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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양 여운형과 3.1운동(강준식)
작성자 사무처
작성일자 2020-04-17
[다음은 2009년 7월 20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3회 몽양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인데, 당일 논문집을 받지 못한 이들의 요청이 있어 이곳에 전재합니다-사무처]

                       


 

    몽양 여운형과 3.1운동

 

 

                                        강준식(여운형 전기<혈농어수>의 저자)


 

    1) 머리말

  한국 민족사 전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면서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3.1운동은 대체 어떻게 시작된 것이었을까?

 

  혹자는 일제의 한국병탄 후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등 내부적 요인을 꼽았고, 혹자는 일본에 대한 민중의 증오를 가중시킨 고종황제의 독살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했으며, 혹자는 대외적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한국 민족운동가들이 크게 고무되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혹자는 일본의 영자신문1) 등에 보도된 조선독립과 관계된 기사를 읽어보고 동경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는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여러 요인들이 다 3.1운동의 직간접적인 배경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일제의 무단정치와 경제수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왜 그 불만이 하필이면 1919년 3월 1일에 와서야 폭발했느냐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또 고종황제의 승하 이후 독살설이 퍼지면서 백성들이 일제에 분노하고,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지방 백성들의 일부가 상경한 것은 맞지만, 3.1운동이 표방한 국가적 이상이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종황제를 잃은 슬픔이나 또는 왕권 회복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한국 민족운동가들이 크게 고무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추상적인 뉴스를 접했다는 정도로 전국적인 연속집회가 일어나고 해외 한인들까지 봉기하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했겠는가는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또 일본 영자신문 등에 난 재미동포의 동정 기사나 조선독립 관련기사 등을 읽고 동경유학생들의 일부가 자극받은 것은 맞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2.8독립선언→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엔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다.

 

  상기의 여러 원인들이 3.1운동의 발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4.19혁명과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최루탄에 맞아죽은 김주열 열사나 이한열·박종철 열사였듯이, 3.1운동을 촉발시킨 불씨는 조선대표가 방금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이었고, 그 조선대표가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러 갔으니 조선이 곧 독립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청원을 실효성 있게 만들려면 한민족이 일제히 봉기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강한 설득이 모두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한 실질적 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설득을 위해 국내 각처와 일본 동경과 만주·연해주에 파견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현대정당인 신한청년당 당원들이었고, 그 총수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었다. 조선대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당사자도 여운형이었다. 나라를 잃은 처지에 조선을 대표할만한 단체가 있을 리 없으므로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창당한 당사자도 여운형이었다. 그리고 윌슨 미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의 연설회에 참석하고 그를 개별적으로 만나 조선인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당사자도 여운형이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사실상 여운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의 존재를 빼고 3.1운동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까 좀 추상적이고 거리가 먼 원인들만 이것저것 나열되어왔던 것이다. 실제 여운형이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정부였다. 그 점은 수습책을 강구하던 하라 다카시(原敬) 일본 수상이 그해 말 수많은 조선의 원로 지도자들 대신에 결과론적으로 당년 34세의 새파란 청년운동가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빙하였던 사실에 의해서 입증된다. 이는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통해 3.1운동의 배후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 3.1운동 후 국내외의 운동가들이 그때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만주나 연해주로 가지 않고 일제히 여운형의 활동지였던 상해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당사자가 조선대표를 파리강화회의로 파견한 여운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해로 모여든 그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합작하여 상해임정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 모든 수발을 든 것 또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었다.

 

  따라서 이 소고에서는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인 여운형이 ➀ 어떤 인맥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고 ➁ 어떻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하게 되었으며 ➂ 그 사실을 국내와 일본 동경과 만주·연해주에 알림에 있어 어떤 역할을 했고 ➃ 3.1운동 후 상해임정을 세우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➄ 3.1운동후 상해임정이 소재한 프랑스조계가 조선독립운동의 안정성을 확보한 근거지가 되는데 어떤 역할을 했고 ⑥ 3.1운동의 수습책으로 일본 정부의 초빙을 받아 동경에 가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등 그 경과와 결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국내에서의 기독교 인맥

  여운형의 초기 인맥은 거의 기독계였다.

  3.1운동에는 불교·천도교·기독교 등 종교계가 다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2)이 기독교인이었던 점, 3.1운동을 점화한 48인 가운데 24명이 기독교인이었던 점, 각처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가운데 그 주동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중 기독교가 78개 지역으로 전체의 25%,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작한 곳이 42개 지역으로 전체의 38%에 달했다는 점, 그리고 그해 6월 30일까지 투옥된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전체의 22%를 차지했다는 점 등으로 입증된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한 뒤 서울 승동교회를 담임하던 곽안련(찰스 클라크) 목사의 조사가 된 여운형은 기독교가 썩어빠진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사회적 복음이라 믿고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의 활동은 단순한 종교활동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띄고 있었다. 특히 전덕기(全德基) 목사가 주관하던 상동청년학원에는 훗날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우국지사들3)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는 자신의 친척 아저씨 여준(呂準)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상동청년학원의 우국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초기 독립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학교 선생을 하던 족숙 여병현(呂炳鉉)의 소개로 관동학회에도 관계하면서 관청․학교․단체와 교회를 오가며 분주히 활동하는 가운데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이상재(李商在)나 선교사 호레이스 G.언더우드 같은 당시의 명사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기독교 인맥은 훗날 그가 거사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인적 자산이 되었다.

