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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본 여운형의 삶 / 강원룡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10-16



내가 본 여운형의 삶


                                           


강원룡(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 

내가 몽양 여운형을 서울에 내려와 처음 찾게 된 것은 좌우합작이 공식적으로 추진되기 직전이었으니까, 아마 1946년 5월경이었던 것 같다. 1936년 6월 용정에서 그를 처음 보았는데, 그때 그는 축구대회 참관차 온 것이었다. 한눈에 숭모심을 갖게 되었으나 서울에 오니 그가 좌익의 거물로 활동하고 있어서 그를 찾아보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공격하는 강연을 하고 다닌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에서 그에게 너무 매혹되었기 때문에 욕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를 완전히 버리기 어려운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에라, 어떻든 한번 직접 만나 결판을 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게 그때 그는 심각한 테러의 위험을 피해 거처를 자주 옮기고 있었으므로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그가 계동의 거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무작정 그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간에서 ‘몽양 선생 계시냐’고 물었더니 아직 안 들어오셨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안에 있는데도 면담을 거절하는 줄 알고 ‘그러면 좋다, 대문에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 고 하고 끈질기게 버텼다. ‘늘어지게 기다리다 보면 들어오게 하겠지’하는 속셈으로 아무 반응이 없는 집 안 쪽을 탐색하며 정말 늘어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자 길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동그란 맥고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빙빙 돌리면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자세히 쳐다보니 그 사람이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 앞에는 경호원이 따르고 있는데 아마 그가 박재황이었을 것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불쑥 그에게 달려가 인사를 했다. 경호원이 긴장하며 제지하는 가운데 나는 그에게 내 소개를 했다.

“저는 기독교청년연합회의 강원룡이라는 사람인데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 그래? 좋아, 좋아. 얘기하자구.”

선선하게 응낙하는 몽양의 뒤를 따라 나는 그의 거처로 들어가 얘기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꼬박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 다섯 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만큼 나는 몽양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몽양 역시 나를 좋아했다. 그때 내가 처음 몽양과 나누었던 얘기 중에 기억나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실 저는 서울에 올 때 선생님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뵙고 나서 정말 애국자이면서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게다가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셨다는 말을 듣고 더 좋아했었는데, 어떻게 지금 선생님은 유물론자가 되어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고 계십니까?”

“좋아, 좋아. 젊은 사람이 그렇게 대담하게 얘기해야지. 내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하지만 나도 강군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그처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동교회 안에서‘여운형이를 죽여라’하고 사형선고를 내리는 재판을 할 수가 있지?”

그러면서 몽양은 계속해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지금도 뚜렷이 기억되는 것은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의 요지다. 그는 마지막으로 결론 비슷하게 ‘내가 지금까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도 해 왔고 지금도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만 정말 이제는 더 이상 이땅에서 정치를 못하겠다. 솔직히 어디로 빠져나가고 싶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는 심정을 토로했던 것 이다.

 

그는 나에게 이승만, 김구 등의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들은 이승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얘기는 내게도 참 충격적이었다.

해방되던 해‘조선체육동지회’를 이끌던 몽양은 이박사가 환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이승만 박사가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 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박사를 개회식에 초청했다고 한다.

그때 이박사는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다. 식이 시작되어 각 도의 청년들이 열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려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박사를 보니까 청년들이 보지도 않고 윤치영과 귓속말로 속닥거리며 정치 얘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 며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몽양은 그 모습을 보고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섭섭했다’ 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말했다. 그리곤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정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정치를 하다 보면 서로 이념이나 사상이 다를 수 있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해방된 조국의 가을 하늘 아래서 우리 청년들이 늠름하게 걸어들어오는 그 순간만은 함께 흐뭇해할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야. 나는 정치를 무엇보다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

 

