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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세기 아시아의 거목, 몽양 여운형 / 홍기빈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10-16


       21세기 아시아의 거목, 몽양 여운형

- 몽양의 진보이념으로 아시아연대와 남북 좌우합작의 새로운 지평열어야



몽양 선생은 1947년 좌우합작 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의 흉탄으로 비명에 숨지셨고 유동적이던 한반도의 정세는 선생의 사후, 남북과 좌우 분단의 방향으로 길을 재촉하게 된다.

아마도 20세기 한국 근대사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들 중에 몽양만큼 그 정치적 이념의 색채를 놓고 많은 논란에 쌓였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박헌영 계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미국의 주구, 전형적 기회주의자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미국과 우익으로부터는 음흉하게 위장하고 있는 빨갱이, 김일성과 한통속이라는 저주를, 김구 등의 우익 민족주의자들로부터는 일제의 주구라는 욕까지 들어먹었다. 그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던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서도 한쪽에서는 민족주의 조직, 다른 쪽에서는 인민공화국의 전신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관여했던 세 개의 정당인 인민당, 사회로동당, 근로인민당은 보는 이에 따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 손문의 중국 국민당과 비슷한 사회혁명 정당,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전선 등 그 평가가 심히 엇갈려 왔다.
 
몽양 여운형의 열린 노선
 
여운형의 이념적 성격만큼이나 그와 관계가 닿아 있는 인맥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50년대 이후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혁신계의 가장 중요한 인맥을 이루었던 집단은 근민당계 즉 몽양이 결성했던 근로인민당의 인사들이었고, 이들 중에는 아예 인민혁명당 등의 급진 좌파와 연결이 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반면, 박정희 쿠데타 세력과 연결된 박창암 소장 같은 우익쪽 인사가 몽양이 일제시대부터 군대 쪽에 심어 놓은 인맥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창암 소장의 증언에 의하면, 아예 당시 만주군 장교였던 박정희조차 건국동맹의 포섭 대상이었다고 한다.
냉전과 분단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모든 인물들은 '남이냐 북이냐' 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그 성격을 규정당했다. 그런데 해방 정국에서 대중적 인지도나 지지도에서 이승만, 김구를 압도하던 정치지도자였던 몽양의 정치노선이 특정한 것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몽양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처럼 여러 가지 모순된 사상과 아이디어가 단절적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징후적으로 독해해야, 알까 말까 한 정신착란의 지식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신문의 짧은 논설과 정당의 성명서 이외에는 아무런 저작도 남기지 않았으며, 그 대신 중대한 정치적 정세와 고비마다 누구보다도 뚜렷한 행동의 지침을 내걸고 행동을 주도했던 탁월한 정치 행동가였다. 여운형의 노선엔 그 어떤 텍스트적 모호함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몽양의 노선은 어째서 그 험악한 양분법이 지배했던 한반도에서 이념적으로 열린 텍스트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일까. 몽양 노선의 잠재적 미래성을 캐내는 작업의 첫 발자국을 이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몽양의 자유주의
 
먼저 자유주의자로서의 몽양을 들여다보자. 몽양은 당시의 많은 조선 청년들이 그러했듯 청소년기에 미국 선교사 클라크(한국명 곽안련)를 통해 영어와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된다. 이렇게 전해진 이상주의적 자유주의가 한국 자유주의의 원천 중 중요한 일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연 만세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 김규식을 베르사이유로 파견하는 등 그의 활동 노선을 보면 과연 당시의 한국 청년들에게 전해졌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가 그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남겼는가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면모는 여운형이 좌파 혁명가로 변해간 이후에도 유지되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그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정치체제는 무산계급 독재도 유산계급 독재도 배제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여운형은 같은 시기 노동당 주도하에 변모하고 있었던 영국의 민주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사례로 들고 있다. 또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치관이야말로 여운형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과 별도의 조직적 기반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몽양의 정당 운동은 항상 근로인민 일반을 아우르는 범국민적 대중 정당을 지향하였기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전위 정당인 공산당과 조직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을 신중함(prudence)에 기반한 상호 관용(tolerance)이라 한다면, 한국 자유주의 정치전통의 근원은 집권을 위해 테러, 학살, 분단을 서슴지 않은 이승만이나 한민당 집단이 아닌 여운형, 김규식 등의 좌우합작 운동에서 찾아져야 마땅하다.