 

  그는 관동학회 회장 남궁억의 요청으로 강릉에 가서 초당의숙을 잠시 경영했으나 한일합방과 더불어 초당의숙이 폐쇄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승동교회의 곽안련 목사는 그가 돌아온 것을 크게 환영했다. 그것은 그가 강릉에 가 있는 동안 장로교․감리교 합동으로 전개해온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여운형 같이 젊고 유능한 전도사를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개성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다음해 미국의 저명한 부흥사 윌버 채프만이 이끄는 아시아 순회 전도단이 내한하여 대도시 집회를 갖게 됨으로써 1910년 1년 동안에만 전국적으로 마가복음 70만부, 전도지 수백만 장이 유포되는 복음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무렵 조선의 개신교 신도는 약 18만이었다. 이를 1백만으로 늘리기 위해 교인들은 거리로 나갔는데 여운형 또한 전도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새벽기도에 나갔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별방문을 하며 쉬지 않고 전도지를 돌렸다. 그리고 수요예배나 저녁예배 같은 때 강단에 서기도 했는데 신도들의 반응이 좋게 나타나자 어떤 때는 기존 목사를 대신하여 부흥회 강단에 서곤 했다.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토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가 수개월 동안 4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일제의 탄압이라는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 천국 같은 기독교의 나라 조선을 만들자는 것으로, 이 같은 메시지는 나라를 잃은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청중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도사 여운형의 능력에 대해서는 당대 기독교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새문안교회의 언더우드 목사나 연못골교회의 제임스 S.게일 목사 등이 높이 평가해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여운형의 전도 행보가 마냥 앞으로 나아갈 수만은 없었다. 기독교의 부흥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것을 총독부가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반일세력의 핵으로 간주되던 기독교 지도자 105명을 검거함으로써 부흥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되자 교회의 보존을 원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총독부의 탄압정책에 타협하여 정치색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조선 기독교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이렇게 나오니 민족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조선 교인들도 맥이 빠졌고, 여운형의 폭발적인 전도행렬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선교 열정이 그를 목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는 1912년 3월 1일 곽안련 목사의 알선으로 5년제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미국 시카고의 네티 F. 맥코믹 여사가 헌금한 돈으로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세워진 평양신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인들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곽안련 목사가 나온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맥코믹 출신의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복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교화 대신에 개인과 관련된 복음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회개는 개인이 하는 것이지 어떤 구조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 같은 경향은 특히 ‘105인사건’ 후 총독부의 탄압정책에 타협하는 방식으로 흘렀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듯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려던 여운형의 기분에는 맞지 않았는데, 이 점을 그는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문) 어째서 그처럼 장로신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의 학교로 갔는가?

답) 장로교신학교보다도 금릉대학 쪽이 수준이 높다고 하기에 그렇게 변경했던 것이오.

문) 그것도 하나의 원인일지는 모르나 그 신학교의 미국인의 태도가 횡포해서 그것에 불평을 품고 그 때문에 중국에 그처럼 건너갔던 게 아닌가?

답) 그렇소.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서양인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고, 그들 서양인의 태도가 하나 같이 횡포했기 때문에 널리 그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금릉대학에 가서 스스로 신학연구를 깊이 한 뒤에 더없이 횡포한 서양인에 대립해보려고 마음먹었소.

문) 횡포하다고 했는데, 어떤 짓을 감히 저지르고 있었는가?

답) 원래 조선인에 대한 선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선교를 하고 또 방법에서도 맞지 않는 점이 있었소. 4)

 

  위에서 말하는 미국인의 횡포란 조선 교회를 좌지우지하던 그들이 조선인 신자에게 총독부의 권위에 맞서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조선인에 대한 선교임에도 자기 멋대로 선교를 하고 또 방법에서도 맞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인 신자들은 기독교를 통해 독립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데 그들은 총독부에 굴복하거나 타협하라고 종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운형은 미국인 교수들의 그런 가르침에 내적으로 반발했다. 그래서 좀 더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 가서 성경을 신학적으로 더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그들의 논리에 맞서고 싶었다. 이런 생각은 평소 그가 존경했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일이라든지, 수많은 우국청년들의 거점이던 상동청년학원이 폐쇄된 사건이라든지, 자신이 운동부장으로 근무하며 모시던 YMCA 초대 총무 필립 L. 질레트(吉禮泰) 선교사가 김린․김윤오 등의 친일파 목사들에게 쫓겨난 사건이라든지, 그리고 장로교 경기․충청 노회의 서기로 꽤 이름이 나 있던 김규식(金奎植)이 망명한 사건이라든지 등등에 영향을 받았다.

 

  여운형은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 참석했다가 중국으로 떠나는 김규식을 직접 배웅했었다. 김규식은 총독부의 탄압을 용인하고 침묵하는 것이 신앙을 지켜준다는 생각은 타락이라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지배하는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훌쩍 망명했던 것이다. 김규식의 망명을 목격한 여운형은 자기도 이 질식할 것 같은 식민지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이 시절의 여운형 생각에 대해 그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형님은 밤낮없이 생각한 끝에 일본인의 감시가 심한 국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힘, 연약한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조국 독립을 이룩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님은 해외로 나갈 것을 생각했다.5)

 

  마침내 그는 1914년 말 친구 조동호(趙東祜)와 함께 중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3) 상해에서의 기독교 인맥

  그가 입학한 금릉대학은 본래 문리과·의과·신학과의 3개과로 시작한 남경서원이 미국 장로교 아카데미, 유니온 기독교서원과 1910년 합병되면서 사립 금릉대학으로 출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학과가 없어졌다. 그래서 당초 신학과에 들어가려고 언더우드 목사의 추천서를 받아가지고 온 여운형은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같이 유학온 조동호는 한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금릉대학의 학생 수는 6백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 대학생은 갓 입학한 여운형과 조동호를 포함하여 3∼4명이었다. 모든 것이 낯선 여운형은 그보다 몇 달 먼저 입학한 황해도 출신의 서병호(徐炳浩)로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 총무를 역임한 필립 L.질레트 선교사가 그곳에 와서 남경YMCA 총무를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질레트 선교사는 서울에서 YMCA 운동부장으로 일했던 여운형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질레트 선교사의 사택에 모여 조선인들만의 예배를 드리며 주일학교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교회와 학교를 구성하고 있던 인맥이 그의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교장은 서병호, 부교장은 질레트, 서기 겸 회계는 여운형이었다. 이 무렵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목사가 되어 빛을 잃고 희망에 주린 동포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를 드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6)

