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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 / 최상용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11



 <원래 이 글의 부제는 '원칙과 타협의 지도자' 이며 <계간 사상>, 1992년 가을 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24)


 



최 상 용 (고려대 교수)                              

 

우리는 해방한국의 무대에 등장한 5대 정치가를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이들 5명의 정치가는 이념 및 정책에 있어서 제각기 독특한 지도력의 한 유형을 형성한 인물들이다. 박헌영이 전전(戰前) 볼셰비키 공산주의지로서 당시 남한에서 극좌의 위치에 있었다면, 여운형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자로서 흔히 말하듯이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여운형을 중도좌파로 본다면 김규식은 1919년 이래 여운형과 거의 행동을 같이 해온 중도우파로서 의회 민주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8 ·15 전추를 일관해서 지적적인 반공주의자로서 동서냉전의 현실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던 우파 지도자였다.


그리고 김구가 실천적 우파 민족주의자였다면, 여운형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면서도 우파의 반공주의와는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위해 다루어야 할 최소한의 역사적 사건들, 이를테면 ① 민족자결주의의 충격과 신한청년당의 조직, ② (상해임시정부)조직을 둘러싼 여운형의 주장, ③ 일본방문과 <한국독립선언>, ④ 공산주의관과 코민테른의 극동민족대회, ⑤국내의 광범한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건국동맹, ⑥ 8·15 이후의 전국적 규모의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관한 사실 확인과 해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민족자결주의와 신한청년당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이 자기의 정치적 운명을 지주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주의·주장으로 원래 민족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민족 자결주의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는 시기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무리를 달리하는 두 증류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었다. 하나는 1917년 11월 소련의 레닌에 의해서, 다른 하나는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 의해서였다. 레닌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그 성격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의 주장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당시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사상의 면에서나 조직의 면에서나 명확한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제기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대한 대응태도를 둘러싸고 독립운동의 활동지역별로 대체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미주 한인>으로 구성된 독립운동가 그룹, 둘째는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한인> 세력, 셋째는 상해에서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한청년당>, 일본에서의 최근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독립당>, 국내의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3 ·1독립운동> 등의 세력이다. 이들 상해, 동경,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반드시 일관해서 연대를 보였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민족자결주의 선언의 충격에 대응하여 대미 또는 대소 의존의 태도를 분명히 했던 제1, 2 그룹과는 달리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선언으로부터 민족운동의 본질적 내용으로서의 <자결>의 원칙에 크게 고무되었던 그룹이다. 상해의 여운형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누구보다도 자각적으로 받아들였던 정치가이다.


여운형은 1914년 중국 금릉(金陵)대학에서 3년간 영문학을 공부한 후 1917년 7월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상해로 이주했다. 1918년 11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상해의 한국 독립운동계는 비상한 흥분상태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와서 전후처리 문제와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연설을 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크레인을 만나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기 위해서 파리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뜻을 전했으며 곧바로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같은 달 조동호 등 34인과 함께 조직한 신한청년당이다. 이 신한청년당은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단체25)로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이 당의 총무간사 여운형을 대표단장으로 파견했다. 코민테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신한청년당은 126인의 사회주의적 경향의 한국 인텔리겐챠로 구성되어 있었다.26)


여운형은 1919년 1월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견하기 전에 한국대표가 참가할 수 없을 경우를 생각하여 독립청원서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크레인을 통하여 윌슨 대통령에게, 다른 한통은 파리회의에 제출하기 위해서 중국대표단의 고문 밀러드가 휴대하도록 했다.27) 크레인에게 건네준 독립청원서가 윌슨에게 전해졌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밀러드에게 맡긴 독립청원서는 그가 일본을 경유할 때 요코하마에서 일본의 스파이에게 빼앗겼는데 이 독립청원서 도난사건은 1919년 12월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내각이 회유정책의 대상인물로 여운형을 선택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여운형에 의해 씌여진 독립청원서의 일부가 1920년 2월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운동의 혈사>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민족자결주의에 바탕을 둔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일본 제국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한·중 민족의 연대를 주장한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조직을 둘러싼 여운형의 주장


