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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부영 전 국회의원의 강연(몽양 여운형의 '역동적 중도노선')
작성자 사무처
작성일자 2020-04-17

[다음은 <몽양 여운형선생 62주기 학술 심포지엄(일시:2009년 7월 20일/장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의실)>에서 이부영 전국회의원이 행한 강연의 원고다-사무처]

 

 

 

       몽양 여운형의 '역동적 중도노선'


 

 

 

 

                                         이부영(화해상생마당 운영위원/본회 이사 /전 국회의원)

 

 

 

 

*들어가는 말

  몽양 여운형 선생 62주기를 맞아 추모학술심포지엄을 개최,몽양 전문연구가 강준식 선생이 '몽양과 3.1운동'을 발표하기로 했다. 몽양이 일어나도록 얼마나 준비하고 기여했는지 여러가지 자료들을 발굴하여 논문을 발표해주셨다. 몽양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 펜실바니아대의 이정식교수는 "몽양 없이 3.1운동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몽양의 기여를 결정적인 것으로 지난 60주기 학술대회 때 평가해 준 바 있다. 몽양에 대한 국내의 연구가 아직도 지난 60여년의 냉전시대가 만들어 놓은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면 강선생의 3.1운동에 대한 몽양의 기여를 밝힘으로써 그 장벽에 혈로가 뚫렸다고 할 것이다.

  필자에게도 '몽양의 중도노선'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몽양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처지도 아니어서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사양했지만 강권에 못 이겨 수락했다. 필자의 이 강연에서의 관심영역은 8.15해방 전후로부터 통한의 몽양 피격서거에 이르기까지 약 3년여에 걸쳐 몽양선생께서 전개하신 활동과 노선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기간은 해방을 맞기 위한 준비, 해방 직후에 취한 조치, 각 정파들의 분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몽양의 조정협의와 투쟁,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몽양의 서거와 본격적인 분단의 시작 등이 있었던 시기였다. 마치 용광로처럼 끓던 이 해방정국 속에는 갖가지 불행의 씨앗은 물론 희망의 가능성도 함께 뒤엉켜 있었다. 12차례의 테러를 겪으면서 담담히 '자주·독립·통일'의 일관된 길을 걷다 가신 몽양의 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려는 것이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된 목적이다.

 

메모로 준비되었던 원고를 강연 뒤 다시 정리하느라고 늦게 완료했다.

 

1. 해방을 준비한 몽양,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다

  일제의 패망을 몽양이 확신한다는 소문이 흘러나가자 일제는 1942년 몽양을 예비검속했다. 8개월여만에 풀려난 몽양은 요양중인 병원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아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신병을 핑계로 낙향하여 청년들을 불러 여러가지 조직을 준비했다.

 

  8.15해방을 꼭 한해를 남겨둔 1944년 8월 10일 몽양은 서울 한복판 경운동 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두달만에 중앙과 조선반도 전국 13개도 지부를 갖춘 단체로 만들었다. 경성콤그룹이 1940년 검거된 이후 국내에서 활동했던 유일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건국동맹의 조직기반을 다지기 위해 농민동맹, 학병 징병 징용 거부자들의 조직인 보광당을 비롯한 각종 조직들을 연계했다. 이와 함께 해외 독립운동세력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최근우 등을 국외로 파견하기도 했다.

 

2. 8.15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

  패전이 임박하자 일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한 퇴각을 대비하기 위해 몽양에게 치안권을 넘기려는 협상을 제안했다. 송진우, 안재홍 등도 접촉했지만 몽양만 협상에 응했다. 몽양은 치안권 의뢰를 수락하기 전에 1)정치범, 경제범의 즉시 석방, 2) 서울의 식량 3개월치 확보 등 5개항을 요구, 관철시켰다.