 

  질레트 선교사의 집에서 처음 시작한 조선인 예배는 그후 상해의 동포교회로 흡수되었다. 신도는 모두 1백 명 남짓으로 처음에는 김종상(金鍾商), 나중에는 선우혁(鮮于爀)이 예배를 인도했다. 1916년 여름방학 때 여운형은 일시 귀국하여 상해의 동포교회를 담당할 목사를 파견해달라고 장로교 총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여행의 실제 목적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승동교회의 곽안련 목사를 찾아가 1년치의 학비 2백 원을 보조받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아내(陳相夏)와 장남(鴻九)를 상해로 데려왔는데, 그때 한강에 수영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17세의 경성고보생 이범석(李範奭)이 자기도 중국에 데려가 달라고 졸라 그를 만주 봉천을 경유하여 같이 데려왔다.7)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북사천로에 식구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자신은 학업을 더 계속하기 위해 남경으로 갔고, 주말엔 가족이 있는 상해로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1917년 1월 남녀 교우 30여 명이 사천로의 상해YMCA회관에 모여 여운형을 전도인, 임학준(任學俊)을 서기, 한진교(韓鎭敎)를 회계로 선출한 뒤에는 여운형이 직접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교회 이름은 상해교회였지만 예배를 드릴 자체 건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해YMCA의 도움으로 중국청년회관의 방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이때 관계를 맺은 중국인 YMCA 인맥도 그의 독립운동의 자산이 되었다. 당시 상해에 체류했던 한 미국 교포는 여운형의 설교를 이렇게 회고했다.

 

(여운형은) 주말이면 자기가 얻어놓은 청년회관에서 설교를 하였다. 성서의 말씀을 토대로 하는 그의 청년사랑․나라사랑에서 오는 조국광복의 애소와 부르짖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민족사랑․나라사랑을 하도록 심금을 울렸다.8)

 

  1917년 남경 금릉대학을 수료한 여운형은 활동지를 상해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상해교회의 교우 이규선(李圭善)의 소개로 영국인 선교사 에드워드 에반스가 경영하는 이문사서관(伊文思書館)의 영문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다가 뒤에 북경로 1번지의 미국인 연합교회가 경영하는 협화서국(協和書局)에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곳 사장 조지 F. 피치 박사는 미국인 선교사로 여운형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을 받는 주요 인맥이 되었다. 그는 피치 사장의 도움을 얻어 동포 자제들의 미국유학이나 중국학교 입학 등을 주선해주었는데, 이 시절 그의 도움을 받았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훗날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는 김홍일(金弘壹)도 있었다.9)

 

  여운형이 동포를 위해 일한 것은 비단 도항이나 학교입학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협화서국>에서 받은 월급마저도 생활이 어려운 동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는데, 이 점에 대해 예의 미국 교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상해의 6개 대학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 학생들은 여(운형)선생의 격려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선생은 75원의 봉급을 타오면 많은 학생들을 앉혀 놓고 그 자리에서 나누어 주고 빈손을 털고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한 푼의 돈도 넘겨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집으로 돌아갈 전차비도 없이 걸어가야 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옆에서 목격하던 가까운 친우들은 여선생의 봉급 날 회사로 뛰어가서 선생의 한달치 식생활비와 전차비를 제하고 나머지 돈을 건네주고 있었다....상해에 10여 개월 머무는 동안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선생을....청년과 민족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독립운동의 애국자라고 믿고 싶다. 10)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상해시대의 여운형을 보도한 일본 신문도 있다.

 

상해에서의 여씨는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과 밤이 되면 반드시 양말 행상을 나간다고 한다. 즉 아침이 되면 좋은 양복을 입고 카이젤 수염을 갖춘 채 출근하지만, 퇴근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양말을 넣고, 편지봉투 등의 휴지통을 넣은 바구니를 가지고 프랑스 조계와 공동 조계에 사는 외국인 집을 방문하여 양말과 담배를 팔아서 그 행상으로 벌은 적은 돈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거액의 돈을 자기 손으로 만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사용(私用)에는 일체 손대지 않고 양말 행상으로 사는 씨였다고 한다. 11)

 

  자신의 월급은 고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모자라는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 밤이면 양말과 담배를 팔러 다녔다는 이 기사는 상해시대의 그가 어떻게 살았었던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해 여름, 직장 휴가를 이용하여 그는 평북 선천에서 열리는 장로회 총회에 상해 대표로 참가하여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세운 장로회의 실력자 이승훈(李昇薰) 장로와 선천교회 목사 양전백(梁甸伯), 장대현교회의 길선주(吉善宙) 목사, 그리고 YMCA의 이상재(李商在) 등을 만났다. 표면적인 목적은 1917년에 기각되었던 목사 파견을 다시 청원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여운형과 만난 직후인 1918년 8월 15일 양전백 목사는 총회에서 “우리는 떠도는 들개처럼 가련한 민족이 되었으나....장래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발언을 했고, 이승훈 장로도 16일 총회에서 “우리 민족은 무엇 때문에 패퇴했고 무엇 때문에 현재와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었는가.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제씨가 이미 뇌리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잠시라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연설했는데,12) 이러한 발언들은 장로교 총회에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여운형 또한 그 무렵 경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2시간 동안 강연을 했는데 그때 모인 학생과 교사와 방청객들을 울린 감동적인 강연의 제목이 ‘어머니의 사랑과 모국’13)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후 이승훈은 동경유학생 서춘(徐椿)의 방문을 받고 3.1운동의 기독교측 발기인으로 선두에 서게 되었다지만,14) 사실은 그에 앞서 1918년 8월 선천을 방문했던 여운형이 상해에서 관찰한 세계정세를 전달해준 정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운형 자신도 장로교 실력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가 앞으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론은 상해로 돌아온 그가 그해 가을 상해 동포 1백여 명을 모아 조직한 거류민단(상해고려교민친목회)이었다. 거기서 만장일치로 단장(총무)15)에 선출된 여운형은 ‘우리들의 소식’이란 유인물을 발행해 동포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바야흐로 독립운동을 시작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4) 신한청년당의 결성

  1918년 11월 11일 제1차대전이 끝났다.