한국 국내의 3·1운동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집결했다. 1919년 후반에는, 손정도 등의 3·1운동 지도자들이 국내에서, 최근우 등이 일본에서, 그리고 이동녕 등이 시베리아에서 모여들었다. 3월 12일 이래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의 조동호 등과 임시정부 조직에 대해 토의해 왔는데, 4월 11일에는 프랑스 조계에서 각처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일당에 모여 독립운동 기관의 조직에 대해 토의했다.28) 회의 당초부터 '황실대우문제', '정부조직의 형태', '이승만의 위임통치안 징계문제' 등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혁신파의 의견이 대립했지만, 그 다음날 즉시 임시정부 조직결성에 착수하여 당분간은 위원장제로 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혁신파의 여운형은 외무위원장에, 보수파의 조완구는 재무위원장에 추대됨으로써 일견 보수·혁신의 협조가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철 미국에서 안창호가 상해에 와서 임정의 조직 강화를 주장한 결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로 구성, 같은 해 8월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서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임정 조직을 둘러싼 여운형의 주장을 알아보기 위해 초기 임정의 지도자들의 사상적 경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논쟁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 논쟁이 다름 아닌 구황실의 대우를 둘러싼 견해대립이다. 조완구 등 보수파는 황실우대를 주장했고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파는 이에 반대했다. 황실우대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이 왕가는 500년간 조선을 통치해 왔기 때문에 그 뿌리가 깊다. 나라를 판 것도 이완용 등의 오적의 소행이고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고종이 서거했을 때 민중이 덕수궁에서 통곡한 것을 봐도 이 왕조에 대한 민중의 강한 충성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황실을 우대해야 한다. " 29)


이에 대해 여운형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 이씨조선 500년의 치적에는 공보다 죄가 많다. 한일합병 조칙문(詔勅文)에서 <거국솔민(擧國率民)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명치천황에 봉헌>한다고 한 것은 국가와 인민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죄이다. 한일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황실의 측근자들이며 이는 정의를 모독하는 것이며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황실우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고종의 서거에 통곡한 민중은 황실의 서거에 대한 비통이라기보다 망국의 원한이 국장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다." 30)


결국 이 논쟁은 표결에 부쳐져 보수파의 우대론이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 제7조에는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리하여 여운형은 임정이 보수파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점에 불만을 품고, 5월 안창호의 입각 권고에도 이를 거부하고 그후부터는 상해 거류민단 단장으로서 독자적으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외교활동에 주력하여 그 일환으로 1919년 일본 방문을 결행했던 것이다.


  

  여운형의 일본 방문과 <한국독립선언>


1919년 3·1독립운동 후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방 이래의 무단정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정책을 전환했다. 여기서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당시 파리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인물로서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조직의 발안자로서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계획, 그를 회유하려 했다. 일본 방문의 경위에 대해서는 1919년 8월 일본의 척식(拓植)장관 고가(古賀廉造)가 일본의 후주야(古屋)목사를 통해 여운형의 동경 방문을 권고했으나 여운형은 초청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거절한 바 있다. 같은 해 10월 고가는 다시 "신분보장 하에서 조선통치에 관한 의견 교환을 원한다"는 서신을 보냈고 다른 한편 야마자키(山崎) 영사가 프랑스 영사 윌돈을 통하여 여운형의 일본 방문시의 신분보장을 재확인했다. 일본 당국은 여운형이 서양선교사들과의 친교가 두텁고 여운형과 프랑스 영사와의 교우관계를 고려에 넣었던 것 같다.