 

  그와 동시에 몽양은 그 대책기구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에 착수했다. 건준은 중장기적으로는 독립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세워진 조직이었다. 몽양은 좌우익의 연합을 위하여 스스로 중간자 역할을 자임하여 양측의 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우파의 대표자 격인 송진우가 협력을 거부하자 민세 안재홍과 연합하여 건준 조직에 나섰다. 건준의 모체가 된 것은 <조선건국동맹>이었다. 건국동맹의 목적은 당파를 초월한 '민족전선'의 결성이었다.

 

  몽양과 안재홍이 건준을 조직한 날자는 1945년 8월 16일이었다. 건준은 당초 좌우파를 망라한 범민족 세력의 집결체를 지향했지만, 우파 송진우의 거부로 처음부터 좌파연합적 조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조직 내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형성했다. 몽양이 송진우 김성수 등 친일적 한민당 집단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그들이 독자적 조직을 구축할 경우, 우편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그들이 건준 안에서 좌편향 집단을 견제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당일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서두는 동안, 중도좌파라고 할 수 있는 몽양은 좌우파 연합을 통한 '민주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좌의 공산당과 우의 한민당의 연결고리를 자신의 위상으로 설정했다. 한편 몽양과 연합한 안재홍의 사상적 입장은 몽양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중도파여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리 문제에서도 견해를 같이했다.

 

  몽양의 기동성 있는 정치적 결정에 따라 8월 15일 밤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건준은 8월 17일 1차 부서 결정을 완료했다. 바로 그날 몽양이 1차 테러를 당했다. 건준 조직구성을 좌파일색으로 하자는 좌파의 주장에 몽양이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건준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커지자 당초 건준 합류를 거부하던 우파들이 건준의 좌파일색을 개조하기 위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러로 몽양이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이미 건준의 주도권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헤게머니 상실을 우려해 건준 확대개편안을 무력화시켰다. 안재홍은 이에 반발해 9월 4일 건준과 결별했다. 안재홍의 건준이탈은 초기 건준이 가졌던 좌우연합적 성격을 탈색시켜 좌우 이데올로기 분화의 1차 도화선이 되었다.

 

3. 건준의 해산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출현

  건준이 우파의 공격의 표적이 되자 공산당은 신속하게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 인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몽양은 건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자고 주장했지�,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발표된 인민위원회에는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허헌을 모셔놓고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 우파의 최고 영수들을 무명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평인민위원에 올려놓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된 날인 9월 7일 몽양은 5인의 테러단의 습격을 받아 20여일간 요양해야 했다. 다음날 중앙인민위원회를 개최, 인민공화국 정부를 운영할 부서가 결정되었다. 요양을 하던 몽양은 이번 사안의 결정과 공표에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했지만 무시당한 채 공표되었다.

 

  몽양은 건준위원장으로부터 이름뿐인 인공부주석으로 끌어내려졌다. 미군 진주에 대처해서 남한에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인민공화국' 조직을 선포함으로써 미군에게 기득권을 인정받아 독점적 협상대상자가 되어 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건준이나 인민위원회를 준정권 기관인 인민공화국으로 격상시킨 결정은 미국은 물론 소련으로서도 바라지 않던 모험주의적인 전략이었다. 점령당국으로서는 자신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준정권이 수립된 꼴이었다. 결과적으로 인민공화국 선포는 미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해 경계와 불신을 자초하고 우익 진영의 조직파괴나 조직쟁탈투쟁을 유발하여 각종 외곽단체 안팎에서 극렬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건준의 존폐를 둘러싼 좌우파 간의 주도권 쟁탈전 제1라운드는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우파 역시 건준의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온건민족세력을 건준에서 이탈하게 하여 건준을 좌파연합으로 축소·변질시키는데 기여했다. 몽양은 일반대중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뒤섞인 건준 안에서 몽양의 인기나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혁명적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은 건준 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사상이 그대로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당초 건국준비위원회를 새로이 건설될 정부기구로 발전시키려던 몽양의 계획은 점차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거대한 건준 조직을 '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전환시켰고 몽양은 건준이라는 조직 기반을 상실했다.