  이 무렵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고 있던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찰스 R. 크레인이 중국을 방문하자, 여운형은 11월 28일, 범태평양회의 회원인 피치 사장의 아들 비오생(費吾生)의 도움으로 초청장을 얻어 회비 1원을 내고 환영연이 열리는 칼튼 카페에 입장했다.

 

  연회장은 중국과 각국의 명사 약 1천명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강연에서 크레인 특사는 윌슨 대통령이 내놓은 14개조를 선전하며 “파리에서 열릴 평화회의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날 밤 집회가 끝난 뒤 여운형이 크레인 특사를 찾아간 일에 대하여 그의 동생 여운홍은 이렇게 적었다.

 

환영파티가 끝나고 밤도 깊었으나 형은 그를 만날 기회만을 기다렸다. 우선 형은 중국 측 요인으로서 크레인의 지인이기도 한 왕정정(王正廷)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왕씨는 곧 형을 크레인에게 소개시켜주었다.16)

 

  여운형은 조선도 독립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윌슨 대통령의 선거자금을 댄 공로로 주중대사에 내정되어 있던 시카고 출신의 크레인 특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참가시키라고 조언했다.

이에 흥분한 여운형은 장덕수·조동호와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영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초고를 협화서국의 사장 피치 박사에게 보여주고 영어 문장을 수정받았다. 그러나 사정을 알아보니 청원서는 개인자격으로 보낼 수는 없고 최소한 기관이나 단체 명의로 보내야만 한다고 했다.

 

  이에 여운형은 상해에서 사귄 아르멜 베이라는 터키인으로부터 들은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을 본떠 11월 30일 한국 최초의 현대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은 당시 상해에 와 있던 지식 청년 장덕수․조동호․김철․선우혁․한진교 등 모두 6명이었다.17)

 

  여운형 등은 독립청원서 2통을 작성하여 그중 1통은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문 시사주간지 <밀러드 리뷰>의 토머스 F. 밀러드 주필에게 의뢰하기로 했다. 밀러드는 중국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미국 언론인이었으나 개인적 안면이 없어 여운형은 예의 중국인 왕정정의 소개를 받았는데, 이 점에 관해 밀러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작년(1918) 12월 상해에서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미지의 어떤 사람이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내 방을 찾아왔다.....그는 상해의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중국기독교청년회에 있는 내 친구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18)

 

  윗글에 보이는 ‘미지의 어떤 사람’은 여운형, 그리고 ‘중국기독교청년회에 있는 내 친구’는 상해YMCA 간부로 있던 왕정정을 가리킨 것이다. 왕정정은 뒤에 국민정부의 외교부장을 역임하게 되는 외교관인데, 여운형은 YMCA활동을 하면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그와 친분을 쌓았던 처지다.

 

  이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조선대표로 여운형은 이 무렵 내몽고와의 접경지대인 장가구의 앤더슨 마이어라는 미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김규식(金奎植)을 추천했고,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모두 찬성했다. 미국 로노크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한 뒤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은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할 때 배웅해준 당사자이기도 했다. 당원들은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에 입당시키고 이사장 자리를 주기로 했다.

 

  조선대표의 여비 문제는 장덕수가 국내에 들어가 자금을 얻고, 상해는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보기로 했다. 상해 교포들의 성금이 1천 원가량 모였고, 부산에 들어갔던 장덕수가 그곳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로부터 3천 원의 성금을 얻어 돌아왔으며, 김규식이 사재 2천 원을 마련해 가지고 상해로 내려왔다.

 

  그후 파리로 떠날 김규식의 여권을 알선해준 것도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1917년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19)의 진한명(陳漢明) 기자가 소개하여 손문을 처음 만났으나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었다. 두 번째로 손문을 만난 것은 그가 YMCA활동을 통해 가까이 지내던 중국 언론인 서겸(徐謙)을 통해서였다. 북경정부의 사법부 차장까지 역임한 서겸도 여운형의 기독교계 인맥 중의 하나였다. 그를 통해 다시 만난 손문은 여운형을 정중히 대접해주었고,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조선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손문은 뒤에 국민당 정부의 외교부장을 역임하게 되는 중국 핵심 외교관들인 진우인(陳友仁)과 오조추(俉朝枢)를 소개해주며 파리에 가서 김규식과 동심활동(同心活動)할 것을 당부하고, 김규식이 사용할 중국 여권까지 만들어주었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강화회의 때문에 프랑스로 가는 배표가 그해 3∼4월분까지 전부 매진되자 활동적인 여운형이 다시 나서 손문의 광동정부 대표단 불어 통역인 정육수(鄭毓秀)를 통해 배표를 입수할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여운형과 김규식, 그리고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으로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는 회고했다.

 

“내가 떠나가기는 가되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반도는 쌀알 만큼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란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를 않았다. 내가 만일 정식대표라면 회의석상에 좌석이 있고 발언권이 있겠지만 나는 방청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 독립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20)

 

  이 같은 김규식의 제안에 따라 여운형 이하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각처에 들어가서 궐기를 촉구하기로 했다.

 

  5) 만주·연해주와 여운형

  여운형이 만주를 향해 상해를 출발한 것은 1919년 1월 20∼27일경이었다.21) 그가 국내로 가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로 간 것은 그때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조선인은 모두 1백 수십만 명에 달했다.

 

  여운형은 우선 북경에 들러 천주교 발행의 중국어 일간지 <익세보(益世報)>의 주필 서겸을 만나 신한청년당의 거사에 대해 말하고,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 사본을 전달했다. 진정서의 말미에 서명한 이름들(鮮于復, 吉天輔)은 여운형이 신변안전을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는데, 이 진정서가 <익세보>에 전재된 것은 여운형이 그곳을 떠난 지 20여일이 지난 2월 18일자였다.

