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Youngman Mongyang
Revolutionaries of freedom and independence
National leaders ahead of the times

몽양 자료실 > 논문

논문

제목 몽양 친일론의 허구
작성자 신동진
작성일자 2020-04-17
 
(다음 논문은 2010년 7월 19일 서대문 독립관 강당에서 개최된 <몽양추모63주기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신동진 감독의 글입니다. 사이트에 D.FOX님의 요청이 있어 전재합니다.---사무처)
 


 

 

몽양 친일론의 허구

 

 

신동진(다큐멘터리 감독)

 

 

  1) 몽양에 대한 폄훼론

  몽양 여운형은 살아생전에도 우파로부터는 ‘빨갱이’나 ‘친소파’라는 공격을 받았고,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나 ‘친미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렇게 좌우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은 첫째 분단을 막기 위해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구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폭넓은 사상과 행동이 냉전시대의 좁은 좌우 프리즘으로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레닌, 트로츠키, 보로딘, 모택동, 손문, 장개석, 왕조명 등과 교유했고 해방후에는 하지 사령관 등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세계적 지도자들을 만났던 여운형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혈농어수(血濃於水)다. 피(민족)는 물(이념)보다 진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미국이나 소련, 중국, 그 어떤 나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고노에(近衛文麿) 일본수상, 우가키(宇垣一成) 총독, 고이소(小磯國昭) 총독 등 수많은 일본 고관들과 만났다. 해방전의 시점에서 이미 세계화(Globalized)되어 있었던 그의 폭넓은 사상과 행보는 좁은 시야를 지닌 사람들의 눈에는 의혹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마침내 그는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권을 이양 받았다. 이 또한 그의 정치적 라이벌들에게는 의혹의 대상이었다. 훗날 한민당에서는 총독부의 2중 교섭설을 내놓았다. 즉 당시 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기 전 송진우(宋鎭禹)에게 먼저 제안했으나, 송진우 측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치안권 위촉이 여운형에게 돌아갔다는 설이다. 이에 대해 엔도는 1957년 한민당의 그 같은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에서는 내가 처음에 송진우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으나 송씨가 거부했기 때문에 여씨를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나, 그것은 잘못으로 내가 송씨 및 안재홍·장덕수씨를 만난 것은 종전 전 총력연맹에 협력을 요청한 일이 있지만 그들이 깨끗이 거부하여 왔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신념을 이해하여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후 송씨와 안씨에게 교섭한 일은 없다.1)

 

  그러나 해방직후 정국의 선수를 빼앗긴 훗날의 한민당 그룹은 정치적 라이벌 여운형에 대한 각종 비난과 비평과 폄훼론을 그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해방직후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여운형 친일론의 각종 증거, 이를테면 ①전향서, ②학병권유문, ③김동인의 수필, ④G-2자료, ⑤북한 노획문서, ⑥총독부로부터의 금전수수설 등을 하나하나 검토해보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한다.

 

 


  2) 전향서

  진술서와 한시

  여운형의 친일을 주장하기 위해 일부 폄훼론자들이 제시한 증거의 하나는 1943년 2월 6일 여운형이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 가쿠이치(杉本覚一)에게 제출했다는 진술서(전향서)와 그 말미에 적혀 있었다는 자작 한시인데, 우선 진술서의 내용과 당시 여운형이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는 한시, 그리고 그 앞에 적은 전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진술서의 내용: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서 좌(左)에 맹세합니다.”

 

 ○ 진술서 말미에 적힌 한시:

대지(對支)공작은 소지(素志)이며 준비도 자신(自信)도 유(有)하야 실행기회를 득(得)코저 소회를 술(述)하오니 용서하십시오.”

砲煙彈雨又經筆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

爲國請纓捨一身 (나라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를 청하네)

千億結成共榮日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

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2)

 

  이 진술서의 내용과 한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데 대한 반론으로 정진석(鄭晋錫) 외대 명예교수가 2009년 12월 15일 도하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가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은 아니고, 사실은 60년 전 한민당 시대부터 필요할 때마다 여러 사람에 의해 “새로 발견된 것인 양” 언론에 보도되곤 했던 자료다.

 

  정진석 교수가 공개한 이 자료는 둘 다 원본이 아니다. 그런 내용이었다고 1946년 2월 17일자의 <대동신문(大東新聞)>이 보도한 기사다. 당시 <대동신문>은 이 기사를 보도하면서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 결국은 대지(對支:대중국)공작의 전쟁범?”이라는 제목하에 “최근 친일파 민족반역자 문제로 정계와 우리 사회에서 논하는데 적반하장격으로 친일파들이 친일파 제거를 논하니 우리 삼천만 민족에게 이들의 과거사를 소개하니 현명한 재단(裁斷)이 있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이종형과 <대동신문>

  여기서 우리는 정진석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대동신문>의 성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11월 창간된 <대동신문>은 해방후 이종형(李鐘滎)이 만든 신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종형은 만주에서 동만(東滿), 연길(延吉) 일대의 토공군(討共軍)사령부의 고문 겸 재판관으로서 한국의 혁명투사 250명을 체포·투옥하였는데, 이 가운데 17명이 사망 당했으며, 다시 국내에 돌아와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과 조선군참모장, 헌병사령부 특고과장 밑에서 끄나풀이 되어 해외에 망명중인 지사와 가족들을 잡아가게 했고,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한 혐의로 1949년 박흥식(朴興植)에 이어 반민법 법정에 섰던” 인물로 “반민법을 제헌의회에서 제정할 때에는 앞장서서 반민법을 파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3)

 

  여운형의 친일에 대한 정진석 교수의 자료공개 기사를 크게 다룬 <조선일보>도 <대동신문>을 만든 이종형에 대해서는 지난날 '자숙하라! 친일군상' 이라는 제목하에 “(1949년)1월 8일 해외로 도피하려던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 백화점 현관에서 체포됐다. 그를 시작으로 관동군 촉탁 출신 이종형,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崔麟), 경찰 노덕술(盧德述), 지식인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등이 속속 검거됐다. 그들의 혐의는 '일제하의 친일행위'였다’”4)고 이미 평가를 내린바 있었다.

 

   이처럼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목숨을 앗은 친일파 중의 친일파 이종형이 자신이 경영하던 <대동신문>을 통해 여운형의 친일행각을 그처럼 부각시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여운형 같은 민족지도자도 친일을 했다고 해야 자신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종형 이후에도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그 관련자로 추정되는 폄훼론자들이 지난 60여 년간 여운형의 친일론을 계속 물고 늘어져온 것과 같은 이유다.