당시 상해의 임정에서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놓고 이동휘 등의 반대파와 안창호 등의 찬성파 사이에 물의가 있었으나, 여운형은 도일을 결심하고 12월 15일 최근우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여운형은 1919년 12월 21일 고가 척식장관과, 다나카(田中) 육군대신, 미즈노(水野) 정무총감, 노다(野田) 체신대신 등의 각료들과 회견하고, 같은 달 27 일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유명한 (한국독립선언)의 연설을 했다. 여기서 여운형은 일본 방문의 목적을 일본의 당국자 및 지식인들과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한국독립선언의 연설에는 그의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첫째는 민족자결주의가 그의 특유의 (생존권의 사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민족이 자기의 정치적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마치 배고픈 자가 먹이를 구하고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이 당연 이상의 당연이며,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인간 생존권의 요구이지 결코 편협한 민족 지상주의가 아님을 역설했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여운형이 생존권의 발동으로서의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한 데 대해 1930년대에 들어와 좌익 측이 비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부 좌익 논객들은 "여운형은 생물계의 현상과 인류 자체의 현상을 기계적으로 대비하려는 형이상학적 방법의 소유자이며 민족개량주의자"31) 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좌익 측의 반응은 오히려 여운형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주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여운형이 민족주의의 본질적 내용으로서의 민족자결주의를 생존권의 주장으로 해석한 것은, 윌슨에 의해 단순히 선언의 형태로 공포되어 결국 공허한 이상주의적 원칙으로 되어버린 민족자결주의에 자기 나름의 주체적 인식태도를 보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고가(古賀)와의 회견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4대 원칙을 천명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독립은 ① 한국민족의 복리를 위한 것이고, ② 일본의 신의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무신의(無信義)이며 한일병합이야말로 한국민족과 중국민족이 일본을 공동 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③ 한국의 독립은 동양평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④ 세계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평화와 실력>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고가는 "평화의 보장은 실력만이다. 구미인의 동양정책은 동양의 구미화이기 때문에 실력이 없는 조선이 독립하는 것은 동양평화를 파괴할 위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한일합병이 필요하다"32)고 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평화의 진수는 정신적인 융화"33)이며 "한국의 독립은 신의 의지"34)라고 말했다.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호도하는 고가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 여운형은 이(利)보다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맹자의 사상을 인용함으로써 왕도주의적 도덕론과 기독교척인 평화사상을 결합하고 있다. 여운형의 이와 같은 사상의 근원에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유교적 교양과 1907년 기독교에의 입교, 중국에서의 많은 외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부터의 영향이 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일본 방문시 여운형의 한국독립 선언의 주장에 나타난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지적하지 많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주장의 높은 도덕성이다. 식민통치의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의 주장 속에는 민족적 증오심을 보이지 않으며 민족독립의 주장을 세계적 정의로 표현한 점이다. 당시 일본의 대정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사상가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여운형과의 회견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운형씨의 주장 가운데는 분명히 침범할 수 없는 정의의 번득임이 보인다.

그 품격에 있어서나 그 식견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우리들이 그가 갖고 있는 일편의 정의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장래의 도덕적 생명은 결코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35)


둘째, 민족독립을 동양평화, 세계평화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일관해서 패도에 대한 왕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시노 사쿠조는 여운형이 "세계적 정의의 확립을 위하여 행동하고 있다. "고 피력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사의 경험에서 보면 민족국가의 행동반경에는 거의 예외없이 전쟁이 수반됨으로써 민족주의와 평화는 공존보다는 모순관계에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민족독립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평화의 보완관계를 역설한 점은 마치 애국심을 평화의 핵심으로 파악한 루소의 생각을 방불케 한다.


셋째, 여운형의 사상에서 떼놓을 수 없는 것은 인민주권의 공화주의 사상이다. 여운형은 연설 가운데 인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의 건설을 희구했으며 아카사카 이궁(離宮) 참관의 감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성군인 주나라 문왕(文王)을 인용하면서 폭군 양혜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맹자의 언술을 인용하여 "일본의 천황이 어원(御苑)을 인민에 공개해야 한다. "36)고 함으로써 일종의 천황 비판을 시도했다. 여기서 그는 "백성(民)을 하늘처럼 여긴다. "는 맹자의 진보적 측면을 받아들인 것이며 이 사상은 손문의 이른바 인민을 황제로 한다는 발상과 비슷하다.


여기서 잠시 여운형의 일본방문이 방시 일본의 정계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방시 일본의 하라 내각의 회유정책의 실패를 들 수 있다. 하라 수상 자신이 그의 일기에서 회유정책의 실패에 대한 진사(陳謝)를 하고 있고,37) 앞에 나온 요시노 사쿠조는 여운형의 방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자국의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씨를 초청한 정부의 태도 자체는 하등 비난할 바가 못 된다‥‥ 다만 정부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를 불러 그들과 대항할 만한 아무런 도덕적 식견도 없이 맞이함으로써 결국 요령부득이 된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38)


그 다음 또 하나의 반향은 여운형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의 연대가 이루어진 점이다. 1919년 12월 신인회(新人會) 주최의 환영석상에서 요시노(吉野)와 미야자키(山崎龍介) 등 대정 데모크라시 운동의 지도자와 오스기(大杉榮), 야마카와(山川均)와 같은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등 천여 명의 일본 지식인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독립의 주장이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세계적 정의이며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연설을 했고, 이에 대해 미야자키는 조선독립이야말로 한일문제 해결의 열쇠이며 일본 국내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답사를 했으며, 오스기의 주장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여운형의 일본방문은 민족자결주의에 바탕을 둔 조선의 독립운동이 세계적 정의의 표현이며 극동평화 내지 세계평화를 위해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일본의 정계 및 지식인 세계에 분명히 알린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공산주의관과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


그 다음 여운형의 러시아 혁명관과 공산주의관 그리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아보기로 하자.