 

  그는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있었으나 만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경들의 취체가 심했다. 형사들의 눈을 피해 장춘에 도착하자 그는 심영구(沈永求)의 집에 묵으면서 그 무렵 길림에 있는 족숙 여준(呂準)에게 보내는 편지를 은밀히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운형은 편지에서 자신이 세운 신한청년당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이제 조국 독립의 호기가 찾아왔으니 열강들이 주목할 만큼 전 민족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22) 

 

  또 그는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소왕령)로 가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박은식(朴殷植)․문창범(文昌範)․조완구(趙琓九)를 만나 이 사실을 알리고 지금이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다들 기뻐하면서 일부는 장차 상해로 가겠다고 답했다. 여운형은 이동녕(李東寧)․원세훈(元世勳),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복(李升復) 형제를 만나 사정을 알리고 다시 인근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는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신한촌(新韓村)이 있었다. 여운형은 그곳 한인거류민단장 채성하(蔡成河)의 집에 머물며 강우규(姜宇奎) 등 그곳 동포들23)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침 등을 협의하면서 그곳 대표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것을 권고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하고 연설했다. 그의 말은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단호한 행동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그들은 러시아에 살던 동포들의 협의체인 전로한족회(全露韓族会)를 임시 국민의회로 개편하면서 여기서 전로한족회의 간부였던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파리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여운형은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한 달가량 체류했는데, 그 이유는 그곳 동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독립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여운형의 강연과 호소는 동포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그의 이름이 동포들에게 뚜렷이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이 간도 쪽에도 연락이 되어 그곳 한인 자치기구 간민회(墾民会)를 세운 김약연(金躍然) 목사와 총무 정재면(鄭載冕) 목사 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여운형은 동포들로부터 볼셰비키 혁명군에 맞서는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미국·영국·캐나다 등의 다국적 연합군이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3월 7일경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그는 귀로에 그 연합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다국적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체코 출신의 카이더 장군이었다. 여운형은 그를 만나 약소민족 해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조선도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이번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고 말했다. 독일이나 러시아 등 강대국의 그늘에 가려 오금을 펴지 못해온 체코의 카이더 장군은 같은 약소민족의 처지에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음인지 여운형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여운형이 감시가 심하다면서 귀로의 보호를 요청했더니 카이더 장군은 쾌히 승낙했다. 그는 카이더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미국 파견군에 설치된 도서관의 관장이 바로 자기가 금릉대학을 다닐 때 영어를 가르치던 클레멘트 교수라는 것을 알고는 그날 밤 한일합방 후 일본이 얼마나 악독한 정책을 써왔는가를 지적하고 다시 조선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적은 선전문을 영문으로 작성한 다음, 그 영어 문안을 클레멘트 관장에게 수정받았다. 그리고 이를 유인물로 프린트하여 미국·영국·캐나다의 군사령부를 차례로 찾아다니며 전단지를 배포했다.

 

  다음날 여운형은 카이더 사령관이 붙여준 조세프 한츠 부관을 따라 기차역으로 가서 군용 열차를 탔고, 3월 10일경 하얼빈에 도착한 뒤 카이더 사령관이 소개장을 써준 미군 의사 집에 유숙했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다음날부터는 잠자리를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여관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아편 밀매상을 하는 동포 한명성(韓明星)으로부터 고국의 거족적인 3.1운동을 전해 들었다.

 

3월 6∼7일경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후, 하얼빈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체재하던 중 아편 밀매자인 한명성을 만났다. 그때 조선에서 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나 들썩거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보다 자세한 얘기는 다시 장춘에 와서 1박할 때 위혜림(偉惠林)이라는 자가 해주었는데, 그는 수만 명이 조선 내에서 소동을 일으켜 철도도 경계가 엄중하다고 했다. 나는 봉천에는 들리지도 않고 만세사건의 동기와 그 시비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급히 상해로 갔다. 24)

 

  그가 만주·연해주를 방문한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5만 엔의 독립성금을 모금했다. 둘째, 그가 상해로 돌아온 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이 알려지자 만주의 동포들이 3월 13일 용정촌에서, 연해주의 동포들이 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벌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그곳에 갔던 여운형이 동포들에게 강연을 하고 설득한 결과이기도 했다.

 

  셋째, 3.1운동을 전후하여 북간도에서는 국민군회·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서로군정서·대한의용군·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고, 1920년에는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이들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가 바로 시베리아에 파병되어 있던 다국적 연합군이 철수하면서 헐값으로 팔고 간 무기였다. 그들 다국적 연합군의 총사령관 카이더 장군이 조선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여운형이었다. 카이더 장군은 귀국하는 길에 상해에 들렀는데 그때 여운형이 상해임정의 외교위원장으로서 감사패를 증정한 것25)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헐값으로 무기를 매각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6) 2.8독립선언과 신한청년당

  여운형이 아직 만주에 있을 때인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는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 선언문이 나오게 된 배경도 여운형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약 6백여 명에 달하는 동경유학생들이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18년 1월 종전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였다고도 할 수 있으나, 정작 그들을 고무시킨 것은 그해 12월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간하던 영자신문에 실린 일련의 조선독립에 관한 기사들과 <아사히신문>에 실린 기사였다.26)

 

  이 같은 일련의 보도에 자극받은 동경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 망년회, 12월 30일 웅변대회를 통해 독립의지를 다졌고, 1919년 1월 6일 다시 동경 간다에 있는 조선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고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한 뒤 그 운동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등 10명27)을 선출했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를 일본정부와 각국 대사·공사 그리고 일본 국회에 보내기로 결의하고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회원 약 2백 명을 모아 실행위원의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으며,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에서 온 이광수와 김철수를 새로 추가한 11명의 실행위원이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동경유학생들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이던 최팔용(崔八鏞)을 중심으로 한 실행위원들이 갖고 있던 계획에 따라 2.8선언문을 기초하게 된 것은 당대의 저명한 소설가 이광수였는데, 그는 전해부터 2개월에 걸쳐 중국에 머물다가 서울행 기차를 타고 북경을 떠난 것이 1919년 1월 10일 오후 8시 반이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후 중앙학교 교감 현상윤(玄相允)을 만난 뒤 현해탄을 건너 다시 기차로 동경에 왔다는 기록28)이 있으므로 이광수가 실행위원에 추가된 것은 물리적으로 적어도 1월 18일 이후였을 것이고, 백관수·김도연과 함께 선언문 기초위원에 위촉된 것도 1월 18일 이후였을 것이다. 그가 동경에 다시 온 것은 중국에서 입수한 세계정세와 독립을 향한 해외동포들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는데, 사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 파견에 관한 운동을 북경회의에서 비밀리에 논의했다는 일본 문서29)가 있다.

