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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巨星의 光輝'(거성의 광휘) / 이기형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7-23


'巨星의 光輝


系로는 임진왜란 후 최초로 일본 수호사로 간 呂祐吉의 11代孫
宗祖 雲浦 呂聖齊는 李朝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母系 어머니 李氏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속칭 鰲成大監 白沙 이항복의  11대 손녀
조부 呂圭信은 대대 소론파 후예로 한학과 數理에 밝았고 청렴 강직한 성품 한때 背淸운동을 벌였다.
문중에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을 벌인 사람도 많았다.
父 呂鼎鉉은 천성이 화급 결백 엄격했다.
母 李氏는 통이 큰 여장부 대범 활달 가사처리에 뛰어났다.
族叔 呂準은 독립운동가요 혁명투사로 만주에서 활약했다.

咸陽 呂氏家 (運亨)아기는 1886년 음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월리 묘꼴(苗谷)에서 태어났다.
아기의 용모는 빼어나고 비범해 할아버지는 은근히 '왕재'라 감탄했다.
이름은 運亨, 호는 夢陽이라 지어 주었다. 며느리 태몽에 해를 안았대서였다.
몽양의 천성은 총명 쾌활 호방 대담했다. 공정하고 동정심이 많고 의리에 밝았다.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빈농, 노비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물심 양면 그들을 동정했다.
14세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 공부
15세때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워 개화의 꿈에 가슴이 부풀었다.
서양문물을 알기 위해 기독교에 입교
오랜 봉건의 잠에서 깨어 떨쳐 나갔다.
홍화학교를 거쳐 관립 우체학교에 전학했으나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해 수학 중단
향리에 光東學校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치며 배일사상을 일깨워줬다.
나라에서 일본한테 2천만원 빚을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양평에서 금연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
금연강연으로 구국활동의 첫발을 내디뎌
불을 토하는 우국열변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이때부터 평생 담배를 끊었다.
23세때 자진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家奴解放을 선언
봉건악습 타파에 앞장섰다.



일합방 직전
강릉에 草堂義塾을 세워
기우는 나라를 구하고자 심혈을 쏟았건만
일본경찰에 쫒겨났다.
1914년 가을 구국의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길
개성 객사에서 也自 이만규와 한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먼저 이만규가
桃園三傑 義不失於風鹿之際
竹林七賢 趣相深於山水之間
(도원의 삼걸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의를 잃지 않았고
죽림의 칠현은 취미가 산수 사이에서 서로 깊더라.}
이라고 지어 부르니
몽양은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뛰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더라.)
라고 화답했다.

국 남경 金陵大學 영문과를 마치고
상해 協和書局에 근무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우뚝 썼다.
한편, 홍인학교를 세우고 거류민 단장직도 맡았다.
1918년 가을
제 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윌슨대통령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와서 민족자결원칙을 설명할 때
단독으로
조선 독립을 호소 약소민족해방의 언질을 받았다.
1918년 11월 현대식 정당의 효시인 신한청년단을 결성
3.1만세운동의 역사적 태동을 올렸거니
파리세계평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 한편
몽양 자신은 1918년 겨울
북중국, 만주, 해삼위 일대를 돌며
독립투사들과 연락 큰 호응을 얻었다.
귀로, 장성에서 본국의 감격적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드디어 때가 왔다 雀躍
1919년 4월 10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청년기백을 토하며 중추역할
초대 외무의원, 9대 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임정 보수파들의 감투싸움에 실증 실망 끝에
중국해방 없이 조선해방 없다'라는 노선 명제에 따라
중국 혁명투쟁에 가담
조선남아의 위력을 중국대륙에 떨쳤다.

양은 1919년 11월
일본정부 초청을 받아
동경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역사적 명연설을 해
만장의 일보 朝野를 경탄 숙연케 했다.
당년 34세의 조선청년, 독립투사 여운형은
그의 뛰어난
풍채
용모
천재성
학식
인격
기지
웅변으로
단독, 다만 혼자서
일제 우두머리들을 제압했다
일본제국주의 종주국 총본산에서
식민지 청년 여운형은
전무후무한 일대 '항쟁의 예술'을 연출했다.
척식국 장관 고하가 만주경영을 맡으라고 제의하자
몽야은 '조선 독립이 내 직업이다'라고
어마어마한 매수 제의를 일언지하에 일축했다.
드디어,
일본 지도층 몇몇은
'여운형 만세!'를 불렀고
'아시아 최고의 신사!'라 극찬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1920년초에 열린 일본국회는
여운형논쟁으로 한달 이상 저돌적 공방을 벌였다.


192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서
주석단에 선출 (김규식과 함께)
레닌을 두 번 만나
조선독립을 상의했다.
레닌은 말했다.
"조선은 농업국인 만큼 현단계에서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몽양의 활약이 주효, 소련으로부터 임정에 대한 2백만원 원조금을 얻어냈다.