몽양은 김구 선생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구 선생이 중경에서 돌아온다고 할 때 사실 나는 그 분을 만날 생각이 없었어. 왜 그런 줄 아나?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나올 때 마지막 국무회의가 결정을 내린 것 중의 하나가 나에 대한 사형선고야. 그리고 떠나면서 청사 대문 앞에다 ‘여운형이는 사형을 시킨다’고 써 붙였어. 그런 사람들을 내가 무슨 이유로 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 개인 감정은 차치하고, 해외에서 오랜 세월 독립운동하느라 애쓴 노고에 경의를 표하려고 그들에게 인사를 갔었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거기서 얼마나 모욕과 냉대를 당했나? 나를 그냥 기다리게 하고 들어오라는 말을 안하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정치도 사람들이 하는 건데…. 솔직히 말하면 이제 나는 정말 정치에서 은퇴를 하고, 강군 같은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하면 그저 뒤에서 후원해 주는 영감노릇이나 했으면 좋겠어.”

 

“해방된 다음 해 5월 몽양은 회갑을 맞이했다. 회갑잔치는 내(김용기)가 일제 말기에 그를 모시고 있었던 장소이기도 한 경기도 봉안촌에서 준비를 했다. 이 잔치에는 각 당의 주요정객들이 많이 참석해 축사를 했고 미군정에서도 아놀드 장군이 참석할 만큼 성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때 박헌영은 축사를 한다고 나와서는 그것을 빌미로 미국에 대한 공격을 마구 헤대는 것이었다. 자연히 잔치 분위기는 경색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본 나는 ‘공산주의자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하튼 몽양으로부터 그런저런 얘기를 모두 들은 나는 젊은 나이에 주제넘은 짓이었지만 그에게 결론적으로 이런 얘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선생님 같은 분은 정치를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정치를 하기에 적합한 세상은 옛날 신농씨, 복희씨 시대처럼 통치자가 호위병도 없이 농민들이 멍석 깔고 막걸리 마시는 데 가서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인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아수라장에서는 역시 정치를 안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운형과 얘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침길의 내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몽양과 같은 민족지도자와 서로 애정을 가지고 장시간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했다는 감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익인 그의 정치 노선이 주는 거리감이 서로 얽혀 나는 무척 착잡하였다. 그 한편에는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 ‘내가 왜 저런 사람을 그렇게 욕하고 다녔는가’ 하는 후회의 심정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몽양과의 첫대면 이후 나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그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1946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정릉 부근의 어떤 숲속에서 모인 좌우합작위원회에 나오신 일이 있었고, 47년 봄이었다고 기억되는데 한남동에서 각계각층의 재야 지도자들과 김호 씨 등 재미교포 대표도 참석한 모임에 오셨다. 몽양 선생님께 말씀을 청하니 일어서서 김규식 박사가 지은 영문시 한 편을 영어로 읇고는 앉으셨다. 토론이 얼마쯤 진행된 뒤 내가 일어서서 “여러 어른들과 대선배들께서 모인 자리에서 제가 버릇없이 드리는 말씀을 너그럽게 양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말을 계속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더니, 몽양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내곁으로 오시어 “자네 참 좋은 말을 했는데 서두에 그 무슨 버릇없고 선배들 앞에서란 말을 젊은이 답지 않게 늘어놓았는가.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당당하게 소신을 말하게” 라고 하시었다.

 

그 후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전이라고 기억되는데, 몽양 선생님은 장충동 교회안 사택에 살고 있던 우리집으로 불쑥 찾아오셨다가 떠나시는데 자동차 뒷자리 오른쪽에 앉으셨다. 나는“왜 가운데 앉으시지 구석에 앉으십니까?” 하니까 “자네 잘 모르는 말이야. 내게는 늘 나를 저격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밖에서 총을 쏘는 경우 이 자리게 제일 안전해” 하시고는 떠나셨는데, 그때가 내가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때다.