 

  둘째는 이종형이 여운형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것은 다름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 받은 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설립했을 때 “이종형도 ‘건준버스’에 몹시 타고 싶어 했으나”, 과거의 친일행각 때문에 거부당했던 일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종형은 <대동신문>을 창간한 뒤 기회 있을 때마다 여운형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곤 했다는 것이다. 5)

 

  따라서 폄훼론자들이 근거로 제시한 <대동신문>의 자료는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되고 자의적인 신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진술서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고 <대동신문>이 보도한 여운형의 <한시>는 과연 그것이 여운형이 쓴 것인지 어쩐지 확인할 수조차 없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대동신문>이 실은 신뢰할 수 없는 기사의 일부였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여운형은 한문을 했지만 한시를 많이 썼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시는 평생에 서너 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역사를 생각하며 1943년의 감옥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하려고 마음먹었던 그가 친일행각의 흔적이 남는 그런 한시를 지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대동신문>의 사주인 이종형이 여운형을 폄훼하기 위해 그런 시를 지어 발표했을 수도 있다. 이종형은 그런 식의 공작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는 일제의 밀정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의 정진석 교수는 자신의 논리를 보강하기 위해 “<대동신문>의 공격에 대해 당시 여운형이 반론을 제기했다는 흔적은 현재까지 찾을 수 없다. <대동신문>은 우익 논조의 신문이었는데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면 여운형 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론과 역습을 시도했을 것이다. 친일혐의는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낼뿐더러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인신공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라고 첨언했는데, 이는 현시점에서 보면 그럴 듯한 논리 같지만 해방직후 첨예했던 좌우대립 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모든 사료는 시대적 정황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는 언론도 좌우대립으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했다. 그래서 좌파신문에도 우파인사들을 인신공격한 기사도 많았지만 우파 쪽에서 이를 반격한 사례는 없다. 왜냐하면 우파신문에서도 똑같이 좌파인사들을 인신공격했기 때문이다.

 

  이인 회고록

  정진석 교수가 <대동신문>에 실린 기사의 신빙성을 보강하기 위해 제시한 제2차 자료는 다음의 회고록이다.

 

“해방 후 내가 미군정 때 대법관과 대법원장서리 자리를 내놓고 검찰총장으로 앉게 된 지 1주 후에 지방법원 서기가 찾아와 신문지에 싼 형사기록을 나에게 준 일이 있다. 그 서기는 해방되던 때는 서울지방검사국 서기로 있었는데 8·15 해방 날은 일본인 직원은 전부 도망가고 한인 서기 2명만 남았었다. (중략) ○陽은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기의 전향서와 시문(詩文)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조선대중당과 아편관계의 20여 명의 기록)을 찾아 달라했으나 한 개인이 관청서류를 임의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陽이 그의 불명예스런 기록을 말살하려는 흉계인 듯해서, 복잡해서 찾지 못한다고 말해 돌려보내고 자기가 비장했던 것인데 나에게 제출한다기에, 나는 다망중이라 일별한 뒤 서기국장 윤지선(尹智善)에게 금고에 특별보관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6)

 

  이 글을 쓴 이인(李仁)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복역한 일도 있는 변호사 출신으로 미군정 때 검찰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때 검사국 서기로부터 8.15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詩文)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을 찾아달라 했으나 서기가 주지 않고 있다가 이인이 검찰총장에 발령되자 이 서류를 건네받았다는 것이며, 자료를 훑어본 뒤 금고에 보관해두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인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해방 당일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마치 정권을 인수한 것 같은 위상이어서 몹시 바빴다. 게다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간접으로 감시되었다. 당일 그는 계동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기에도 눈코 뜰 새가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감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오전에 조선헌병사령부, 오후에 서대문형무소를 각각 방문했었다. 그런 여운형이 언제 서울지검에 혼자 찾아갔었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거기다 사람들이 우르르 쫓아다녀 도저히 혼자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또 혼자 갔다 하더라도 사실상 대권을 잡은 것 같은 위치에 섰던 여운형이 일개 서기에게 자신의 서류를 몰래 꺼내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이는 다만 이인이 서기로부터 그렇게 들었다는 얘기를 적은 것일 뿐 해방 당일 이인이 직접 목격했던 일도 아니다.

 

  그런데 윗글에서 이인은 여운형이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 및 형사기록을 찾은 것은 “불명예스런 기록을 말살하려는 흉계”라고 했는데, 이는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매우 파당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이다. 해방 후에도 그랬지만 해방 전에는 감옥에 갇혔던 정치범이 풀려날 때는 당국에서 일괄적으로 <전향서>를 쓰게 했다. 쓰지 않으면 내보내주지를 않았다.

 

  이인은 감옥에 갔다 왔으니 자기도 나올 때는 그런 <전향서>를 썼을 것인데, 왜 남이 쓴 것만 “불명예스러운 기록”으로 몬단 말인가? 더구나 여운형이 1942년 2월 수감되었던 것은 무슨 불명예스러운 범죄로 그리 되었던 것이 아니다. “일본이 패망한다”는 말을 한 것이 헌병에 포착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갇혔던 것이다. 만일 그가 <전향서>를 찾아서 없애려 했다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행동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어째서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말살하려는’ ‘흉계’까지 된단 말인가?

 

  따라서 이인의 표현은 상당히 파당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 같은 것이 있었다면 있었다. 해방 당시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들면서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그룹(뒤에 한민당의 중심세력)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고 본인이 직접 송진우와 만나기도 했으나, 송진우의 반대로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이인은 송진우의 건준참여 비토를 비난하면서 백관수(白寬洙)·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건준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安在鴻)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들은 당시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몸져누웠던 사이에 건준 중앙위원회를 우파 중심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형평을 중시한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인은 여운형에 대한 유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글에는 <전향서> 등을 금고에 넣어두었다고 하지만 이 문서는 한 번도 세간에 공개된 일이 없다. 만일 진짜로 존재했었다면 여운형의 최대 정적이던 한민당 쪽에서 공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난 60년간 여운형을 폄훼하기 위해 내놓는 자료는 매번 <대동신문>일 뿐이었다.

 

  학병권유문이 실리게 된 배경

  당초 <전향서>의 문제가 생기된 것은 그가 감옥에 갔기 때문이고, 그가 감옥에 가게 된 것은 1941년경 여운형이 평양신학교 동창생으로 왕십리교회에 시무하던 이재형(李載馨)·오건영(吳建泳)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지난번 동경에 갔을 때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는 모습을 보니 일본 비행기가 도무지 따라잡질 못해.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걸세”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건영은 이 이야기를 자기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들은 다시 자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이야기를 적었다. 바로 이 편지 내용이 적발되면서 헌병대는 유언비어의 출처로 지목된 여운형을 구속하게 된 것이었다.7) 지금 보면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정도는 아무런 죄가 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는 치안유지법·육해군 형법·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었다가 1943년 7월 5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다.