1919년 파리회의는 연합국들의 제국주의적 이해에 의한 현실주의가 지배했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공허한 이상주의적 원칙이었을 뿐이며 국내의 3·1운동도 일제의 무장탄압에 의해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미 의존파와 상해임정의 보수파를 제외한다면 혁명 러시아의 식민지 민족해방에 대한 지지정책에 무감각할 수 없었다. 해외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국내의 신문논조도 대체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예찬으로 나타나 있다. 오늘날 친일문학론으로 비판받고 있는 춘원 이광수도 이 카테고리에 들어갈 정도이다. 그러면 여운형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운형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민족생존권의 주장이라는 형태로 나름대로 수용을 했고,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을 둘러싸고는 우파 이승만의 미국 의존, 좌파 이동휘의 소련 의존의 자세를 비판하고, 1919년 12월 동경 방문에서는 한국독립 선언의 연설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19년 여운형의 동경에서의 연설을 보면 그는 러시아혁명을 약소민족의 해방, 부인의 해방, 노동자의 해방, 세계개조의 조류39)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경우 여운형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인식은 초보적, 추상적이지만 그의 민족주의 사상이 민족자결주의라는 원초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후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와의 상관관계에서 좀 더 성숙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원래 여운형은 양반 출신이면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동학란에 참가했던 조부모의 영향을 받아 '양반·상민'의 계급제도에 대한 불만을 품어왔고 고향에서 노비해방 운동을 기도한 적40)도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러시아 혁명은 민족과 계급을 해방하는 세계적 운동이었다.


920년 1월 동경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여운형은 같은 해 봄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는 당시 상해에 파견되어 있는 코민테른의 극동부장 보이친스키의 권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이친스키와의 회견에는 중국의 진독수(陳獨秀), 일본의 오스기 사카에 등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코민테른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41)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의 번역부원으로서 『공산당선언』 『영국의 노동조합운동』등을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특히 『공산당선언』은  최초의 한국어역으로서 당시 상해 시베리아 및 국내에 수천부가 배포되었다.

여운형은 1921년 12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데 거기서 그는 레닌, 트로츠키 등 소련 정부지도자와 지노비에프 등 코민테른의 지도자와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레닌과의 회견은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심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1921년 11월의 워싱턴회의에서는 9개국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은 자국의 주도권 하에 일본의 대중국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문호개방 정책을 내세워 중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회담 및 워싱턴회의가 본질적으로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열강들의 국제회의라는 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미주 한인>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회의에 이어 워싱턴회의에도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독립청원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워싱턴회의의 경과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던 코민테른 당국은 이 회의에 대한 대응으로 극동민족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극동민족대회는 워싱턴회의 주최국인 미국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아시아를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냉전은 이 두 회의의 경쟁을 통해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는 모스크바가 워싱턴보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첨예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42)

코민테른의 공식보고43)에 의하면, 한국대표단은 13단체 5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대회에 참가한 총수 144명의 3분의 1을 넘는 수이며 그 다음이 중국과 일본의 순서였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원이면서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대표단의 단장으로서 소련의 지노비에프, 중국의 장국도(張國燾), 인도의 로이와 함께 대회 의장단의 한 사람이었다.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한 여운형은 2회에 걸쳐 레닌을 회견했는데 후일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러시아가 한국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려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만나보니 나의 의구심은 사라졌다. 레닌은 현재의 한국을 농업국가로서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민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닌의 이 같은 주장은 내가 전부터 가지고 있던 정치이념과 완전히 일치44)했다."


그리고 레닌의 눈에 비친 여운형은 한국혁명의 현 단계에서 반제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필요한 지도자였다. 여운형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태도는 그의 법정진술에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① 마르크스주의는 그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에 따라 변형되지 않으면 안 된다.마르크스주의는 중국에서는 손문의 삼민주의, 소련에서는 레닌주의로 되었다.

②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에 찬성하나 실제 문제로서 세계 각국은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해서 실행하고 있다. 소련의 신경제정책은 그  좋은 예이다.

③ 조선은 농업국가로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무엇보다 먼저 민족주의를 실행해야 한다.