 

4. 몽양의 조선인민당 결성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지 40여일 만에 남한 전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미군은 사법 행정 입법권을 군정이 행사한다는 것과 경제운용도 군정관리 아래 둔다는 것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것을 천명했다. 미군정이 최초로 접촉한 한민당의 조병옥 등은 몽양의 지도로 조직된 건준과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부일 협력정치인이다"라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 정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의 정보참모부 책임자는 "한민당은 한국의 일반대중을 가장 잘 대표했고 가장 많은 수의 보수분자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미군정에 보고했다. 좌파가 인공수립과 시위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파는 매일 정보참모부와의 회견을 통해 좌파와 중도세력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여 이후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9월 20일 미군은 군정청 설치를 성명으로 발표하면서 군정청을 "연합군사령관 아래서 미군에 의해 설치된 임시정부"라고 규정하고 "한국민이 군정청의 명령에 순응, 협력하면 민주주의 정부 건설이 빨라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독립도 지연되고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날까지 미군정은 몽양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미군정의 고문직 수락을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었으나 첫 고문회의에 참석, 10명 가운데 9명이 친일적 한민당측 인사인 것을 보고 즉시 사퇴했다.

 

  몽양과 인공세력이 길들여지지 않을 세력으로, 그리고 한민당이 길들여질 수 있는 세력으로 분류되었을 때, 미군정이 어느 세력을 지원하고 어느 세력을 제거해야 할 것인가는 분명했다. 미군정은 임정과 이승만이 미국의 의도에 따라 준다면, 인공에서도 추대되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를 환국시켜 한민당에게 접목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건준은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대다수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재건 공산당은 각급 인민위원회에서 헤게모니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1945년 10월 17일 건준 중앙집행위원회가 건준의 진로문제를 의제로 소집되었다. 인공이 이미 탄생했고 인민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건준을 해체하자는 쪽과 미군정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존속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몽양측의 주장이 격론을 벌였으나 표결로 건준 해체안이 통과되었다.

 

  계급갈등의 극복을 상위의 과제로 삼고 있던 박헌영·공산당과, 민족 갈등의 극복을 지상 과제로 설정하고 있던 민족주의적 여운형·건국준비위원회의 노선은 처음부터 갈등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몽양은 건준이 전국적 규모로 조직되어 나갈 때,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쳐나갈 정당조직을 구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정치적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양의 활동에 결정적 장애를 준 것은 테러였다. 몽양은 해방 후부터 암살당하기까지 무려 11차례나 좌우의 테러를 당했다. 그리고 끝내 테러에 쓰러졌다. 특히 건준을 조직한 이튿날인 8월 18일의 테러와 9월 7일 당한 테러는 결정적이었다. 해방 직후 하루하루는 1년 세월에 필적할 만큼 중요하고 변화 많은 나날이었다. 그 귀중한 시간 1개월을 병상에서 누워있는 동안, 그 사이 좌우 양측에서 벌어진 일들을 분석해보면 테러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10월 1일부터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몽양은 자신의 정치조직이 필요했다. 건국동맹 세력을 기반으로 인민전선적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1945년 11월 12일 창당한 인민당 정견연설에서 몽양은 건국동맹이 일제와 용감히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현 단계에서 당장 급한 것은 미군정과의 협력이라고 주장했다.

 

  민족통일전선적 건준이 안재홍계의 이탈을 막지 못하여 좌파연합적 건준으로 기반을 축소하고, 다시 인공=인민위원회에 이르는 과정에서 몽양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이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이들에 대한 극좌 공산주의 세력의 배제 전략과 무관치 않다. 창당 선언문에서 "일부의 편협한 고집은 민족적 통일전선의 의의를 망각하고 내분을 시사하며 외압을 자초하여 독립국가의 실현을 지연시키고..."라고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과격성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고 있는 점은 몽양의 온건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잘 나타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밖의 경제·복지·노동·교육 등의 정강은 현대 복지국가의 실현을 지향하는 온건한 민주적 사회주의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와 요직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몽양의노선과는 거리가 먼 급진노선으로 이끌려했다. 당내 공산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인민당 독자노선을 방해하면서 공산당의 '외피'역할을 하도록 조정했다.