 

  그는 가출옥한 뒤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도자와(戶沢) 검사가 전향문을 강요하여 적당히 써 보냈더니 무성의하다며 3번이나 퇴짜를 놓았다. 결국 그를 신문했던 스기모토 검사가 자기 손으로 전향문을 써 보낸 뒤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여운형은 이를 3번이나 거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윤화(白允和) 검사가 와서 그 전향문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다시 구속하여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알렸다. 그러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던 가족들이 자기 대신 전향문에 도장 찍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말았다.

 

  이것이 해방후 정적들로 하여금 그가 친일했다는 비난의 불씨가 되었고, 지금도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전향문을 작성한 것은 스기모토 검사일지 모르나 최종적으로 날인한 주체는 여운형이니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말은 맞지만 도장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당시의 판결문 내용을 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고는)민족적 감정이 강해 내심으로는 계속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총독부 당국에 협력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한합병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병합후 일본의 조선통치 정책은 구미류의 식민지 정책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일본 자본가가 조선 내에 계속 침입하여 경제적 착취를 마음대로 하고 있고, 또 행정 부문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 관공리 사이에 차별대우를 하며, 기타 산업·교육·문화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일본인의 조선인 압박은 더욱 강화되어 왔고, 특히 미나미(南次郎) 총독의 정책인 창씨개명 및 국어(일본어)사용 장려는 강요한 것으로써 더욱 조선인을 압박하여 괴로운 처지에 빠지게 한 것으로 망단(妄斷)하고 있었다.”8)

 

  위 판결문에서 그가 친일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겉으로는 당국에 협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기실은 총독부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3) 학병권유문

  경성일보

  폄훼론자들이 여운형의 친일론을 주장하기 위해 자주 내놓는 물증은 1943년의 <경성일보>에 실렸었다는 이른바 ‘학병지원 권유문’이다. 이 학병권유문은 여운형이 감옥에 갔다 풀려나와 경성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서 조동호(趙東祜)·이상도(李相燾)·이상백(李相佰)·최흥국(崔興國)·구소현(具小鉉)·전사옥(全駟玉)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에 착수하고 있을 때였다.

 

  예의 정진석 교수는 이해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쓴 글은 2건이었다고 밝혔다. 그 하나는 ‘학도여, 전열로(學徒よ戰列へ)’라는 제목으로 ‘이젠 보여라 황민반도, 여운형씨 마침내 일어서다(今ぞ示せ皇民半島, 呂運亨氏遂に起つ)’라는 부제와 함께 크게 실린 1943년 11월 9일자의 ‘학병권유문1’이고, 다른 하나는 ‘반도동포에게 호소한다(半島同胞に愬ふ)’는 제목을 단 1943년 11월 11일자의 ‘학병권유문2’인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조선의 젊은 학도가 오늘도 미영(米英) 격멸의 횃불을 들고일어나 전열(戰列)에로 노도의 출격을 계속하고 있다....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해서 극히 엄숙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조선의 가야 할 길을 내선(內鮮)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눈물겨운 혈서, 단호한 출진 결의의 웅비, 이것에 호응하여 우리 아들을 격려하는 부형과 은사…. 온통 조선의 산하는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영광에 용솟음치고, 2500만 동포의 가슴은 놀랄 만큼 진동하고 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대동아전쟁은 소극적으로는 구미 침략에 대한 대동아의 방위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있다. 상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영국이며 그것에 협력하는 세력이다. 이제 세계 신질서의 역사를 창건하는 성업을 하고 있는 추축국(樞軸國)의 유대를 강화하며,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서 착착 건설되고 있다. 제국의 존망을 걸고 피로써 싸우는 이 일전(一戰)을 어떤 어려움과 쓰라림이 있더라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완승할 것을 확신한다. 이 승리는 16억의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는 것보다는 유구한 3000년의 역사와 그 영예를 가진 아시아 전체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이 일대 결전은 동아시아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그래서 청년은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9)

 

  정진석 교수가 제시한 이 자료는 <경성일보> 기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사가 실렸었다고 주장한 1946년 2월 10일자 <대동신문>의 기사다. 그 신문에 <경성일보> 기사였다는 동판사진과 그에 따른 기사가 실려 있다. <대동신문>의 동판사진 옆에는 “일제 때 여운형의 충성...,.친일의 활증(活證)을 보라”는 한글 기사도 실려 있다.

 

  우리는 앞에서 폄훼론자들이 근거로 제시한 <대동신문>의 정파적 성격과 그 신문을 만든 이종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따라서 <대동신문>의 자료는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되고 자의적인 면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도학도출진보

  여운형이 썼다는 상기 학병권유문은 그 뒤 “반도 2천 5백만 동포에게 호소한다(半島二千五百萬同胞に愬ふ)’는 제목으로 <경성일보>가 1944년에 발간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라는 단행본에 다시 한 번 조선총독부 총독과 학무국장의 글과 함께 실린다. 폄훼론자들은 단행본에 실린 글에 ‘여운형씨 수기(手記)’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니 여운형이 직접 쓴 글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행본에 인쇄된 여운형의 친필서명은 다른데 있었던 것을 얼마든지 동판사진으로 떠서 인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친필서명 의 인쇄가 있다 하여 그것이 곧 여운형의 진짜 글이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진짜임을 위장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친필서명의 동판인쇄를 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을 시작하기 전에 또 하나 지적해두어야 할 점은 <반도학도출진보>가 일본어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공부한 여운형은 약간의 일본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장문의 수기를 그것도 위에 예시한 수준의 유려한 일본어로 써낼 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해방 전에도 일본 총독이나 고관과 회담을 가질 때는 반드시 조선어 통역관을 대동했었다. 따라서 장문의 수기가 여운형 자신이 직접 쓴 것이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썼다 하더라도 일단은 일본인 또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의 손을 거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 거기에 실린 학병권유문의 내용은 진짜였을까?

  여운형의 구술을 받아 <여운형투쟁사>를 집필한 이만규(李萬珪)는 1946년 그 학병권유문이 “<경성일보>의 모략이었다”10)고 기사조작의 사실을 분명히 밝혔으나, 해방후 그와 대척점에 선 자들이 <경성일보>의 조작기사가 더 신빙성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해왔던 것이다.