 

  강덕상 교수는 이 비밀회의를 주최한 단체가 신아동제회 또는 신한청년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30),  당시 여운형이나 그밖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상해를 떠났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신한청년당이 그 비밀회의에 관계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무렵 여운형은 장가구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불러오기 위해 인편을 보냈을 것이므로 그 인편이 북경을 경유하는 길에 이광수를 만났을 수는 있었겠지만 가능성은 적다.

 

  왜냐하면 1월 28일 일본에 건너온 장덕수(張德秀)가 2월 3일 동경에 도착한 뒤 <학지광>의 편집장 최팔용을 만났는데, 최팔용은 그때까지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팔용은 장덕수에게 동경유학생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장덕수를 대표로 파견하자는 의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장덕수는 신한청년당이 이미 김규식을 파리에 파송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왜 그가 적격인가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31) 이로써 최팔용과 같이 실행위원이었던 이광수는 일본에 도착할 당시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었다는 점이 입증된다.

 

  최팔용을 비롯한 2.8독립선언의 주역들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여운형이 일본에 파견한 장덕수였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당사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경유학생들의 행동을 촉구한 또 다른 채널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었다. 형의 연락을 받은 여운홍은 1919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1월 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으며, 2월 1일 동경에 들어가 일본에 유학중이던 사촌 여운일(呂運一)을 만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 최팔용 등 많은 유학생들을 만나 해외정세를 전하며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자 최팔용은 그에게 “우리 동경유학생들도 곧 모종의 행동을 취한다”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32)

 

  2월 6일, 최팔용은 일어로 번역한 독립선언문을 동경 시바구 고야마마찌에 있는 이토오(伊藤)인쇄소에서 1천부를 인쇄했고, 영문본과 국문본은 7일 밤 김의술의 집에서 타자를 치고 가리방을 긁어 등사판으로 밀어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8일 아침 각국 대사관·일본 정부·국회·조선총독부 및 각 신문사 등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2시 4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모인 간다의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날 그들은 독립실행방법 등을 토의하려 했으나 니시간다경찰서의 개입으로 강제 해산되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2.8독립선언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조선대표 파리파견의 소식이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하다. 첫째는 2.8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이 바짝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장덕수를 만나 김규식 파견소식을 들은 직후부터였고, 둘째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궐기를 촉구했던 점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이광수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그가 2.8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중국으로 다시 갈 때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1919년 1월 31일 고베항에서 탄 고쿠라마루(小倉丸)의 행선지는 여운형의 활동지인 상해였고, 상해에 도착해서는 신한청년당 당원들인 김철·한송계·한진교 등을 만났을 뿐 아니라 한진교의 하숙집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3)

 

  7) 3.1운동을 촉발시킨 신한청년당 당원들

  최팔용과 실행위원 10명은 2.8행사 직전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로 밀파했다. 그들은 완성된 선언문 초안을 국내로 반입하여 필사한 뒤 중앙학교의 교감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宋鎭禹) 등에게 전달했다. 보성학교 출신의 현상윤은 이를 보성학교 교장 최린(崔麟)에게 전달했고, 천도교 신자인 최린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에게 이를 전달했다. 동경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손병희는 “외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처럼 활약하고 있다면 우리도 호응해야지”34)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송계백과 최근우가 전한 2.8독립선언문과 운동소식이 국내에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3.1운동의 불을 당긴 전부는 아니었다. 조선대표의 파리 파견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민중궐기를 촉구한 보다 조직적인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 파견된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백남규·한송계 등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것은 선우혁의 활동이었다. 그는 1월 25일경 상해를 떠나 2월 초에 선천에 도착하여 정주→평양을 돌며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그가 만난 이승훈 장로와 양전백·길선주 목사는 1917년 여름 여운형이 만나 세계정세를 전한 바로 그 장로교의 실력자들로서 사실상 기독교계를 3.1운동에 참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선우혁은 이들에게 “민족자결의 목소리가.....지금 세계적 풍조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우리 조선민족도 독립운동을 꾀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조선인이 일본지배에 불복의사를 세계에 표해야 한다”35)고 역설했다. 그가 귀국해서 만난 인물은 기독교의 유력자들인 강규찬·김동원·김성탁·도인권·변인서·안세항·윤성도·이덕환 등이었다.36) 당시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던 단체는 사실상 전국 각처에 교회를 갖고 있는 기독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3.1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의 전국 유포 등 기독교의 참여는 매우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김철은 천도교 본부를 방문하여 조선대표를 파리에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천도교로부터 운동자금 3만 엔의 송금을 약속받은 뒤 상해로 돌아갔다.37)

 

  서병호는 2월 20일경 서울에 도착했으며, 기독교가 경영에 관여하는 경성역 앞의 세브란스병원에 머물다가 2월 25일경 부모의 병문안을 위해 본적지로 향했고 동정을 살피다가 3월 7일 고향을 출발했다.