몽양은 중국의 국부 손문을 존경
여러 차례 만났다.
중국혁명에 수고가 많았다는 의미로
선생님, 머리가 많이 희였습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자
"사람은 나이가 들면 머리가 희어지지만 혁명은 나이가 들수록 붉어지지요."
라고 대답해
젊은 몽양을 감동시켰다.
몽양은 중국 곳곳에서 새시대 연설을 토해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양은 동방대학 영문학 교수를 거쳐 복단대학 영문학 및 체육학교수로 재직 중
1927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장개석으로부터
영자신문 발간교섭을 받았다.
1928년 여름 몽양은
복단대학 축구단을 이끌고 남양 원정길에 올라
싱가포르에서 아세아인으로는 최초로
미영제국주의를 맹렬히 비난해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1929년 7월 8일
상해 요동경기장에서 축구 관람둥
일경에 피송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사상검사 이 허랑이 원적과 주소를 묻자
몽양은
'원적은 상해, 주소는 현저동 101번지'(서대문 형무소: 필자)라는
유명한 대답을 후세에 남겼다.
伊藤憲郞의 후일담을 들어보자
"여운형은 진실한 학구적 인물이다. 묻는 말의 의미를 먼저 해석하여 질문하는
요지가 어는 점에 있다는 것을 양해한 연후가 아니면 답을 하지 않았다.
세계적 정세를 잘 이해하고 미래의 조선이 장차 어떻게 진전될 것이다 라는 것까지를
예견하여 모든 답변이 정치적 두뇌가 있고 답변마다 철저하여 진실로 조선의 모든
운동가중에 거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공산주의운동에 가담은 했으나 공산주의 로맨틱
시대에 가담한 것이므로 다른 공산주의자처럼 철두철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전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
典獄 蓑田은 몽양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앙했다.
출소하자 총독부 경무국장 池田淸은
'충청도에 있는 4백석 국유지와 백석 개간지를 주겠다'고 말하자
'나는 배일자다. 받으면 매수된 놈'이라고
몽양은 단호히 거절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몽양은 요시찰1호 인물로
매서운 감시를 받으면서도
신문을 독립운동 무기로 활용했다.
이 무렵
宇垣 총독의 사위 矢也는
'만일 내가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여운형과 결혼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몽양의 인간적 남성적 매력은 대단했다.
1941년 야만적 창씨개명 때 조선 명사 중 여운형 한 사람만이 불응 거부했다.
1942년 12월
몽양은 동경서 귀국 중 下關에서 체포되어
독립운동 교사죄로 갇혔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경기도 양주군 봉안에 은거
농촌 청년을 지도하는 한편
일본군 소위 박승환을 통해 연안 독립동맹과 연락
장차 무장투쟁을 구상했다
1944년 8월 10일
몽양은 조동호, 현우현, 김진우, 황운, 이석구 등과 密議
조선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결성
조선독립의 내일에 대비했다.


1945년 8월 15일, 드리어
일본 천황 榕仁의 떨리는 항복 목소리로
제 2차세계대전은 끝나
식민지 억압 36년만에
조선독립의 활화산은 터졌다.
몽양은, 15일 저녁
안재홍,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정백, 최근우 등과 협의
역사적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
삼천만 민족의 열망
건국준비에 우렁찬 첫발을 내디뎠다.
16일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감격적 명연설을 해
삼천리 강산을 들끓게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광적으로 호응
단시일 내에 146개의 각급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건국질서는 착착 잡혀갔다.
하건만-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그새 찍소리 한 마디 못하던
친일도배와 친일잔재경찰은
미군을 등에 업고
건준을 공산당으로 몰아
야수적 탄압을 가했다.
찬탁 반탁의 회오리 대혼란 속에서
십여 차례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몽양은 오직 건국일념에 불타
조선인민당, 민족통일전선, 근로인민당 등을 창설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에 헌신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타리에서
嗚乎라!
조선민족의 대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은
반역의 백색테러의 흉탄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큰별은 떨어졌다.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조선' '조선'이었다.


結句
몽양의 목을 짓눌렀던 군정장관 아놀드조차도, 퇴역 귀향 후는
"여운형은 인격과 능력을 아울러 갖춘 한국 유일의 걸출한 정치가였다."
고 회고했다.
주한미국공사 랭던은
"여운형은 동양의 위인이요. 인도의 간디와 비견할 인물이다"라고 극찬했다.
동경제대  吉野幸一 교수는 몽양을 가리켜
"능력과 인품을 갖춘 찾아보기 드문 아세아 최고의 신사"라고 평했다.


양 여운형은
당당한 체격
빼어난 용모
번듯한 남성미
정연한 학시과 이론
재치있는 말솜씨 뛰어난 웅변
인간미 철철 넘쳐흐르는 인간 중의 인간
그를 따라 구름 같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다기보다
실은 인간 여운형을 사랑했다.
몽양은 청년, 학생, 어린이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최고로 사랑한 것은
바로 '조선 건국'이었다.
몽양 여운형이야말로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독립
끝내는 인류 해방을 통한
대선각자요
열렬한 애국투사요
선구적 혁명가요
희대의 친화력의 정치가요
천성적 민주주의자요
우리 민족의 대지도자요
현대의 새로운 위인이다.
몽양이 간 지 50년!
조국 분단 52년!
거인의 통일 독립 정치노선은
오늘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 고동치며
남북 7천만 대통일의 앞길을
태양이 지구를 비추듯
환히 똑똑히 밝혀주고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순국 50주년을 맞아 '巨星의 光輝'라는제목으로
시인이자 '몽양 여운형전기'를 쓴 이기형 선생님이 시처럼 몽양의 생애를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