 

  조반상의 증언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民主衆報)>에 실린 조반상(趙半相)의 증언이다. 여운형의 학병권유문이 실렸던 1943년, <경성일보>의 사회부 기자로 있었던 조반상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조선어 통역으로 따라갔으며, 여운형의 뜻과 상관없이 그 기사가 조작됐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권장 유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 면담 6∼7분 만에 밖으로 나왔다. <경성일보> 사회부 차장이던 일본인 기자가 이 모습을 보고 여운형 집에 쫓아가 여운형의 총독회견 기사를 냈다. 그 다음날 다시 여운형을 찾아가 학병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때 나는 통역으로 동석했다. 여운형은 “학병은 지원제도이므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본인들의 의사에 달려 있고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바가 못 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 차장이 여운형의 서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여운형이 서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실무근의 기사가 나갔다.”11)

 

  여운형의 학병권유문이 어떻게 해서 <경성일보>에 실리게 되었나 하는 것을 증언한 말이다. 이런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면 여운형은 왜 이를 항의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는가 지적한 폄훼론자도 있는데, 이는 단어 한마디를 잘못 써도 감옥에 가던 당시의 삼엄한 시대상을 전혀 도외시한 의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우호적인 한 언론은 ‘여운형 수기’라는 글자가 제목 밑에 붙어 있으니까 직접 작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식으로 토를 달았지만, 이름 자체를 도용하는 마당에 일본인들이 ‘여운형의 수기’라는 말을 제목 밑에 달아놓았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여운형은 <경성일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학병권유문’을 제멋대로 실은데 대해 몹시 분개한 나머지 이 사실을 일본 육군대학 교수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일본 군부의 극우이론가로 여운형과 가까웠던 오오카와 교수는 1943년 12월 2일자 자신의 일기에 여운형 부자가 내방했던 일을 적으면서, “관헌의 조선학생 지원병의 처치(處置), 분노한 머리카락이 하늘을 찌르게 한다. 이런 일을 멈추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불평을 가진 반도의 민심을 더욱 일본으로부터 이반케 하여 불상사의 발발을 볼 것이다”12)라고 <경성일보>가 제멋대로 글을 실은 데 대해 여운형이 몹시 분노했던 일을 간접 인용하고 있다.

 

  당시 저명 독립운동가 가운데 기사에 이름을 도용당한 경우는 여운형만이 아니었다. 조만식(曺晩植)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 또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자에 ‘학도에게 고한다’는 제목의 학병지원권유문이 자신의 이름으로 실린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13)

 

  4) 김동인의 수필

  또 폄훼론자들이 여운형의 친일문제에 자주 인용해온 3번째 자료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이 쓴 문단회고록인데, 그 해당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는 방공(防空) 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었다. 몽양 려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싹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14)

 

  방공연습을 하던 어떤 날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 시기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 뒤인 1941년 12월 이후의 일인 것 같다. 그런데 1941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경성헌병대의 추적을 받고 있었고 1942년 2월 구속되었다가 1943년 7월 5일 석방되었다. 그러니 이 기간 동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석방된 그는 한동안 경성요양원에 입원해 있었고, 거기 있으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그래서 퇴원후 향리인 경기도 봉안에 거주하면서 만군(滿軍)에 소속된 박승환(朴承煥)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했다. 해방시 일본군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염윤구(廉潤龜)·이혁기(李赫基) 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켰다.

 

  그는 1944년 8월에는 당시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이었던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1944년 10월에는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결성했고, 이후는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져나가던 시기였다.

 

  또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면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蔡秉德) 중좌와 두 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李永善)을 파견했고, 5월에는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崔謹愚)를 북경에 파견했다. 그리고 8월초에는 총독부 경찰에 그 존재가 드러난 <건국동맹>의 간부 이걸소(李傑笑)·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조동호(趙東祜) 등이 검거됨에 따라 최근우·김세용(金世鎔)·이여성(李如星)·이상백(李相佰)·김기용(金騏鎔)·이만규(李萬珪)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지하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여운형이 언제 완장을 차고 총독부 경찰에 협력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김동인의 말대로 그랬다 하더라도 여운형의 친일행각이라는 것이 고작 방공훈련을 하는 현장에 완장을 차고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이 글을 쓴 김동인은 문학가로서는 평가할 만하겠지만, 중일전쟁후 변절하여 조선문인보국회 등 각종 어용단체에 들어가 황군위문을 하고 다니는 등 수많은 친일행각을 일삼고, 더불어 친일작품을 많이 생산했던 그가 여운형의 친일을 매도했다는 것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관방정보과장 아베 다쓰이치(阿部達一)를 찾아가 세월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날 정오에 일본의 항복선언을 알고 있던 아베는 김동인의 청탁을 거절했다. 이랬던 인물이 대체 누굴 친일로 매도한단 말인가?

 

  나는 그가 이 글을 집필한 시기에 주목하고 싶다. 1949년이다. 이때는 좌파와 중도파가 모두 세를 잃고 극우세력이 득세했을 때다. 따라서 당시 ‘좌익’으로 몰린 여운형을 매도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문제 삼을 수 없었던 시기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신변잡기를 여운형의 친일론 입증에 활용하려는 폄훼론자들의 존재는 또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만큼 입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거라도 활용해보자는 것이었을까?


 

  5) G-2자료

  폄훼론자들은 또 미군정의 G-2문서를 여운형의 친일론 자료로 제시한다. 예의 정진석 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9월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도 여운형을 ‘친일파’로 분명히 규정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은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아마도 약 2000만엔-twenty million)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끝나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이며 미국은 진주하지 않을 것으로 총독부는 판단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공중 집회를 개최할 권한과 사무실, 교통편과 비행기를 제공하여 선전삐라를 전국에 뿌릴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함께 조선의 모든 신문 방송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는 것이다. 정보보고서는 여운형을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well-known to the Korean people as pro-Japanese collaborator and politician)로 평가했다. 15)

 

  정진석 교수는 미군의 1945년 9월 12일자 ‘G-2 Periodic Report’에 분명히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적었으니 여운형이 친일파인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객관적인 미군자료가 그렇게 규정했으니 믿을만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료란 항상 시대적 정황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군이라 함은 미 제24군단(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을 가리킨 것인데, 미 제24군단이 인천항에 입항한 것은 1945년 9월 8일, 서울에 입성한 것은 9월 9일이었다.

