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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한청년당과 몽양 여운형 - 3ㆍ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 김삼웅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12-07



신한청년당과 몽양 여운형 - 3
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몽양이 독립운동과 남북통일운동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
큰 줄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몽양은 누구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민감하여 1918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주목하고, 19191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시도하였다. 강화회의 대표들이 극동의 변방에 자리한 한국의 존재에 대해 알 리가 없을뿐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회의장에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동지들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당의 이름으로 대표를 파견하려는 계획이었다.
여운형은 19188월에 터키 청년당의 강령에 준한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동하여 그 총무가 되었으며, 이 당을 통하여 국권회복투쟁만이 아니라 풍속, 문화, 도덕을 새롭게 한다는 진취적 목적을 가지고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년, 학생을 규합하는 데에 힘썼다. 이때의 여운형의 사상은, 망각된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신기원을 이룩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독립사상이었다. 신한청년당은 프랑스조계 백이부로(白爾部路)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조동호김철선우혁한진교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고, 부서는 총무만을 두기로 하되 국내의 손병희를 총재로 추대하기로 했으나,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몽양은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동양의 문화에 적지 않게 공헌을 했던 나라이지만 한일합방 후는 민족의 정치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상의 압박을 받아.”로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윌슨 미국대통령의 특사 챨스 클레인이 상해에 왔을 때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그로부터 고무적인 격려를 받자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2통을 작성, 미국 언론인에게 주었다. 만일 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1통은 윌슨 대통령에게, 1통은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서 몽양은 19191월에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초청하여 그를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장덕수를 국내로 보내어 이상재손병희 등과 접촉케하고 자신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동녕문창범박은식조완구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당시 국내외 각처의 지사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서,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대표파견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운형이 파송한 김규식만이 회의 중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규식의 파송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운형이 장래의 갈림길이 되었다. 각처의 단체들이 하고자 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함으로 해서 전도사 여운형은 무명씨(無名氏)의 신분에서 일약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은 몽양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31운동의 촉발재 구실을 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신한청년당의 역할이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도쿄의 유학생들은 영국인이 일본에서 발행하는저팬 에드버타이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신한청년당의 결성, 대표파견 기사를 알게 되었다. 또 국내에 파송된 장덕수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 국제정세와 신한청년당 대표의 파리 파송 등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김규식의 파송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에 도화선이 되었다. 31운동이 국내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그리고 불교계의 지도자들의 주동으로 조직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지도자들이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서 그 엄청난 사업을 추진했던가 하는 질문을 추궁해 보면 김규식이 상해를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로 귀착이 된다. 이 말은 그가 떠난 후에 국내의 지도층에게 전달이 되었고 31운동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여사가 이정식 교수에게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거대한 31독립항쟁 발발의 지하수맥’(地下水脈)에는 몽양의 숨은 역할이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찾게 된다.


- 김삼웅(현대사연구가, 전독립기념관장)의 "몽양 여운형과 한국근현대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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