 

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

  1946년 2월 14일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이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발족했다. 창설배경은 신탁통치 논쟁으로 혼미한 정국에서 여론을 친미적으로 유도하여 우파를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중경 임정요인들은 민주의원이 김구의 임정에서 유래한 비상국민회의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고 오인하고 주도권 장악을 시도했다. 사실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상의 아래 민주의원이 창설되었고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이 되어 의원들도 그가 직접 선임했다. '민주의원'은 미소공위에 대비하여 좌파 측의 '민전'에 대립하는 미군정의 우익 자문기관이었던 것이다.

 

  민주의원에는 우파 출신 24명에 좌파인사로는 몽양 등 4명이 포함되었다. 당초의 미군정의 약속과는 다르게 인선이 되자 몽양 등 4인은 탈퇴를 선언했다.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파 민족주의자에 의한 민족통일전선적 대단결로 통일 독립정부 수립을 추구하던 몽양은 이승만의 극우단체, 김규식 김구의 순수 우파 민족주의 단체, 박헌영의 극좌 민족주의 단체 등 그 어느 쪽 조직이나 집회에도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일파 주도의 한민당이 중심이 된 민주의원은 다른 문제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로 불붙기 시작한 신탁통치 찬반논쟁을 통해서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는 좌우대립에서 친소·반소의 대립으로 첨예하게 분열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과 그에 반대하는 우익은 폭력적 대결 사태를 불러와 그 갈등은 드디어 폭력화로 치닫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좌우이데올로기 분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좌파연합으로 출발한 몽양·인민당은 박헌영·공산당과 축을 이루어 찬탁진영에 섰다. 그러나 정치세력의 양극화 과정에서 좌측의 중심축은 극좌적 공산당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정치세력의 양극화 과정에서 적과 동지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중에 맞는 반탁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폐기하고 그 대안으로 한국 문제를 미국 지배 아래 있던 유엔으로 이관시킴으로써 동시에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자신있게 추진하게 되었다.

 

  민주의원에 맞서 좌파 측에서는 조선인민당이 제안대로 2월 15일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조선독립동맹 등 좌익 정당.사회단체 중심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민전은 인공의 직접적 후계자였다. 민전은 미군정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소련의 지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한 좌파의 토착 산물이었다. 몽양의 인민당은 미소공위의 결정만 믿지 말고 '민전과 우익 단체가 자율적 통일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는 성명을 냈는데 이것은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추진하고자 했던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예비회담을 거쳐 미소공위 제1차회의가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미군정이 지원하고 있는 민주의원이 반탁·반소 시위의 주력세력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소련이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을 포함한 모스크바협정의 전문 그대로 해석할 것을 고집하자 협상결렬은 불을 보듯 분명했다.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도 샌프란시스코발 AP통신은 "미점령군 당국은 남조선 안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라고 보도하여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민주의원 의장직을 휴직중이던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던 4월 11일 복귀하여 독립될 한국은 반소반공의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4월 18일 발표된 미소공위 공동성명 제5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문 1,2,3절에 따라 목적과 방법에서 진실로 민주주의적이며 이를 시인하는 조선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하기로 한다"고 하여 공위 파탄에 힘을 기우리던 우파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한때 태도를 누그러뜨리는듯하던 소련측은 다시 본래의 강경 태도로 돌아가 미국의 반대를 유도했다. 그리하여 5월 6일 미소공위는 결렬되었다.