또한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각국의 대표가 자국의 혁명과제를 토의하여 그 결과를 자국의 의장단을 통해 본회의에 보고했는데, 여운형에 의해 최종적으로 검토, 채택된 한국문제의 결의안 가운데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상관관계가 취급되고 있다. 그 요지는 앞서 말한 여운형의 법정진술과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요컨대 한국의 경우 최우선 순위의 과제는 민족의 독립이며 그를 위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전선의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코민테른 당국과 여운형은 반제민족통일전선의 필요를 인정한 점에서 일치했으나 양자의 공산주의 인식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코민테른의 기본방침인, 레닌의 테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의 단계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민족해방운동은 어디까지나 그 과정에 나타난 긍정적인 현상일 뿐 독자적 카테고리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한국혁명의 현 단계가 민족주의의 실천임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유물사관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명확한 의견이 없었거나 아니면 그 역사적 도식에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계급투쟁 사관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자주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여운형에 있어서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과연 어떠하며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도식적 융통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한국 민족운동의 객관적 조건에서 보아 한국 민족주의의 제1차적 과제는 민족독립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적 구별이 긴박한 문제로 제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계급투쟁의 역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의 인식보다 한국민족주의의 특수성에 의해 매개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민족주의와 상용(相容)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변용을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유하자면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으로 중국의 민족문제를 풀어나간 모택동보다 중국의 민족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던 손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여운형 자신의 사상 상황으로부터 오는 요인으로는 왕도적 도덕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운형의 무계급 사회에 대한 이상은 그의 사상형성에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전통 유교의 도덕관과 기독교적 평등사상과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왕도적 이상과 기독교적 휴머니즘이 그에게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거부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여운형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공산당과의 연대를 주장했으며 8?15와 함째 등장한 <인민공화국>의 주역임에 틀림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계급투쟁의 역사관을 믿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역사발전의 필연적 단계로 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상이한 세계관을 갖고 상이한 계급적 입장에서 출발하면서도 반일제 민족독립의 투쟁에서는 언제나 공산주의자와 제휴했다. 이 점은 좌파세력과의 연합전선을 명백히 거부한 이승만, 김구등의 입장, 그리고 일관되게 친소 공산주의지적 전략·전술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던 이동휘 등의 입장과 구별된다. 또한 바로 이 점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냉전의 역사괴정에서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휘말려 끝내 살아남을 수 없는 비운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여운형의 공산주의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중국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운형은 손문의 중국혁명에 경도한 이래 일본 방문, 모스크바 방문때도 계속 중국혁명에의 연대를 분명히 했다. 그는 모스크바 방문 이래 반제민족주의가 제1차적 실천과제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위한 민족·공산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에서의 분파행동 등으로 통일전선의 형성에 실패하자 1924년 후부터 1929년 7월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는 주로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했다.


사상적으로 여운형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중국에서의 시회주의로 파악했으며 중국의 혁명은 농민의 마음을 잃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봄으로써, 모택동과의 회견에서 그의 혁명의 기초가 농민에 있기 때문에 필승할 것이라고 보았다.


여운형은 1929년 본국에 송환된 이래 1945년 8·15까지 국내의 일본 총독정치하에서 그의 주장을 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절이 8·15까지 해외에 머물렀거나 줄곧 국내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과 다른 그 특유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중국 본토에 기지를 구축한 일본은 1937년 7월에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게기로 본격적인 중국침략을 개시했다. 한국 국내에서도 1919년 이른바 문화정치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각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극도의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상황에서 일본 당국은 여운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태도를 보였다. ① 법조계 및 행정관들은 여운형을 회유하여 청년운동에 내세우려 했고, ② 경찰계통에서는 요주의 인물로서 구금 내지 구속하려 했고, ③ 군부에서는 여운형을 중국통으로 보아 중국문제 해결에 이용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 당국의 태도에 대해서 여운형은 소극적 저항과 적극적 준비의 전술을 선택했던 것이다. 소극적 저항은 일본의 극도의 탄압정책에 대한 전술적인 대응이며, 적극적 준비는 독립운동을 위한 지하조직의 준비였다. 전술적 대응은 1932년 출옥 후 1945년 8·15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여운형의 전술적 태도에 대해서 인민당 기관지 『인민보』에 실린 이강국의 <여운형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 속에서도 권위와 절조를 지키면서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로서의 전술을 겸비한 사람"이라 예찬하고, "수양산의 선비는 그를 비겁하다"고 생각하나 여운형은 '임기응변 출몰자재의 천재적 전술'45)을 몸에 익힌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소극적 저항의 카테고리에는 언론운동, 일본 방문 등이 들어가고, 적극적 준비에는 당시 국내 최대의 통일전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빼놓을 수 없다. 1932년 석방된 여운형은 그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통해 사회비리의 고발, 농민, 노동자, 학생운동의 변호 등의 논조를 전개했다. 그러나 그후 <신의주 사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 등으로 결국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말았다.