 

  G-2라는 것은 General Staff-2의 약자로 서울에 진주했던 미 제24군단의 정보참모부를 가리킨 것이다. 이 G-2가 서울에 들어와 사무실을 열고 정보업무에 착수한 것은 9월 11일부터였다. G-2문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진석 교수의 논리에 따른다면 G-2는 정보업무를 시작한지 만 하루 만에 독자적인 조사를 거쳐 여운형이 ‘친일파’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G-2 Periodic Report’에 따르면 업무를 시작한 9월 11일부터 G-2가 면담했던 한국인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9월11일......조병옥·윤보선·윤치영·김영희(金永羲)·오긍선(吳兢善)

9월12일......서상일(徐相日)·설의식(薛義植)·김도연(金度演)·현동완(玄 東完)·김용무(金用茂)·장자일(張子一)·오긍선

9월13일......강낙원(姜樂遠)·박명환(朴明煥)·최동(崔棟)·오긍선

9월14일......장석영(張錫英)·노기남(盧基南)·오긍선

9월15일......송진우(宋鎭禹)·이용설(李容卨)·김태원·오긍선

9월16일.....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손영목(孫永穆)·송진우· 오긍선16)

 

  G-2가 접촉했던 이 명단에는 단 한명의 좌파도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명단에 6번이나 이름이 올라 있는 오긍선(吳兢善) 때문이었다. 그는 본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 1907년 루이빌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와 세브란스의전 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인천에서 태어나 공주 영명중학을 나온 의사 출신의 조지 Z. 윌리엄 중령은 한국말을 잘해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발탁되었는데, 오긍선은 바로 그 윌리엄 중령의 추천을 받아 G-2와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긍선은 G-2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인들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위 명단에 보이는 한민당 인사들이었다.

 

  G-2는 이들을 통해 자기들이 진주한 한국의 실정을 취재했다. 한민당의 중심세력인 이들은 해방직후 자신들을 따돌리고 건준을 세워 정국을 앞서나갔던 정치적 라이벌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았고, G-2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정진석 교수가 제시한 G-2자료는 위 명단에 등장한 인물들이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하더라”라고 기록한 것을 마치 미군G-2가 독자적으로 조사해서 내린 매우 객관적인 자료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도대체 업무 시작 하루 만에 독자적인 조사가 가능했겠는가?

 

  6) 노획문서

  폄훼론자들이 여운형 친일론의 증거로 제시하는 물증 가운데는 또 미군의 <노획문서>가 있다. 1950년 11월1일 미군이 평양에서 얻은 <노획문서> 가운데 여운형의 친일을 입증할만한 공산당 문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여운형을 친일로 보았으니 여운형이 친일파였던 것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논리다. 예의 정진석 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광복 직후 공산당도 “세상에서 여(呂)씨를 친일분자라고 하는 문제에 대하야 누구나 없이 변명할 이유가 없다”고 냉정하게 단정하였다. 이 자료는 6·25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1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조선공산당의 여러 문서 가운데 하나인데, ‘여운형씨에 관하야’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여운형이 1937년 7월(중일전쟁) 이후로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했고, 그의 태도가 명확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여섯 조목의 예를 들었다. 그 가운데는 “소·독 전쟁이 개시되고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 여씨는 공개적으로 일본 동경 대화숙(大和塾·1938년 7월에 결성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에 가 있었고, 학도병지원 권고문을 발표했다”는 항목이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로 감옥에 있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적 석방운동을 감행하여 투쟁의식이 미약한 혁명자를 타락적 경향에 빠지게 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김태준(金台俊) 등도 여운형의 주선으로 전향해 가출옥(假出獄)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특히 친일분자의 소멸을 당면적 정치투쟁 구호로 하는 우리로서 아름답지 못한 여씨의 명단을 신정부 지도인물로 제출하게 된다면, 그는 반동진영에 구실만 줄 뿐 아니라 친일분자 소멸투쟁에 불리한 영향을 급(及)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인가 한다”고 결론지었다.17)

 

  우선 정진석 교수가 자료로 제시한 <노획문서>가 어떤 것인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6.25전쟁 때 유엔군이 북상하게 되면서 워싱턴이 미극동군사령부(도쿄)를 경유하여 미8군사령부에 지시한 훈령에 따라 북한지역에서 노획한 공산당 문서를 가리킨다.

 

  미8군은 1950년 10월 16일 북한지역에서 문서수집 임무를 수행하게 될 ‘인디언헤드(Indian Head)특별임무부대(부대장 포스터 중령)’를 편성했다. 동 부대의 임무는 평양의 정보기관과 평양주재 외국기관을 점령해 군사·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평양에 들어간 인디언헤드부대는 평양의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각종 문서를 노획해서 일본의 극동군사령부로 후송했고, 이 문서가 다시 워싱턴으로 공수되었는데, 당시 인디언헤드부대가 평양에서 노획한 문서는 총 160만 쪽에 달한다.

 

  1977년 정보공개법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된 이 <노획문서>는 일반적인 책 약 5천 4백 권 정도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렇게 방대한 문서라면 그 안에 무엇은 없었겠는가? 조선공산당은 3당합당 문제가 불거진 1946년 하반기부터는 조선공산당→남로당의 수령 박헌영(朴憲永)과 여운형의 사이는 견원지간이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문서 가운데는 여운형을 비판한 문서가 얼마든지 있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정진석 교수가 공산당 문서라고 인용하면서 여운형이 ‘친일분자’였던 증거로 열거한 것은 모두 5가지다.

 

  ①여운형은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했고, ②태평양전쟁 때 일본 동경 대화숙(大和塾)에 가 있었으며, ③학도병지원 권고문을 발표했고, ④감옥에 있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적 석방운동을 감행하여 투쟁의식이 미약한 혁명자를 타락적 경향에 빠지게 했으며, ⑤여운형을 신정부의 지도인물로 삼으면 친일파 척결문제 해결에 지장을 준다는 것 등이다.

 

  이 주장에 대해 해명하자면 ①한국 내에서의 마지막 독립운동이었다고 운위되는 박헌영의 이른바 경성콤그룹이 소멸된 것은 1939년이고, 그 뒤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 숨어지냈다. 이에 반해 여운형은 그 삼엄하던 일제 말기에 <건국동맹> <농민동맹> 등 전국적인 지하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여 해방에 대비했다. 국내에서 마지막 독립운동 조직을 이끈 것은 여운형 밖에 없다. 누가 더 투쟁의식이 연약했겠는가?

 

  ②여운형이 1940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도쿄에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화숙에 기거했던 일은 없다. 그가 도쿄에 가서 거처했던 곳은 5촌조카 여경구(呂絅九)의 집이었다. 그가 자주 도쿄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정부가 여운형을 대중 화평공작에 사용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데, 여운형은 여기에 응하는 척하면서 일본 고관들을 만나 일본이 패망한다는 정보를 얻어냈고, 그 결론이 1944년의 <건국동맹>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③학병권유문은 앞에서 그 날조 경위를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④여운형이 감옥에서 고생하던 동지를 꺼내주었으면 잘한 일이지 그것이 무슨 타락이라는 것인가? 감옥에서 더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한다는 것인가? 잘 이해되지 않는 공산당식의 해괴한 논리일 뿐이다.