 

  미소공위가 열리기 전후 미군정은 인공을 비롯한 좌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인공의 '공화국'이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고 정당으로 전환하라는 미군정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했다. 하지는 인공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이때부터 인공은 미군정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노동조직인 전평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고 죽산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보내는 사신이 군정의 연출로 언론에 공개되어 공산당 내의 내분을 불러 일으켰으며 몽양의 동생 여운홍이 주요간부 94명과 함께 "인민당이 독자노선을 상실하고 공산당의 전위적 역할만 한다"면서 인민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몽양·인민당을 좌파연합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박헌영·공산당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미군정의 공작의 일환이었다.

 

6. 좌익 3당 합당과 사회노동당

  미소공위 제1차 회의가 막을 내리자 미소는 제각기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각각 친미, 친소 정권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몽양은 "회담이 7주간이나 계속되었으나 조선인은 참가한 일이 없으니... 조선인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 공위를 무기휴회하는 것은 절대 반대다... 민족 분열과 국제 고립을 초래할 행동은 삼가해야 할 것이며 진정한 애국적 양심으로 자율통일을 급히 하며 속개에 대한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1946년 5월 25일 최초로 몽양이 좌측의 민전을, 김규식이 우측의 민주의원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좌우합작위원회의 회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지의 정치고문 굿펠로우가 한국을 떠나면서 "공위 소련측 대표단이 조속히 회담 재개를 제의해오지 않으면 미국은 남한 단정의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나, 이승만이 지방 순회를 통해 독촉국민회의이 조직활동을 촉진하면서 정읍에서의 연설에서 "남조선 단독정부"를 주장하기도 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우파에게 우위를 주는 대신 우파와 좌파 사이에 절대적인 균형을 주장했다. 미군정은 특히 몽양에게 초점을 두었다. 박헌영처럼 몽양보다 좌경화된 지도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바로 그 때문에 몽양은 좌파로부터 좌우합작을 포기하든지 좌파 주도 아래 참여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몽양은 중도를 택하여 양측 균형을 잡아나갈 길을 모색했다. 미군정의 버치는 몽양을 미국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 4월 중 여러 차례 몽양과 회의를 갖고 민전, 조선공산당과 거리를 두도록 설득했지만 몽양은 완강히 거부했다. 김규식 또한 우파 진영으로부터 비슷한 압력을 받았다.

 

  하지는 5월말 김규식과 몽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좌우합작 국내통일에 관한 수차례 논의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공산당과 좌파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되는 가운데 드디어 7월 22일 좌우합작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운동이 일게 되자 민전 수석의장 자격으로 좌익을 대표하게 된 몽양은 이 대표 자격을 가지고 좌익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자신이 의도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을 공산당 제거음모로 받아들인 공산당은 좌우합작운동에서 발을 빼고, '신전술' 채택을 통해 좌익 2당 통합을 통해 미군정에 맞서고자 했다. 몽양은 이미 자신의 조직을 탈취하고 유린했을 뿐 아니라 미군정과 계속 대치함으로써 민주통일국가 수립이라는 최고의 이념을 무산시킬 것으로 보이는 박헌영·공산당의 행동에 대해서 단호히 맞서는 태도를 보였다.

 

  민전은 좌우합작의 좌측 5원칙을 발표했다. 미군정의 제반 조치를 거부하는 민전의 입장이 나오자 우익대표들도 합작 기본 8대 조항을 발표했다. 신탁문제를 제외하고는 모스크바 협정의 기타 조항을 지지했으며 한국 전역에 걸친 민주적 자유국가의 수립을 내세웠다. 이렇듯 합작 초기부터 갈등이 드러나고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공산당은 정면대결 전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신전술'의 채택에 따라 죄익전선의 단일화가 긴요해졌다.