38)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2월 중순경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부산에서 백신영(白信永),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조선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녀도 3·1운동에 동참하고 싶어 했으나, 함태영이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평양을 거쳐서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만주로 망명했다.39)

 

  장덕수는 2월 17일 동경을 떠나 2월 20일 경성에 돌아온 뒤 “이상재를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와 청년 동지들을 만나서 상해와 동경의 사정을 전해주”40)었는데, 신한청년당의 핵심 당원이었던 그의 말은 지도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이후 뒤쫓는 형사들을 피해 인천에 잠복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들 신한청년당 당원들과는 별도로 동경 YMCA회관에 참석하여 2.8독립선언서의 발표 현장을 지켜본 여운홍은 2월 14일 우에노공원에서 만난 장덕수로부터 형의 편지를 전달받고, 거기에 지시된 대로 귀국후 이상재·최남선(崔南善)·함태영·이갑성(李甲成) 등을 만나 궐기를 촉구했는데, 그 인맥은 장덕수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과 중복된다.

 

  한편, 상해에서 파견된 선우혁의 권유를 받아들인 장로교 실력자 이승훈은 동지들과 협의하여 단독으로 궐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최린 등 천도교 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한 것이 2월 11일이었다.

그는 송진우·신익희(申翼熙)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운동을 통합하는데 찬성하고 이튿날 선천·정주로 돌아가서 기독교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2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났으나 태도가 분명치 않아 의혹을 품고 있던 차 중앙기독교청년회의 간사 박희도(朴熙道)를 만났다. 이승훈은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 등과 협의했고, 다시 함태영의 집에서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인 이갑성 등과 회합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아왔고 함께 최린의 집을 찾아가 협의한 끝에 민족행동을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이승훈은 천도교측으로부터 기독교측의 거사준비를 위한 자금으로 5천 엔을 받고, 이날 밤 세브란스병원 안의 이갑성 숙소에서 10여명의 기독교 간부들과 의논한 결과 24일 천도교측에 통고함으로써 마침내 기독교와 천도교의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어 불교계도 가담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인선작업이 시작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2월 25일부터 3일간 손병희를 비롯한 15명41)이 서명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2월 26일 한강 인도교에서 이승훈·양전박·박희도 등이 모여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고 이승훈 이하 16명이 서명했다. 여기에 불교 측의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스님이 참가하여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었다.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2월 11일 문안을 완성했다. 그리고 2월 20일부터 인쇄하기 시작하여 2월 27일 밤까지 천도교 경영의 인쇄소(보성사)에서 3만 5천매를 인쇄하여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에 전달했다. 당시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은 학교와 교회, 그리고 병원뿐이었으므로 이 선언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일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던 기독교계가 주로 담당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 했으나, 국장일의 거사는 불경(不敬)이라 하여 최종 회합에서 3월 1일로 일정을 변경했고, 마침내 3월 1일 정오를 기해 거족적인 3.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처음 이 시위운동은 서울 파고다 공원과 기독교 신자가 많던 이북지역의 평양·선천·진남포·안주·의주·원산 등 6개지에서 일어났고, 이어 다음날인 3월 2일 역시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이북지역에서 일어났으며, 이남지역에서는 충남 예산에서만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국장일이라 하루 쉬었으며, 3월 4일에는 전라도 옥구, 3월 8일에는 대구, 3월 10일에는 전라도 광주 등 전국으로 번졌고, 3월 10일 이후에는 만주·미주·중국·일본 등 해외로도 확산되었다.

 

  3.1운동 이후 3개월간 전국의 만세 시위운동을 보면 집회 횟수가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4만 6,948명, 소각당한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나 되었다.42)

 

  거족적인 3.1운동은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꾸었고, 대외적으로는 임시정부의 탄생·해외 무장독립운동을 촉진시킴과 더불어 중국 5·4운동의 불씨를 당겼으며, 멀리는 인도의 제1차 사티야그라하 운동·터키의 민족운동·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그 불씨가 여운형의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소식과 그 소식을 각처에 조직적으로 알리고 궐기를 촉구한 여운형 형제와 신한청년당 당원들의 노력으로 지펴졌다는 점은 앞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8) 임시정부와 여운형

  3.1운동 후 조선으로 파견되었던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김철과는 별도로 본국에서 현순(玄楯)․손정도(孫貞道)․신익희(申翼熙)․최창식(崔昌植)이, 일본에서 이광수․최근우가, 항주에서 신규식(申圭植), 시베리아와 화북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신채호(申采浩)․김동삼(金東三) 등 30여명이 각처에서 상해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그때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만주나 연해주로 가지 않고 상해로 온 것은 여운형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한 곳이 바로 상해였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각처의 독립지사들에게 상해로 올 것을 권유한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한편 동생인 여운홍도 조선을 경유하여 상해로 왔다.

 

  상해의 터줏대감 격인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원들과 함께 이들을 성심껏 접대하면서 자신의 거처가 있는 하비로 부근의 보창로(寶昌路) 329번지에 독립 임시사무실을 개설하고, 그들에게 들은 각처의 독립운동 현황을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 알리는 한편 파리의 김규식 앞으로도 이 같은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는 거류민단의 기관지였던 <우리들의 소식>을 발간한 경험을 살려 등사판으로 긁은 <독립신보> 43)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의 상황을 타자로 찍은 영문판도 발행하여 각 신문사와 외국인들에게 배포했다. 3.1운동 후 조선을 빠져나온 지사나 선교사 또는 외국인을 통해 얻은 전단이나 목격담, 경험담을 담은 이러한 영문판 소식지는 당시 중국에 진출해 있던 <뉴욕타임즈> <뉴욕이브닝 저널> 등의 미국 신문과 <차이나 프레스> <페킹 데일리뉴스> 등 영자 신문들에 자극을 주어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폭포처럼 쏟아내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해 4월 10일 오전 10시.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 있는 한 외국인 가옥에서 독립지사들의 회의가 열렸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모든 것을 준비한 가운데 이날 회의에 참가한 대표 인원은 모두 29명44)이었는데, 이중 참가한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여운형을 포함하여 5명, 당원은 아니지만 우호세력으로는 동생 여운홍 등 3명이었다.45) 여운형은 이 회의가 각처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일종의 독립운동기관을 만드는 회의로 알고 참석했으나, 조소앙은 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하자고 동의했고 신석우가 재청하여 안이 가결되었다.