언론활동에서 손을 뗀 여운형은 1939년에서 1943년 12월 2차 투옥까지 수회 일본을 방문하는데, 그의 일본 방문의 목적은 1919년의 1차 일본 방문의 효과를 살려 동경에서 유력인사들과 만나 일본의 외교정책의 동향을 탐색하는 한편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하운동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0년 3철 고노에(近衛文磨)의 회견 요청에 응한 여운형은 같은 해 3월 18일 동경회관에서 일본의 대중국정책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서 고노에는 여운형에 대해서 왕정위(王精衛)정권과의 협력을 요청했는데 여운형은 "왕정위는 중국의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있어 이미 중국문제는 수습할 능력이 없다"46)고 했다. 고노에는 일본과 왕정위 정권과의 화해 공작에 여운형을 회유·이용하려 했으나 그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것은 파리회의 이래 제1차 일본 방문, 모스코바 방문시 일관되게 일본의 대중국정책을 비판해 왔던 그가, 더욱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나선 일본의 대중국정책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던 여운형이 취해야 할 당연한 태도였다.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동경방문을 끝내고 1943년 12월 21일 귀국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의 패배를 선전했다'47)는 이유로 7개월간 투옥되었다. 그 이듬해 3년간의 집행유예로 출옥한 그는 일본의 패배가 멀지 않았다고 판단, 같은 해 2월 독립준비를 위한 지하조직을 준비했다. 악명높은 치안유지법, 예방구금법 등으로 1940년 이래 사상통제가 극도로 심했던 때, 여운형은 상해 시대 신한청년당의 조동호, 일본의 조선독립단의 최근우, 국내의 이만규 등과 협의, 비밀결사로서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건국동맹은 불문(不文), 불언(不言), 불명(不名)의 3대 철칙을 지키며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항일세력을 통합하고 공장, 학교, 대중단체의 세포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①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구축하고 조선민

          족의 자유독립을 달성할 것.

      ② 반추축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의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모든 행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할 것.

      ④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중점을 둘 것.48)

등이었다.

이 건국동맹은 내무부, 외무부, 재무부의 3부서를 두고 전국 각 지방대표를 선임하여 그 지하조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건국동맹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8·15와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의 중심세력으로서 민족통일전선 수립의 원형적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8·15 이전에 존재했던 국내 민족주의 운동의 전국적 조직체였다는 점이다. 구성원들의 이념적 성격을 보면 최근우, 이만규와 같은 중도파에서 여운형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중도좌파 내지 민족좌파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들 세력은 오랫동안 국내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해외의 좌파 독립운동가 그룹 특히 <러시아 한인>계 공산주의자 그룹과 다르며, 8·15 이후는 김구의 <임정파>와 이승만의 <미주 한인파>, 송진우의 국내우파와 대립한 세력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조선총독부의 치안 책임자인 니시히로(西廣) 경무국장은 미국 점령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치안유지를 위해서 여운형과 접촉을 원했다. 여운형은 8·15전 수차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해서 일본의 조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중경의 김구, 미주의 이승만 등 해외의 민족우파의 거물들이 입국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로 조선총독부가 판단했던 것 같다. 민족우파의 지도자 송진우와 조선총독부와의 접촉설에 대해서는 사실확인의 면에서 쟁점이 있어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1945년 8월 15일 엔도(遠藤) 정무총감으로부터의 치안유지 요청에 대해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5가지의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①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범은 즉각 석방할 것.

        ② 8, 9, 10, 3개월분의 식량을 확보할 것.

        ③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④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 것.

        ⑤ 전국각지의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조선의 건설사업에 협력케 하는데 방해하지 말 것.49)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의 이 5개조 요구사항을 전부 수락했다. 이리하여 8월 15, 16일간에 전국의 형무소에서 1,100명이 넘는 정치범이 석방되고 많은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이 표면에 나타났다. 여운형은 1944년의 건국동맹을 확대하여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 8월 31일까지 <건준>지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어 145개에 달했다.