 

  인민당은 합당 목적을 몽양의 헤게모니 아래 좌익을 일단 뭉쳐놓고 우익과 연립하여 남북을 통일한다는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두고 있었다면, 이미 7월 26일 미군정 및 우익과의 무장투쟁노선(신전술)으로의 급선회를 결의한 바 있는 공산당은 '투쟁의 전면적 강행' 수단으로 3당합당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에 조성된 반(反)박헌영파 등의 이의 제기, 그리고 신민당, 인민당 내의 복잡한 문제 제기로 3당 합당은 심각한 장애에 부닥치게 되었다. 공산당 내의 헤게모니 장악이 아닌 분당과 같은 방법으로는 박헌영·공산당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몽양은 그래도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좌우합작을 논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온건한 좌익을 박헌영·공산당과 분리 고립시키고자 했던 미군정의 의도와는 달리 몽양으로서는 통합좌파와 통합우파의 좌우합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박헌영·공산당을 고립화하거나 이탈시킬 때에는 여전히 민족분열이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찬반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는 즉시 통합하라는 결정서를 채택하자 좌익 3당 통합준비위원회는 연석회의를 열고 '합당결정서'를 채택한 뒤,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몽양과 인민당 주요 간부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신민당의 백남운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항의를 묵살한 채 남로당은 결성되었다. 그리고 9월 총파업이 시작되고 이어 10 월 1일에는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 경찰서, 관공서에 대한 무력공격이 감행되었다. 이렇게 파업과 항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김규식이 그동안 정지상태에 빠졌던 합작운동의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합작위원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다시 재개된 회의에서 미군정은 좌우합작 문제와 입법기관 설치 문제를 제기했다. 즉 폭력적 극좌우익을 배제한 온건 우익정당과 애국적 좌익정당(반박헌영·공산당 제외)과의 합작으로 입법기관을 만들어 연립 합작 임시정부 수립을 지향한다면 미국은 지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던 몽양은 인민당 내부 수습 문제에 대한 일체의 처리권을 위임받았지만 여전히 민전과 조선공산당은 각각 입법기관 설치와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몽양이 김일성·김두봉을 만나 3당 합당문제, 좌우합작문제, 그밖의 광범한 임시정부 수립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38선을 넘는 9월 23일 그날, 남로당은 좌익 세력 안에서 내부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9월 총파업'을 일으켰다. 김일성·김두봉과 협의를 끝내고 돌아와서도 몽양은 자신의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몽양은 좌파통합당이 근로인민당과 같은 대중정당이 되어야 우파 정당을 용인하게 되어 좌우합작에 의한 좌우연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좌측 5원칙과 우측 8대책을 뭉뚱그려 좌우합작 7원칙과, 북의 임시중앙인민위원회와 맞서는 입법기구의 설치에 대한 건의사항을 결정하여 발표했다. 10월 7일이었다. 이것이 중간파의 소위 '행동강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우합작 노력은 이 강령이 발표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10월 항쟁'으로 그 기능을 거의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좌익 3당 통합운동은 남로당 준비위원회(9월 4일)와 더욱 온건한 사로당 준비위원회 (10월 15일)로 양립하게 되었다. 몽양은 공산당(노동당)과 다른 노선의 '좌익운동의 이론화'를 강조함으로써 볼셰비키 공산주의와 선을 그었다.

 

  그러나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양분된 좌익진영에서 월등히 우세한 남로당측은 계속 사로당의 내부를 조직적으로 흔들었다. 몽양이 '지도적 위치'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박헌영. 남로당과 조직선상에서 만날 수 없게 되자, 몽양의 꿈이었던 통일 민주국가 건설 구상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몽양은 미군정과 공산당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 초기부터, 아니 오히려 해방 당일부터 품었던 '민족통일전선적 민주정부 수립' 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이는 미군정과의 원만한 관계유지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국내외 정세가 좌우 양극화로 치닫는 가운데 적절한 타개책을 찾을 수 없었던 몽양은 미군정과 공산당 양측에서 차츰 경원시되는 존재가 되었다.