 

  ⑤여운형을 무어라 평하는 것은 평하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그를 친일파다 아니다 논하기 전에 국내에서 해방직전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있으면 한번 거론해보기 바란다. 좌우를 막론하고 여운형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여운형을 비판한 조선공산당은 일제 말기에 다 어디서 무얼 했었는가?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도 없는 G-2문서를 끌어들이고, 도서관 같이 방대한 <노획문서> 가운데 “여운형에 관하야”라는 공산당의 비판문 하나를 달랑 건져내어 마치 무엇이 있었던 것처럼 제시하는 일종의 속임수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해방전 진짜 친일을 했던 사람이 대부분인 한민당이 미군정에 계속 여운형의 친일문제를 거론하자, 1946년 미 국무부가 파견한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 레너드 버치 중위는 사람을 도쿄에 보내 이 문제를 조사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하지 사령관도 “그럴듯한 이야기다. 나도 여운형에 대해 무엇(약점)을 잡고 싶다”며 “여운형이 전쟁기간 중 일본의 고위층과 극비관계를 맺지 않았나” 조사해보도록 미군정 외무부 소속의 찰스 오라이오단 소령을 도쿄에 파견했다. 그 결과 여운형에 대한 모든 친일 비난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군정의 1947년 3월 7일자 기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여운형의 일본 관련설에 대해 찰스 오라이오단이 일본에서 조사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오라이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의문이 생겨났느냐면서 놀란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여운형을 조선의 훌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로빈슨.”18)

 

  더 이상 무슨 첨언이 필요하겠는가?

  여운형이 친일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가 친일을 해서 얻은 반대급부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여운형이 친일을 했다면 그런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자리가 있었던가? 무슨 재산을 얻었던가? 그가 얻은 것이라곤 감시와 감옥살이밖에 없었다.

 

  7) 금전 수수설

  수수설의 종류

  폄훼론자들이 해방직후부터 끊임없이 제기한 문제 중의 하나는 여운형이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예의 정진석 교수 또한 G-2문서에 기록된 내용 곧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여운형은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아마도 약 2000만엔-twenty million)을 받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거금 수수설은 당시 한민당 계열에서 계속 여운형을 음해한 주요내용의 하나였기 때문에 하지 사령관은 여운형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Jap 돈을 얼마나 먹었느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진 계기가 되었고, 또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이 ‘인공반대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여운형을 ‘사기한’으로 지칭한 계기도 되었다.

 

  ‘사기한’의 원문은 ‘venal man’으로 이는 사기꾼이라기보다 ‘돈으로 쉽게 매수되는 사람’ 또는 ‘뇌물이 잘 통하는 사람’이란 뜻인데, 아놀드 군정장관은 해방 당시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돈을 먹었다는 한민당의 모략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총독부에 매수되어 건준과 인공을 세웠던 사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나, 군정청 번역관이 이를 ‘사기한’이라고 의역해버려 더 문제가 확대되었었다.

 

  그런데 문제의 ‘venal man’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여운형이 정말 총독부로부터 돈을 먹었는지에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운형이 치안권을 이양 받을 때 총독부로부터 받았다는 정치자금의 액수를 자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2천만 엔 수수설: 우선 여운형이나 그가 세운 건준이 총독부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기록이 일본 측 자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여운형 또는 건준의 정치자금 수수설은 한국측 자료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한국민주당소사>에는 “정무총감으로부터 2천만 엔을 받은 것은 천하공지의 사실이며 저들의 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19)라고 적시되어 있다.

 

  ② ¥20,000,000 수수설: 1948년에 집필된 <주한미군사>에는 여운형 또는 건준의 자금수수설에 대해 “총독은 이 조직에 막대한 보조금(아마도 ¥20,000,000 정도까지)을 주었으며, 공공집회를 개최하고 공공건물과 시설을 사용하며 일본 비행기로부터 전단지를 전국적으로 살포할 권한을 주었다”20)라고 적혀 있다.

 

  공공집회의 허용은 건준 및 치안대의 설치를 가리키고, 공공건물과 시설의 사용이란 나중에 건준 본부가 된 풍문고녀 교사 등을 가리키며, 일본 비행기로부터의 전단지 살포란 8월 16일 총독부가 대신 공중에서 살포해준 건국준비위원회의 전단지21)를 가리킨다. 문제는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20,000,000의 자금을 받았던가 하는 점이다.

 

  ③ 450만 달러 수수설: 총독부의 치안권 이양과정에 개입했던 최하영(崔夏永) 관방 농상과장은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박석윤(朴錫胤)씨는 여운형씨를 설득하여 건준이 조선의 치안권을 이양 받도록 했다. 그 당시 총독부는 건준에 450만 달러 정도의 자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중 250만 달러만이 쓰여지고 나머지 돈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당국이 그 내막을 조사하려 하자 박석윤씨가 월북해버렸다는 설이 있다.”22)

 

  수수설의 진상

  이상의 3가지 설 가운데 ①2천만 엔설을 기록한 <한국민주당소사>는 1948년도에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금액이 1948년에 집필된 <주한미군사>의 ②¥20,000,000과 액수가 같다는 점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사>에 실린 ¥20,000,000은 기본적으로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가 수집한 정보를 군사관(軍史官)이 다시 정리한 자료로서 <한국민주당소사>의 ‘2천만 엔’과 소스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한민당의 브리핑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가령 해방 직전 송진우가 거절하자 정무총감 엔도오가 치안권을 여운형에게 넘겨주었다는 한민당 주장이 그대로 미군 자료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당시 미군은 미국 대학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한민당 계열의 여러 지식인들이 유창한 영어로 들려주는 조선의 정치상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만일 그들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면 총독부의 일본 관리들을 독자적으로 조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다른 이야기가 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진우와의 교섭설과 더불어 한민당의 ‘2천만 엔설’을 <주한미군사>에 ‘막대한 보조금(¥20,000,000)설’로 기재하게 된 것이다.

 

  흥미를 끄는 것은 최하영의 ③450만 달러설인데, 이것도 자세히 보면 한민당의 ‘2천만 엔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450만 달러는 당시의 2천만 엔을 달러로 환산한 액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8.15 시점에서의 환율은 4가지로 해군의 환율은 1달러 당 10엔, 육군의 무기와 관련된 환율은 1달러 당 4엔, 식량은 1달러 당 7엔, 품목에 따라서는 1달러 당 4∼8엔이었다는데, 23) 조선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이 총독에 임명되는 등 육군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1달러 4엔 남짓한 4.4엔 정도의 환율을 적용하면 450만 달러는 대략 2천만 엔이 된다.