좌파 정치인, 민족주의자로서 몽양

몽양은 조선 좌파운동의 거물이기도 하다.
그는 1920년 성재 이동휘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의 창당 멤버로 참여하여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 ABC」 등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소련을 방문하여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을 두루 만나면서 소련 타스통신의 연락원 활동을 비롯,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과 조선의 좌익운동에 연결되어 있었다. 죽산 조봉암도 그의 도움으로 소련 및 코민테른과의 접촉을 갖게 된다. 1920년대에는 중국 공산당과도 긴밀한 유대를 맺고 당원 대우를 받으며 구추백, 모택동 등과 여러 차례 만났다.
그가 일제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1930년대 이후에도 이러한 좌파 운동가로서 인맥은 계속 유지되었다. 몽양은 1940년대 들어 일제 치하에서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준비하다가 연안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무정(武丁)과 접촉하게 되는데, 무정은 "몽양 선생이 하는 일이라면 절대 지지"라고 표명한다.

좌파 정치가로서 몽양의 면모가 이러한 조직적, 인맥적 측면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당면한 조선의 독립이 단순히 정부수립이나 주권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불평등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근로대중을 해방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사회혁명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항상 명시적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민주주의 세력 과 반민주주의 세력을 나누는 지표로 삼았다. 몽양이 그토록 심한 중상과 배반을 무릅쓰면서 좌파 세력의 통일을 민주주의전선 강화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양은 또한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이기도 하다. 신용하 교수는 몽양이 191811월 상해에서 주도적으로 조직했던 신한청년단으로부터 국내의 31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당시 상해 거류민 단장으로 상해 임시정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몽양은 임정이 파벌 대립으로 혼란을 거듭하게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도산 안창호와 함께 국민회의를 조직한다. 1930년대엔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취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일장기 말소 사진을 처음으로 보도한 곳은 동아일보가 아닌 조선중앙일보였다)의 주역이 되는 등 일제에 의해 폐간당할 때까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중심 역할을 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행동 노선에 이렇게 다채로운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몽양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관통하고 있는 두 개의 축을 생각해 오는 것이 그 답을 찾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내재적인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20세기의 동양과 조선이라는 시간적 축이요, 둘째는 국제정치의 지각 변동에 던져진 동양과 조선의 지정학이라는 공간적 축이다.


몽양은 1886년생으로서, 1888년에 태어난 벽초 홍명희와 비슷한 연배이다. 이승만이나 이상재 같은 이들보다는 아랫 세대지만, 조봉암이나 박헌영 등보다는 윗세대이다. 몽양 세대의 조선 운동가 및 지식인들은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적 축: 전통적 동양 지식인으로서의 몽양






몽양의 윗세대는 전통적 사대부 집안에서 관료 교육을 받았다는 지적 배경과 함께 대한제국이라는 국가 기구에 엘리트로 참여할만한 시간적 여유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서양 사정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몽양의 윗세대는 국가, 민족,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 전통적인 조선의 지식인에 더욱 가까운 사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들이 이해한 근대화란 기실 전통적인 부국강병의 개념을 조금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몽양 세대는 약관을 전후하여 이미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를 거쳐 국가조직에의 참여기회를 박탈당한 채 성장했다. 그들은 출발부터 '재야'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지식인들은 그 이전 조선 지식인들의 지독한 국가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진정 근대의 정신은 무엇인가"란 문제와 백지 상태에서 대결을 시작한 세대라 할 것이다.