 

7. 제2차 미소공위와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 그리고 몽양의 암살

  미군정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절차가 신속하고 치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관선입법위원 취임문제는 몽양에게 곤혹스런 문제였다. 좌우합작위원회에서 그 구성을 동의했지만 남로당과 좌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사로당 내부에서 입법위원 취임을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몽양은 수락을 거부했다. 조건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남로당 결성과 사로당의 약화는 좌우합작운동에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좌파가 이탈한 좌우합작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미소공위의 파탄과 좌우합작위윈회의 해체는 단선단정으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분단을 막으려는 몽양 등 합작파는 모든 노력을 기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2차 미소공위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 근로인민당이었다. 조봉암을 중심으로 9개 정당, 32개 단체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독립전선'이 결성된 것도 이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승만·한민당은 미국과 협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미소공위를 파탄시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일사불란하게 추진했다.

 

  1947년 6월 25일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 400여명과 미소공위 대표 및 수행원들이 모인 가운데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당연히 미소를 배경으로 하는 극우 극좌 세력의 자기 입장 고수로 회의는 벽에 부닥쳤다. 미국과 이승만의 단선단정 수립의도가 분명해지자 정계는 다시 대개편이 일어났다.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모든 진영은 '민족자주에 의한 남북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목표 아래 몽양·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측과 김구·임정측의 재결속을 가져왔다. 몽양 김규식 조봉암의 중간파와 김구·임정의 민족자주연합전선은 미국이나 이승만·한민당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1947년 7월 19일 해방 이후 만 2년 동안 정국을 이끌던 주역의 한사람인 몽양이 암살되었다. 몽양·김규식의 제3세력이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세력으로 강력하게 결속된 경우, 미군정의 전략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몽양이 제거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해방 정국의 실세는 친미 친소 양대세력이었다. 비미비소의 중간세력은 대의명분상 정계의 중심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후에는 양대세력 간의 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한반도가 냉전체제에 편입되고 반공친미 단독정부 수립으로 독트린이 관철되는 단계에서 몽양은 미군정에 필요 없는 인물이었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몽양은 암살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 전후부터 암살당하기까지 몽양의 정치노선은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첫째,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독립 통일민주정부의 수립' 노선이었다.

  둘째, 계급보다는 민족을 우위에 두는, 계급연합적인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 즉 사회민주주의정당 노선을 견지했다.

  셋째,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한 좌우, 중도 그 어느 정체세력과도 함께 하고자 하는 합작, 통일전선 노선을 지켰다.

 

  몽양의 이런 노선은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고 한반도가 완전히 분단되는 조건에서 모두 좌절되었다. 독립운동 시절부터 좌우, 지역, 종교, 세대를 아우르는 노선을 견지해온 몽양에게는 현실을 앞세우는 정치적 선택이 민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의 몽양의 선택은 끊임없이 자신을 버린 과정이었다.

 

  이 강연을 끝내면서 필자에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본다.

  *박헌영·공산당과의 첫 대결 당시, 전국적으로 몽양에게 모여진 기대와 경외심만으로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자신의 노선에 충실한 정당으로 만들 수 있었다. 왜 창당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어떤 여건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남북에 몽양 당시처럼 계급연합에 기초한 통일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있는가. 이 노선이 지금 타당한가?

  *지난 60여 년 동안 일어난 남북의 변화, 남쪽 내부의 변화를 담아내고 화해·평화·공존·통일의 긴 도정을 이끌어갈 정치세력이 모색될 시점이 아닌가?

  *우리 민족의 자율공간이 몽양 서거시기의 해방정국 보다는 더 유리하게 확보될 수 있는가?


 

  후기: 복잡하고 다기한 사건 사태를 몽양 선생 중심으로 서술하려다보니 다른 부분에 대해 소략해지거나 비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넓은 아량이 있기 바란다. 여러 저서의 도움을 받았으나 강연인 점을 감안, 참고문헌을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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