 

  문제는 최하영이 450만 달러설을 어디서 들었던가 하는 점이다. 총독부의 관방 농상과장을 했고, 치안권 이양과정에 어느 정도 개입했었기 때문에 총독부로부터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들었다면 의당 ‘2천만 엔’이라 했을 것인데 왜 그것을 굳이 ‘450만 달러’라 했을까? 이는 그 이야기를 들은 소스가 총독부가 아닌 미군정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 농상과장을 하던 최하영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곧바로 미군정 농상국 고문에 취임했던 것이다.24)

 

  따라서 최하영이 언급한 450만 달러의 소스는 미군정이고, 미군정의 소스는 한민당이었으므로 3가지 설은 모두 그 출처가 동일한 한민당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민당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을까?

  <한국민주당소사>에는 여운형이 정무총감으로부터 2천만 엔을 받은 것은 ‘천하공지의 사실’이라 했는데, 사실은 천하공지의 사실이라 한민당이 떠들었다기보다는 한민당에서 떠들었기 때문에 천하공지의 사실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한민당은 건준이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단 보름 동안에 145개의 지부를 전국적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총독부로부터 받은 막대한 정치자금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폈다. 일반적으로 조직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건준은 중앙에서 지부를 세운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방유지들이 세운 건준지부를 건준중앙에서 심사하여 사후승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145개의 건준지부는 사업체로 치면 일종의 독립채산제 비슷한 구조였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보름 만에 전국 145개의 조직을 형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건준본부에서 돈이 내려가지 않아도 해방을 맞은 각처의 유지들과 민중은 건준의 이름을 얻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각처에 지부를 조직했었다. 한민당 주장처럼 총독부에서 받은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건준본부는 돈과 함께 전국 145개 지부에 조직책을 내려 보낼만한 인적자원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당시의 2천만 엔이 정무총감이라 할지라도 내놓기가 쉽지 않을 만큼 큰돈이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8.15의 시점에서 조선은행 발행고는 총 49억 7천만 엔25)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2천만 엔의 가치를 지금의 화폐발행고 30조 원에 투영·환산해보면 대략 1천 2백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 된다.

 

  이런 엄청난 자금이 있었다면 어째서 건준은 본부 사무실이 없어 계동 입구의 임용상 집을 빌려 사용하다가 다시 안국동의 풍문고녀 교사로 옮기는 등의 구차한 행동을 계속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여운형은 전용 자가용 한 대를 마련하지 못해 부호 정무묵(鄭武黙)이 차를 빌려주지 않을 때는 걸어 다니다가 테러를 자주 당했는지 의문이다.

 

  한민당이 주장한 2천만 엔 수수설의 근거는 여운형이 정무총감에게 요구한 석 달 치의 식량을 돈으로 환산한 금액이었다는 설이 있다. 경성부민 110만 명이 8월 15일부터 햇곡식이 나와 배급되는 10월 말까지 75일간 먹을 쌀의 분량은 1인당 하루 2홉 5작으로 계산할 때 10만 석 정도 되는데, 8.15의 시점에서 쌀 1석의 공식가격이 200엔 정도26)였으므로 대략 2천만 엔이 된다. 이는 여운형이 받았다는 2천만 엔과 일치하는데, 만일 배급식량분이 정치자금 수수설로 둔갑한 것이라면 억울한 모함을 받았다는 것이 된다.


 

  한현우의 증언

  딱히 증언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韓賢宇)가 여운형의 돈 이야기를 적은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해보기로 한다. 돈이 궁해진 여운형이 1947년 부호 정무묵으로부터 2천만 원을 빌리려고 했던 사실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운형은 그 당시 제2차 미소공위에 협조하여 지탁운동27)을 추진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으므로 정치자금을 구하러 여기저기 찾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명륜동에 살고 있던 정무묵에게 정치자금을 얻으러 그가 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여운형은 정무묵에게 2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2천만 원은 물론 큰돈이다.

 

정은 그런 큰돈을 내는데 있어서 그 돈이 유효하게 사용될 것인가, 의미가 없는 산재(散財)가 될 것인가, 즉 그에게도 모슨 대가를 가져올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정으로서는 알아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7월 상순의 어느 날 여운형에게 자택에서 식사를 하자고 초청하여 놓고 그가 정말 정권을 잡게 될 것인지를 관상가에게 보이기로 하였다.

 

이에 정의 부탁을 받은 관상가는 우리들을 각별히 도와주던 희당(希堂) 최일영(崔一永) 노인이다. 희당은 관상가로서 고명하여 이승만 박사의 관상도 늘 보고 있던 노인이다. 동지 배광호(裵光浩)가 희당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처음에 여운형의 상을 보니 정권은커녕 불원간에 죽을 운수였더라고 한다. 그러므로 희당은 정에게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으니 좀 더 있다가 다시 한 번 더 보기로 하면 어떠냐고 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은 곧 돈을 내지 않고 지금은 어려우니 좀 더 기다려 달라고 여운형에게 말하고 말았다. 28)

 

  제2차 미소공위는 1947년 5월 21일에 재개되었으니 여운형이 돈을 구하러 다녔다는 시기는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같은 돈이지만 여운형이 빌리려 했다는 2천만 원은 8.15 때의 2천만 엔과는 가치가 다르다. 8.15 때의 2천만 엔이 지금의 1천 2백억 원쯤이라면 인플레가 수백 배나 진행된 1947년의 2천만 원은 지금의 5억 원쯤 된다. 물론 그것도 큰돈이기는 하지만 한민당 주장처럼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거금을 받았다면 그래도 쓰고 남은 돈이 꽤 있었을 것인데 왜 구차하게 5억 원을 빌리러 다녔던 것일까?

 

  여운형은 어릴 때부터 물욕이 없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세월은 험했고 돈 문제는 때로 부자지간에도 모를 부분이 있는 것이니 결론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다만 사후에 그가 남긴 재산이라곤 <조선중앙일보> 시절 주주들이 증여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계동의 38평짜리 한옥 한 채뿐이었다.

 

  8) 맺는말

  이상의 검증작업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여운형에게는 친일론의 혐의는 없다. 3.1운동의 막후기획자였고, 상해임정이 태동할 때 신한청년당 당원들과 함께 뒤에서 실무적인 일들을 뒷바라지 했으며,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을 이끌었던 그에게 더 이상 친일론을 씌워서는 안 된다.