한편, 몽양 세대의 지식인들은 철저한 한학(漢學)의 지적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그 아랫세대와도 대비된다. 이미 조봉암이나 박헌영의 세대로 내려가면 젊었을 때부터 일본이나 러시아 등의 대학에서 서양 사조를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사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물론 장택상처럼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의 갑부들 외에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벽초도 몽양도 각종 서양 사조를 풍부하게 흡수한 사람들이다. 벽초는 이미 1910년대에 앙리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저작들을 원어로 읽었다. 몽양이 1920년대까지 행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상해라는 곳은 일본제국의 수도인 동경보다 훨씬 더 세계화된 환경이었다. 그래서 몽양은 출중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몽양은 남경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다양한 사람과 지식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몽양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소련, 유럽을 두루 돌며 견문을 넓혔던, 당시로서도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적 상상력의 뿌리가 전통적인 동양의 지적 배경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몽양은 정치가로서 손문, 장개석, 왕정위, 일본의 고노에 공작, 다나카 육군 대신은 물론 요시노 사꾸조(吉野作造)같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숱한 동양의 명사들과 두루 대담하고 담판하면서 그의 이력과 명성을 쌓아왔다. 그 와중에서 그가 상대를 감복시키고 침묵시킨 언어들을 보게 되면 그 상상력의 원천이 기본적으로 한일 삼국이 공유해온 동양의 지적 전통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에서 근대적 사유를 끌어내다 사례 하나만 들어보자.

191931 만세운동 직후 일본의 어느 각료와 마주한 자리에서 몽양은 "조선의 만세운동은 개 한마리가 짖으니 모두 따라 짖는 격"이라는 폭언을 듣게 된다. 이에 몽양은 곧바로 "새벽이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닭은 일제히 울게 마련이다"라고 응수, 상대방을 일거에 압도해 버린다.


이 짧은 대화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논거는 "조선인들은 독립이나 근대를 이해 못하는 몽매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민족자결주의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부화뇌동한 것이 바로 만세운동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에 대해 몽양은 '새벽의 닭'이라는 낯익은 유교 경전의 은유를 이용해 두 가지의 논점을 압축해 내밀고 있다.

첫째, 당대의 민족 자각은 세계 정신의 시대적 사명이라는 점. 둘째, 독립 운동은 조선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시대 정신을 각각 깨달음으로써 비롯된다는 점이다.

서양 정치사상의 언어로 풀자면 '주권 국가의 개념', '계몽의 이상' 등 온갖 장광설을 늘어놓아야 했을 주제였다. 그런데 몽양은 이를 '새벽의 닭'으로 압축해 강력한 정치 언설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몽양의 정신 세계가 서양 사상을 어설프게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동양적 전통에서 근대적 사유를 자발적으로 발전시키는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철학자 존 듀이는 일본과 중국을 여행한 후 "진정한 근대화는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을 한 바 있다. 일본은 외형적 서구화에 있어서 중국이 따를 바가 아니지만, 그가 보기에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적 제도와 사상이 그저 덧씌워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들 몸에 맞는, 체화되고 내화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몇천 년 살아온 삶과 생각의 방식에서 솔직하게 시작하여 무수히 곤두박질 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시간적 지속성이 살아 있는 내재적 근대화라고 할 것이다. 몽양도 그렇게 자신의 정신으로 외래 사상과 사조를 육화시키면서 스스로 길을 찾아나간 그 세대 동양인의 한 사람이다.

공간적 축: 아시아 연대와 남북 좌우 합작

그를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라는 서양식 이념의 틀로 일괄적으로 분류해 버리는 것은 1881년생인 중국의 노신(魯迅)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냐, 비판적 리얼리즘이냐로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도단이기 쉽다.


몽양은 한반도 나아가 아시아의 미래를 전체 세계의 정치역학 흐름 속에서 설계해 내는 안목에서 실로 괄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당시 유학까지 했다는 조선 식자들의 국제적 시야란 기껏 동북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독립의 희망을 포기하고 급격히 친일로 돌아서서 내선일체를 활로로 잡기 시작한 것에서 증명된다. 또 이승만 같이 보다 나은 시야를 갖춘 해외파들도 철저하게 민족을 희생시키고 강대국에 붙어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데에만 그 능력을 이용했다.