이 건준 지부는 8·15 이후 조직된 최초의 지방조직으로서 9월 6일 인민공화국 선언과 함께 지방 인민위원회에 해소되었다. 여기서 건준의 강령을 일일이 소개할 지면이 허용되어 있지 않으나, 이 건국준비위원회가 한국민족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건준이 전국적 규모의 민족통일전선이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주체적 인식 위에 1922년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에서의 경험, 상해임시정부 수준에서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해방 전 1944년 국내에서는 신간회 이래 최대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인 건국동맹을 형성했다. 8·15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여운형 자신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형성된 한국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더욱 특기할 사항은 8 · 15 전에는 주로 반제 · 반식민 과제에만 집중되었던 민족운동이 일제의 인적 ·물적 유산을 청산하는 반봉건 민주화 과제와 결합함으로써, 이념정책 그리고 인물의 구성면에서 새로운 모습의 민즉통합의 조직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평가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그후의 인민공화국 좌우합작 운동에의 참여도 어디까지나 건준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건준의 이념적 성격은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이며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정치이념은 어디까지나 이 민족주의의 과계의 실천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 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은 이른바 건준의 발전적 해체라고 불렸던 <인민공화국>에도 초기에는 적극 참가하나, 결국 그 인공의 실질적인 조직책임자인 공산주의자 박헌영과는 오래 동거할 수 없었으며, 미점령정책 차원에서 제기되어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기반을 결여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 내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8 ·15 직후 조직된 각 지방의 건준 지부가 8월 하순에서 9월 상순에 걸쳐서 소련군 점령하에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인민위원회에 통합된 건준 지부는 소련 점령하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위한 기본조직이 되었다.


미점령군은 건준에 의해 <인공>이 선언된 2일 후 9월 8일 진주했는데, 미군은 점령 당초부터 중앙의 <인공> 및 지방의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부인하고 교섭의 상대로 보지 않는 이른바 불승인정책을 취했다.


에드가 스노우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점령한 미국이 건국준비위원회를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건설이 더욱 신속했을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건준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념과 정책은 미 점령하의 민주화와 적어도 그것이 일본의 맥아더 점령하의 민주화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전혀 모순되지 않았으며, 설령 갈등의 측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점령군의 통제력으로 충분히 조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미군의 남한점령 초기 8월에서 10월까지는 4개의 정치세력이 남한 내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었다. 각 세력은 한국을 각자의 목적에 맞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했다. 이 4개의 세력은 ① 미군정부, ② 국내의 송진우, 미주의 이승만, <중경임정>의 김구 등 민족우파 세력, ③ 민족좌파와 공산주의자로 구성되어 있던 <인공>세력, ④ 잔존 친일세력 둥이었다. 이 가운데 ①, ②, ④는 기본적으로는 현상유지 세력이며 ③은 현상변혁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공>은 전국적인 지방조직으로서 도 · 시 · 읍 · 면의 인민위원회를 가지고 좌파 통합에 의한 통일전선정부의 수립을 시도하여 12월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화되기까지 약 3, 4개월 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정치세력이었다.


미 점령군은 9월 20일 '미군정은 남한에서의 유일한 정부'50)라 선포하고 <인공>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이처럼 미군정부가 남한 진주 당초부터 보수세력을 원조함으로써 반공의 토대를 강화한 것은 딘은 자료에 의해 입증된다.  이를테면 알슈타인은 미군정 당국은 외관상의 불편부당을 유지하면서도 그리고 이승만이 통일한국의 소리를 대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이승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51)고 털어놓고 있다. 그리고 미군정부의 군정관을 지낸 사라판도 한국인의 여러 정파간의 정쟁에서 미군정은 중립을 지키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우익정당을 절실히 요망하고 있었다5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 지방의 군정관을 지낸 미드는 미군정이 외관상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우익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53)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인공을 탄압하고 소수집단과 제휴함으로써 미국인은 한국인을 슬프게 하고 적으로 돌렸다."54)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에서 여운형의 민족주의 사상과 그 표현 형태로서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사상과 행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운형의 민족주의 사상은 우선 민족자결주의의 자각을 토대로 하고 있고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심화를 통하여 반제 민족주의로서 발전했던 것이다. ② 그 다음 그의 반제 민족주의 사상은 반봉건 및 인민주권의 공화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있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못박을 수는 없고, 민족주의와 인민주권이 결합한 서구초기의 근대 시민혁명,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와도 맥이 통하며 일부 후세 사람들의 평가대로 사회민주주의로서의 민주주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물사관의 역사발전 단계에서 말하는 인민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으면서도 주장의 내용을 보면 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운형의 민족주의는 그 실천과제의 내용에 있어서는 박헌영의 노선과 유사한 점이 많으나 민족주의를 어디까지나 유물사관의 발전과정에 나타나는 하나의 종속변수로 보는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자들과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고, 그렇다고 하여 철저한 반식민 민족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반봉건 민주혁명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김구의 우파 민족주의와도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의 정치이념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절충적으로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절충적 ·혼합적 정치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산 양진영의 연합 통일전선의 운동을 끝까지 끌어왔던 것이다.