1946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이 여운형을 ‘사기한’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당시 <매일신보> 사회부장 홍종인(洪鍾仁)이 쓴 반박문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8.15직후 그 모체였던 건준이 거의 독보적으로 전민중적인 활약을 과감히 전개했던 사실을 시인하는 우리는, 그후 인공의 탄생경위와 그 전도관(前途觀)에 대하여 그 책임자인 여운형씨로부터 사실은 우리의 기대한 바에 상위되는 점도 있는 듯싶은 것은 유감이라고 기자단에게 말한 바도 있었으나, 그이와 그를 중심한 중추인물들이 하등의 사욕도 사심도 없는 애국자임을 믿고 싶은 이상, 그간에 세상의 논란을 받은 일이 다소 있다 한들 우리로서는 그들이 애써온 과정을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로서 자랑할 수는 있을지언정, 지천(至賤)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고 냉소천시할 아무런 이유도 용기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많지 못한 지도적 투사를 힘껏 돕고 아껴서 서로 뭉치도록 노력하지는 못하고, 오늘까지 경애해온 선배를 사기한이라고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뜨려야 하는 것인가. 부족과 실수가 있다면 돕고 보탤 것뿐이다. 이것이 용어의 미숙이나 착오이거나 오역이라면 다행일까 한다.

 

또 묻거니와 인공의 책임자는 여운형씨다. 지금은 사임했으나 한번은 군정청에서 군정고문으로 임명했던 분이다. 인공의 괴뢰극은 어느 누구의 연극을 말하는 것이며,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라 함은 누구를 지칭함인가. 천하의 상식은 여운형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문으로 위촉한지 불과 수일에 괴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으로 지적한 발표문이 나는 조선민중을 사기하는 기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29)

 

  홍종인의 지적처럼 왜 우리는 평생을 항일투쟁에 몸바쳐온 많지 못한 지도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지도 않았던 혐의를 뒤집어씌워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일까?

 

 실제 친일파였던 자들이나 또는 그 관계자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여운형의 친일론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는 너무나 치졸한 행위이고, 홍종인의 표현처럼 ‘민중을 사기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그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기 전에 자신이나 자신들의 선조가 해방 전 과연 무엇을 했는지, 아주 작은 독립운동의 한 조각이라도 한 일이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애꾸눈 동네에서 두 눈 뜬 사람이 온전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자라나는 2세에게 올바른 민족정신을 심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

<각주>

1)<当時の政務總監遠藤柳作氏, 政権授受の真相を語る>, <國際タイムス>, 1957년 8월 18일. 엔도오 정무총감의 말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총독부 농상과장 최하영의 회고록(<월간중앙>, 1968년 8월호)인데, 거기엔 자기가 엔도오에게 추천한 사람은 만주 영사를 지낸 박석윤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치안권 이양 문제로 송진우를 만났다고 한민당 자료가 밝힌 총독부 사람들은 이쿠다 세이사부로(生田淸三郞) 경기도지사, 오카 히사오(岡久雄) 경기도 경찰부장 등으로 정무총감→최하영→경무국장→박석윤→여운형으로 이어진 교섭 라인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본래 치안권 이양은 경기도지사나 경기도 경찰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민당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2)정진석,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신동아> 2010년 1월호. 같은 기사가 <조선일보> 2009년 12월 15일자에도 실렸다.

 

3)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4)<조선일보>, 1949년 1월 11일.

 

5)<여운형평전>의 저자인 이기형의 증언, 2004.12.5.

 

6)이인, ‘해방전후 편편록’, <신동아> 1967년 8월호. 본문에 나오는 ○陽은 문맥상 여운형임을 알 수 있다고 정진석은 지적했다.

 

7)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8)<呂運亨の朝鮮獨立運動事件>, 朝鮮總督府高等法院檢事局, <思想彙報>, 第26号(1943年 10月).

 

9)정진석,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신동아> 2010년 1월호.

 

10)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11)<민주중보(民主衆報)>,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는 해방 전에는 일본어로 발행되던 <부산일보(釜山日報)>였으나, 해방 후인 1945년 9월 1일부터 우리말로 바뀌었고, 같은 해 9월 20일 <민주중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4일자에서 재인용.

 

12)大川周明, <大川周明日記>, 東京, 大川周明顯彰会, 1988. 이정식, <몽양 여운형>에서 재인용. 이정식은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에게 친일의 죄명을 씌울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13)김삼웅은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이 글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다면서 그 근거로 당시 <매일신보> 평양 주재기자였던 김진섭의 <조만식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 쓴 평양지사장 자살>(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9월 1일자)이라는 글을 제시했다.

 

14)김동인, ‘문단 30년의 자최’ 11회, <신천지> 1949년 7월호.

 

15)정진석,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신동아> 2010년 1월호.

 

16)G-2 Periodic Report, 1945년 9월11일∼9월16일.

 

17)정진석,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신동아> 2010년 1월호.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자료총서1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227~228쪽)

 

18)"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 마지막의 Robinson은 1946년 미 제24군단 G-2(정보참모부) 책임자였던 존 N. 로빈슨 대령을 가리킨다.

 

19)金俊淵, <韓國民主党小史>, 5쪽, 한국민주당선전부, 서울, 1948.

 

20)“The Governor General subsidized this organization heavily (perhaps to the extent of ¥20,000,000) and gave it the authority to hold public meetings, use public buildings and facilities, and drop propaganda leaflets throughout the country from Japanese airplanes. , Part1, Chapter3, The Koreans' First Taste of Freedom, 1948.

 

21)전단지의 내용. “朝鮮同胞여! 重大한 現段階에 잇서 絶對의 自重과 安靜을 要請한다. 우리들의 將來에 光明이 잇스니 輕擧妄動은 絶對의 禁物이다. 諸位의 一語一動이 民族의 休戚에 至大한 影響잇는 것을 猛省하라! 絶對로 自重으로 指導層의 佈告에 ㅼㅏ르기를 留意하라. 8月 16日 朝鮮建國準備委員會”

 

22)최하영, <정무총감, 한인과장 호출하다>, <월간중앙>, 1968년 8월호.

 

23)杉本幹夫, <終戰時の在外資産>, http://www.jiyuu-shikan.org/tokushug_8.html

 

24)서울신문사, <주한미군30년>, 행림출판사, 1979. 또 최하영은 “그 중 250만 달러만이 쓰여지고 나머지 돈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당국이 그 내막을 조사하려 하자 박석윤씨는 월북해버렸다는 설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당국은 총독부가 아니라 미군정인 것이 박석윤의 월북은 미군 진주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하영은 총독부로부터 받은 나머지 자금에 대한 당국의 수사 때문에 월북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설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낭설일 수도 있다.

 

25)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東京, 1964.

 

26)해방이 되면서 화폐 남발과 배급통제 시스템의 붕괴로 물가는 20배나 폭등했는데, 1945년 9월 6일 미군이 입성하기 직전의 쌀 암가격은 1석 당 2천∼2천4백 엔에 달했다.(森田芳夫·長田かな子, <朝鮮終戰の記錄 第二 卷>, <京城における暗価格調査>, 巖南堂書店, 東京, 1964)

 

27)지탁운동(支託運動):신탁통치 지지운동.

 

28)한현우, <여운형 피살사건>, <세대>, 1976년 2월호.

 

29)<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