그러나 몽양은 전체 세계정세라는 거시적인 틀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내기에 진력했다

20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의 변동은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간은 일본과 서양 열강의 세력균형 체제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제국주의 지배를 강제하던 1931년까지. 둘째는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 구상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1945년까지. 셋째는 그 이후의 공산주의-자본주의 대립의 냉전 구도이다.


첫번째 기간에 몽양은 아시아 연대론을 배경으로 조선독립 운동론을 구상했다. 또한 이념과 냉전이라는 세번째 기간의 조건에서는 좌우 남북합작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1910년대 이후 동양 지식인들은 아시아 전체가 서양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둔 운명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념은 일본의 미야자키 도텐(宮岐滔天)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팽배해 있었다. 이는 1920년대에 아시아 연대를 통해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만이 조선 독립을 쟁취하는 길이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국민혁명에 전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런 생각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같은 혁명가에게서도 발견되는 바이다.


실제 1920년대 전반 중국 혁명운동의 총수였던 손문 자신도 중국 혁명을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되어 이후 동남아시아와 조선, 일본으로 뻗어나갈 세계 혁명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었다. 몽양이 1926년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베트남의 호치민과 나란히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영어로 행했던 연설을 보게 되면 그가 이러한 손문의 아시아 혁명과 연대의 관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 제국주의 역량에 맞선 아시아 민중들의 공동 연대라는 몽양의 이상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며, 실로 뜻밖의 일이지만 일본 극우주의 사상의 괴수로서 대아시아주의자였던 오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를 매료시키고 그의 중국 및 조선관을 크게 바꾸어놓기도 한다.


아시아연대와 남북 좌우합작의 길

해방 정국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가 냉전 구도로 재편되는 시기였다. 냉전 구도 지정학의 특징은 미국, 일본과 소련, 중국이라는 해양 및 대륙 세력의 지정학적 대립의 논리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일국 내부의 정치체제 논리가 하나로 뒤섞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가장 첨예한 대립점에 서 있는 한반도의 운명이 남북 분단과 동시에 좌우 대립으로 인해 안팎으로 민족 살상의 참극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몽양은 우사 김규식 등의 중도 우파와 손을 잡고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자주 정부 수립을 통해 이런 비극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많이 간과되어 온 점은 이 좌우합작 운동은 동시에 남북합작 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선생은 막역한 친구였던 조만식과의 교감 속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후 5차례에 걸친 월북과 서신을 통해 김일성, 김두봉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몽양의 남북 좌우합작 운동은 그가 자유주의자였는가, 사회주의자였는가와 같은 일면적인 이념의 틀로서는 제대로 음미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민족주의자로서의 몽양이라는 틀로도 그 의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한반도에 다가오는 냉전이라는 상황이 이후 얼마나 가공할 만한 비극의 시련을 가져올 것인가를 미리 예견한 거시적 시야를 갖춘 선각자로서 몽양의 모습을 염두에 두어야만 그 의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몽양에 대한 어떤 동시대인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참으로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몽양이 피살당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한반도 안팎의 냉전 상황에서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다면 최소한 민족 상잔의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몽양과 21세기 진보이념



그래서 몽양은 20세기 한국사의 한복판을 관통한 인물이면서도 서구 사회에서 생겨난 이념적 틀에 이리저리 재단당하는 일 없이 21세기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넘어왔다. 오늘의 우리들은 과연 그 내재적 근대화를 완수하였는가.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구조가 또 한번 바뀌고 있는 지금 한반도의 우리들은 아시아 연대와 남북 좌우합작이라는 두 가지를 함께 끌어안아야 할 상황에 있지 않은가. 이런 문제들을 풀어갈 21세기의 진보 이념이라면 그래서 몽양이 남긴 거대한 정치적 자산의 보따리를 한 번 철저하게 파헤쳐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홍기빈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대자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