 

그 후 7월 19일 오후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당하실 때 범인은 자동차 위에서 내리 쏘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몽양 선생은 그런 경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피격당한 뉴스를 듣고 너무 충격이 커서 두문불출하다가 빈소에 조의를 표하고 나오면서 나는 그렇게 잘 생기고 멋있는 선생님도 흙속에 들어가면 썪을까 생각하기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분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과거나 사상에 대해 거의 아는 바 없었다. 그 후 특히 그분을 모시고 지냈던 김용기, 여운혁 두 친구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에 관한 기록을 더듬어 보며 어렴풋이나마 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보통사람과는 비교도 안되는 개방적이고 폭넓은 사고를 가진 분이었기에 사람에 따라 그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기도 했다. 1979년 3월 내가 관계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소위 용공서클 혐의삭너으로 중앙정보부에 구금되어 조사 받던 때 많은 시간 몽양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나는 사실 그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고 전제한 다음, ‘그는 첫째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주의자’ 라고 진술한 일이 있다. 이런 에매한 진술 때문에 오히려 오랜 시간 시달렸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게는 그 때 그 곳에서 한 진술이 정확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써온 대로 나는 몽양을 마치 관상쟁이처럼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한 충분한 지식도 없이 주로 나의 인상으로 그를 알아온 정도였다. 그러나 그 후 제한된 그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나의 피상적인 인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79년에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진술한 대로 그가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를 논하기 전에 그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유주의자였다.

 

1908년 그는 그의 부친의 대상을 치르자 상투를 잘라버리고 역대로 모셔오던 신주를 땅속에 묻어버렸고 노비들 앞에서 노비문서를 다 불태워버렸다. 그는 14세의 배재학당 시절에 주일날 운동을 했기에 보수적 기독교의 성수주일을 위반하게 되었고, 결국 학교를 자진하여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907년 상동교회 전낙기 목사를 만나 교회의 신도로 입적학호, 그 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목사를 알게 되어 민주적인 서양문화에 접하게 되면서 기도교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몽양은 클라크 목사의 신뢰를 받아 그의 일을 도우면서 일하다가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점점 꺼져가는 등불 같던 조국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13년 중국으로 가서 서간도 신흥무관 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다시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조국을 위한 보다 폭넓은 활동을 하기 위해 1914년 금릉대학 영문과로 옮겨 1917년 7월까지 수학을 계속한다. 그는 이듬해인 1918년 평북 선천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이승훈 선생, 이상재 선생님과 친교를 가지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연락을 취하려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총무간사가 되었다.

몽양 선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구국운동과 개혁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 후의 파란만장한 도전과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사상과 활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가 숨질 때까지 그의 삶 속의 변함없는 물줄기는 보수적 현상유지나 전통에 얽매인 채 열린 미래를 외면하거나 어떤 도그마에 사로잡혀 폭넓은 관계를 외면하는 타입의 지도자가 아니라 항상 개방적인 자유주의자로 사신 분으로 나는 이해한다. 가장 구체적인 실례는 1946년에 얼굴도 모르는 29세의 청년인 나, 그것도 그이는 내가 정동교회에서 있은 여운형 재판에도 관계된 사람으로 오해까지 하던 나를 서스름 없이 만나 밤새워 이야기한 그를 어떤 특정주의자로 볼수는 없기에, 내가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것도 교조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사상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널리 이해되어 왔는데, 그가 해방 후만이 아니라 서거한 지 50년이 지난 오늘도 그에 대한 이런 오해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이런 각도에서 보는 것을 단순하게 편견 혹은 오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공산주의 정부가 세워진 이래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에 김규식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고,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한 것도 사실이며, 극좌적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요 1917~22년 사이에만도 역사 이래 가진 잔인한 피의 숙청정책을 쓴 레닌과도 두 번이나 만났다. 그뿐 아니라 중국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에도 관계하면서 모택동이 주로 하는 공산당에서도 당원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8.15 해방 후만 해도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6년 2월 15일 결성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북쪽의 김일성이나 평양 주둔 소련군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이런 큰 줄기를 보아도 해방 후 냉전체제로 미국과 소련의 극한 대립속에 처한, 특히 한국의 반소, 반공은 민족의 생사를 건 현실에서 그가 민족의 지도자로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 것은 어느 면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사회주의는 그때 상황에서 민족을 우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근본적인 그의 사상과 함께 해방 후에도 민족의 분단을 막아보자는, 굳이 타이틀을 붙인다면 민족주의자로서 행동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그의 국제관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제1차 대전 후 파리에서 모인 회의에 신한국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송했던 사건으로 생각된다. 이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크게 믿고 추진한 행동이었으나 그 기대가 좌절되고 난 후에 우리 민족을 일제의 clacir에서 구출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세력으로 새로 태어난 소련 그리고 중국의 대립된 두 세력 양편 모두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안다. 그는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고 통일된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판단의 기준을 두었던 것 같다.