   

   결론


이상의 분석을 통해 볼 때 여운형에게는 원칙과 타협의 지도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원칙 면에서, 우리가 민족주의를 정의할 때, 민족의 독립, 통일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포함한 민족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및 운동이라고 본다면, 여운형은 사상 및 행동 양면에서 민족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실천해왔다고 할 수 있다.


민족독립의 문제에서는, 민족자결주의를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었고,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좌우의 연합전선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일관되게 주장했었다. 그리고 여운형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평등을 중심 가치로 보는 사회주의적 요소와 자유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의회 민주주의적 요소가 혼재하고 있으며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보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공유하고 있던 반(反) 파시즘·민주주의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타협의 측면으로 크게 제기된 여운형의 대일관계는, 1차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결코 원칙의 변경이 아니며 오히려 원칙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한 리얼리즘으로서, 정치적 타협의 카레고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 타협의 참다운 의미가 통합에로의 기술(art to integration)이라면, 근현대 한국정치사에서 지겹도록 보아온 것처럼, 원칙이 내실없는 명분으로 질주해 버리거나 타협이 무원칙한 변절로 타락해 버린 정치문화는 어떤 형태로든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칙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이나 타협을 통한 원칙의 실천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리더십은 몽양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에서-우리가 그의 정치노선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하나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 대하여


[이 글을 쓴 최상용(崔相龍)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를 거쳐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2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1976년 중앙대 정경대학 조교수, 1979년 하버드대학 객원교수, 1981년 워싱턴대학 연구원을 거쳐 1982년부터 고려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2년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이사, 1993년 통일부 정책평가위원,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1994년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 연구원, 1995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1997년 한국정치학회 회장, 1998년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2000년 주일본국 특명 전권대사, 2002년 일본 릿교대학 명예인문학 박사, 2003년, 동경대 법학대학원 운영자문위원,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선정위원장, 2005년 통일부 통일정책평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 했다.-편자]



** 각주

 

24) 이 논문은 필자가 1968년에 쓴 미발표논문의 요지를 1992년 『(계간)사상』 (지금은 폐간) 가을호에 실은 것이다 이번 기회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으나, 앞으로 의미 있는 토론과 비판을 거쳐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란다.

25) 여운홍 저, 《몽양여운형》, 1967년, 26쪽.

26) Carl Hoym Naclf, Louis Cahnbley; "Der Erste Kongress der Kommunistischen und revolutionaren Organisationen des Fernen Ostens, Moskau", Januar 1922. S7 Verlag der Kommunistischen Internationale.

27) 여운홍, 앞의 책, 26쪽

28)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II》(原書房, 1967), 3쪽.

29) 여운홍, 앞의 책, 41쪽.

30) 위의 책, 42쪽.

31) 위의 책, 295쪽.

32)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維新社, 1920), 90쪽.

33) 위의 책, 138쪽.

34) 金正明, 앞의 책 93쪽.

35) 告野作造, 《中央公論》, "所謂呂運亨事件につぃて“, 1920年 1月號, 178쪽.

36)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년), 59쪽.

37) 原奎-郎, 《原敬日記》, 首相時代(5) (福村出版社, 1965), 210쪽.

38) 이만규, 앞의 책, 59쪽.

39) 박은식, 앞의 책, 133쪽.

40) 여운홍, 앞의 책, 375쪽.

41) 이만규, 앞의 책, 97쪽

42) スカラピノ著, 《韓國共産主義の起源》 , 1961, 44쪽.

43) Verlag der Kommunistischen Internationale, op. cit., S12.

44) 경성(京城)지방법원 검사국, <呂運亨調書>, 1930년, 581~582쪽.

45) 《人民日報》, 1946년 4월 10일.

46) 이만규, 앞의 책, 193쪽.

47) 여운형, 앞의 책, 116쪽.

48) 이만규, 앞의 책, 170쪽,

49) 여운홍 앞의 책, 137쪽.

50) "SCAP; Political Reorientation of Japan 1948.9~1948.9" Report of General Section, 472쪽

51) Van Alstyne, American Crisis Diplomacy (Standford, 1952), 127-128쪽

52) Sarafan B.D., "Military Government: Korea" Far Eastern Survey, 1946, No.23, 149쪽.

53) Mead, E.C.,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King's Crown Press, 1951), 155쪽.

54) 앞의 책, 234쪽.



-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60주기인 2007년 7월19일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몽양추모학술심포지움 논문자료집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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