 선구자적 면모와 정치적 용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일이었다. 당시 38선을 넘나들다 미·소의 발포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허다한 상황에서 여운형이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38선을 넘나든 것은, 그의 안중에 미·소가 그어놓은 38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리적으로 그어진 38선은 있지만, 우리 민족 내부에선 누구도 그러한 경계선을 그은 적도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다는 것이 여운형의 생각이었다. "내 집에서 윗방에 가든 아랫방에 가든 누가 무슨 상관인가?"하는 태도였다. 오랫동안 여운형을 가까이선 모셨던 한 인사는 방북하던 여운형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겁쟁이들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민족통일을 대로를 위해서라면 정치적으로 먹고 먹히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된다.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민족적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운형을 흠모해온 팔순의 통일 시인 이기형의 기억도 비슷하다.
방북에 즈음에서였습니다. 몽양의 측근들은 "저쪽에서 먼저 찾아오면 몰라도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하고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몽양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 오직 최선을 다해볼 따름이지." 이런 대답을 하시곤 북에 다녀오셨습니다.

여운형의 방북은 북쪽과의 정치적 연대·연합을 통해, 통일을 이루고 완전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방북은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운형은 남한의 주요 정당인 조선인민당 위원장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으로, 남한 진보진영의 대표 자격으로 북한과 접촉했으며, 북측 역시 그를 남한의 지식인·중간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의 당수이자 남한 진보세력의 대표로 대접했다. 이는 몽양의 방북이 남한 정치인과 북한 정치인의 만남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뛰어넘어, 조직적인 남북연대를 실현한다는 현실적 가능성 위에서 진행된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한편 여운형이 평양에서 논의한 주제들은 주로 남한 정국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들이자 동시에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직결된 문제들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모든 힘을 모으는 일, 즉 민족통일전선 구축문제였다. 이를 위해 여운형은 남에서 좌우합작의 완성과 좌익내부의 통일단결, 이를 바탕한 남북연대·연합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그 와중에 암살당했다. 이런 측면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말대로 진보적 민주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이 북에서 접촉한 사람들 역시 남북연합·연대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민족통일' '통일정부수립'은 정치세력들간의 '좌우·남북연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김일성 등 공산당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남한의 대표적 정치인인 김두봉·최창익·한빈 같은 조선신민당 관계자를 비롯해 우익 정당인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천도교청우당의 관계자 등과도 광범위하게 접촉했다. 또한 북한의 좌우익뿐만 아니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관계자들과 당시 북한 주둔 소련군 인사들과도 접촉했다. 이런 접촉을 통해 여운형은 당시의 정치정세와 미소의 구체적인 속셈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는 곧바로 민족통일을 위한 구체적 밑거름이 되었다.


열두 번째로 엄습한 테러를 비켜 가지 못하고

"가령 위의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 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그 반대극으로 가려 하고 있소. '좌익 내지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이다.
1941년 1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세계는 네 가지 기본적인 인간 자유를 구축해야 한다고 선포했소.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오. 친애하는 김 선생, 선생에게 하는 말이오만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1947년 7월 18일 여운형이 김용중에게 쓴 편지 중에서-


암살 바로 직전 30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김용중에게 쓴 편지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이렇게 예견했다. 훗날 중립화 통일운동의 선봉이 된 김용중이 우려한 대로 그는 해방 후 열두 번째로 엄습한 테러를 비껴가지 못했다. 여운형이 혜화동 파출소에서 불과 50보도 채 떨어지지 않은 백주대로에서 살해됨으로써, 그가 추구했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노선과 이상도 한국 현대사에서 비감한 최후를 맞이했다.

해방 직후부터 테러의 표적이 된 여운형은 최소 12차례에 걸쳐 온갖 테러를 당했다. 해방부터 암살된 1947년 7월까지 두 달에 한번 꼴로 테러를 당했으니, 테러에 관한 한 역사상 최다 희생자로 기록될 만했다. 전화나 편지협박 등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은 테러까지 합하면 여운형은 테러의 바다에 떠 있었던 셈이다.
여운형이 당한 테러는 단순한 정치적 위협이나 공갈 수준이 아니라 그를 살해하려는 의도로 가득 찬 것이었다. 몽둥이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부터 시작해, 괴한들에게 온몸을 난타당하기도 하고, 온몸을 묶인 채 자살서명에 강제로 서명한 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가 살던 계동 자택의 사랑방에선 폭탄이 터지기도 했다.
이때 경찰은 범인을 잡고도 오히려 여운형에게 인신모욕을 가한 후 범인을 무죄훈방했다. 암살 얼마 전에는 암살당한 장소와 동일한 곳에서 권총으로 저격을 당했고, 암살 당일에는 역시 미소공위 수석대표에게 왜 자신이 테러와  암살의 표적이 되느냐고 항의한 후 몸을 피하다 변을 당했다. 당시 경찰은 더 이상 여운형의 신변을 보호할 수 없다며 정계은퇴를 강요했었다. 또한 그가 암살되자마자 구속된 이들은 그의 경호원과 친구들이었고, 제일 먼저 수색당한 곳도 계동 자택이었다.

범인들은 애초부터 경찰과 한통속이었고, 사건의 진상은 철저하게 조작되었다. 분단정부 수립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던 단정세력과 우익 테러단체가 암살을 공모했고, 정신적으로 일제에 충성했던 친일 파시스트들이 암살의 하수인이 되었다. 경찰은 암살을 격려·고무했고, 암살자들의 뒷배를 봐주었다. 마지막으로 미군정은 침묵과 방관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



통일은 좌와 우, 남과 북 중 어느 하나의 선택이 아니다


미군정청에 드나들었고 친미파, 북한과 접촉한다고 친북 공산주의자, 우익과 합작을 시도했다고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었던 여운형은 이제 말이 없다. 분단 반세기를 경과한 오늘날 남북 모두가 기억하는 정치가는 여운형, 김구 정도뿐일 것이다. 이처럼 남북 모두가 인정하는 여운형이지만, 그 초점은 차이가 있다. 남한에서의 강조점이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좌우합작 운동이라고 한다면 북한에서의 강조점은 통일운동이다. 그리고 남북은 각자 강조하는 한 측면만이 여운형의 생애을 관통하는 일관된 노선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와 가족들이 살던 계동 옛집은 오래 전 주인을 잃고, 이젠 반쯤 헐리고 토막난 채 음식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몸을 누인 우이동 묘소는 퇴락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딸 여연구의 서울 방문에 맞춰 안기부가 보수해 주었다. 통일조국을 갈망한 그는 지금 철제관 속에서 통일의 날을 그리고 있다. 남북 모두를 조국으로 생각했고, 외세의 간섭 없는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꿈꾸었던 여운형은 현세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통일은 좌와 우, 남과 북 중 어느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함께 화해·단결하는 것이며, 그 주인은 한국인들이라고.

- 정병준의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