 

그의 말과 글을 통해 보면 볼세비즘 계급투쟁 프로레타리아 독재 등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그것을 변형 수정 적용하여 보려는 의도였으나, 그 생각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기대가 차츰 멀어지면서 민주적 사회주의였다는 그의 동생 여운홍씨의 증언이 옳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가 법정에서 한 증언의 요지는 맑스주의는 그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에 따라 변형되지 않으면 안되고 조선은 농업국가로서 계급운동도 시기상조이며 무엇보다 먼저 민족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상룡 교수에 의하면 여운형 선생의 사상은, 한국의 경우 최우선 순위의 과제는 민족독립이며, 그것을 위하여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전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계급투쟁 사관이나 프로레타리아 독재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자주 천명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주의와 상용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변용을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최교수는, 여운형 자신의 사상상황으로부터 오는 요인으로 전통유교의 도덕관과 기독교의 인간애 즉 평등사상을 들었다.(최상룡,<여운형의 사상과 행동>계간사상, 1922년 가을 호)

 

나는 최교수의 이런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의 혼란속에서 알고 보면 그의 행동은 색깔이 분명하지 않아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 같게도 보였다. 해방 후에 취한 행동만 보아도 해방되던 때 일본 총독부의 부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던 때나 남쪽에 주둔한 미군과 북쪽에 주둔한 미군과 북쪽에 주둔한 소련군과의 관계나, 특히 1946년 2얼 14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소위 우익진영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주의원에 참가하기로 하여 명패까지 놓여 있었다는데 문앞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말과 방에 들어왔다가 이승만 박사의 언동에 화가 나서 퇴장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에 가담하기로 약속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좌익인사들로 구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이 되었다. 그 후에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소극적이나마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참가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런 그의 행동을 나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보잘 것 없는 우익 기독청년단체에 속한 나를 대한 태도에서는 그는 굉장히 사고반경이 넓은 분으로서, 다만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는 그렇게 흑색논리로 딱 마주서서 극한 대립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이런 입장은 양극으로 대립된 상황 속에서 우익진영에서뿐 아니라 남로당 계열에서는 거센 비판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는 우리 역사 속에 너무 일찍 태어난 것 같다. 5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 그런 사고를 가진 몽양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역시 교조주의적인 좌우세력들의 용납이 어렵겠지만, 폭넓은 지지세력과 얼어붙은 오늘의 역사를 녹일 수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외국세력이고 초청한 일도 없는 미소 양대국의 이해관계로 국토가 강제로 양단되고 그 안에서 극좌 극우의 경직된 대립으로 6.25 라는 참으로 끔찍스러운 비극을 경험했다. 몽양 같은 분과 김구같은 위대한 애국자는 피살당하고 김규식 안재홍 등의 온건 우익세력은 납북 당하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든 남쪽은 자유 아닌 군사독재, 문민독재가 되었고, 자유대신에 빵,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내건 북쪽은 빵 대신에 국제적인 거지와 평등 대신에 우상숭배국가가 된 비참한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8.15 후 몽양 여운형이나 김규식 같은 분들이 우리 역사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렇듯 기가 막히는 비극의 길을 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된 민주국가로서 세계의 중심국가 반열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 같은 북한과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같이 된 남한이 막다른 골목에서 대립구도를 화해구조로 바꾸는 한편 21세기를 향한 우리 민족의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민족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일에 선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때를 만나지 못해 비운에 간 몽양 선생님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공정하게 평가하고 그분처럼 민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후배들이 역사의 한가운데에 나타날 시기라고 생각된다.

 

강원룡 저 <빈들에서 > 제 1권, 185-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