 

  이어 의정원 간부 선출이 진행되어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엔 손정도, 서기엔 이광수·백남칠(白南七)이 선출되었다. 이윽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제를 내놓자 여운형은 정부에는 주권·국토·인민을 요하는데 그것이 결해 있고, 정부를 세우면 체면유지비가 많이 들어갈 뿐 아니라 그 명의가 태중하여 운영도 곤란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한다면 모르되 그렇지도 않은 바에야 이름뿐인 임시정부를 세우면 오히려 일본의 경계심만 자극할 것이며, 그렇다고 금차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날로 욱일승천하고 있는 일본이 하루 이틀에 망한다는 전망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파리에 간 김규식으로부터 온 편지에 따르면 열강의 승인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모인 지사들은 여운형의 현실론을 반박하며 “조선은 정부를 잃고 민심이 유리된 지 10년이나 되었으니 먼저 민심을 잡는 것이 가장 급하다”면서 거수표결에 부쳐 정부 설립안을 통과시켰다.

 

  여운형은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구한국의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명시하자는 의견에 대해 아무리 위협과 압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나라를 영원토록 명치 천황에게 봉헌한다’는 말을 조칙문에 명기한 것은 국가와 백성에 대한 범죄이며, 한일합병후 황실 근친자인 전주 이씨들은 돈과 작위를 받아 잘 살고 있으니 어찌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을 수 있는가고 반대의사를 밝혔으나, 이 문제 또한 표결에 부쳐져 부결되고 말았다.

 

  회의 마지막에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구에서 여운형은 외무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동시에 내무부 위원장에는 조완구, 재무부 위원장에는 김철이 선출되었다. 여운형은 이를 수락하고 임시정부의 업무에 임했다.

 

나는 외무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랑스 영사 윌당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말을 설명하고 양해를 얻어 보호를 의뢰함과 동시에 프랑스 정부에도 그 뜻을 타전하였고, 중국의 <신문보> <신보> <민국일보> <시보>와 영자 신문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차이나 프레스> <상하이 타임즈> 등에 조선의 독립운동 상황을 게재하여 세계 각국의 이목을 끌고 성원을 얻기에 노력했으며, 내무부는 주로 국내와의 연락을 취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재무부는 오로지 독립운동의 자금모집에 힘썼다.46)

 

  그러나 여운형과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해 5월 중순경 미국에서 상해로 온 안창호(安昌浩)가 종래의 위원장 제도를 대신할 관제개혁을 제창하고 의정원 의원들이 찬성하여 그해 6월 하순경 관제 개혁이 단행되었는데, 그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임명하고, 각 부서 중 외무부 총장에 박용만, 외무부 차장에 여운형을 임명했다.47)

 

  외무위원장이던 여운형은 외무부 차장으로 격하된 것이었다. 물론 외무부 총장에 임명된 박용만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사실상 외무부의 대표권은 여전히 그에게 있었지만, 여운형은 이 관제개편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게 된다. 종래의 위원장제를 폐지하고 이렇게 조각까지 하게 되면 이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 형태가 된 것인데, 현실은 땅도 없고 백성도 없고 주권도 없는 이름뿐인 정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관제가 개편되던 날 의정원 모임에 나가지도 않았다.


 

원래 나는 임시정부의 조직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부 따위는 만들지 않더라도 어떤 단체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게 되는 한편 관제의 기안에 대해서도 대통령 이하 7등까지 여러 가지 규정이 정해져 있기에 복잡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해서 반대했다. 그래서 의정원 모임을 개회할 때 일주일 내로 출석하지 않으면 제명당하게 되어 있는데, 나는 출석하지 않아 제명을 당해 의원 자격이 없기에 뭐라고 할 만한 특별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48)

 

  그는 이때부터 임정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한다. 임정이 조직되는 과정에서 모든 뒷바라지를 했고 <신한청년>이라는 기관지까지 발행하면서 당원을 50명까지 확장했던 신한청년당의 모든 시설과 집기물을 다 임정에 바친 후 자진해산했는데(1922년), 이에 대해 상해임정 수립에 참여했던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는 “임정과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는 회장과 사무를 마련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지도자를 여러 번 초청하여 시국수습을 요청하는 인사를 한 뒤 신한청년당은 자진소멸했는데 이것은 아마 운동사상 희한한 전례일 것이다”49)라고 평했다. 자리나 권력이나 물욕에 담백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독립운동의 방법론상 감투싸움과 파벌싸움에 치중하는 임시정부보다는 실질적인 대외 독립운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9)프랑스 조계의 안정성

  이에 앞서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그 사실이 외부에 공표되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었다. 그렇지 않아도 3.1운동으로 골치가 아픈 터에 임시정부까지 세워졌으니 ‘돼먹지 않은 조선인(不逞鮮人)’들을 모조리 검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이에 따라 일본 경시청에서는 특고내선과의 이우명(李愚明) 경부, 조선총독부 경찰부에서는 황옥(黃鈺) 경시, 한경순(韓敬順) 경부 등 민완형사들을 상해로 파견하여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과 협조하여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구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만든 사람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프랑스 조계지여서 일본 경찰이 노골적으로 사찰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들은 밀정을 고용, 청년회나 청년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정보를 입수했다. 밀정들이 작성한 ‘준동하는 임시정부의 요인’ 22명의 명단50)에는 여운형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1919년 5월 초, 조선총독부는 이들 22명을 전원 검거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오카모토(岡本) 경시․선우갑(鮮于甲) 경부 등을 급파하여 일본 상해총영사관 경찰부의 니이사카(新坂) 경부 등과 공조토록 했다. 마침내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일본 총영사가 앙리 A. 윌당 프랑스 총영사를 만나 “귀 조계 안에서 활동하는 조선 가정부 요인 22명의 체포를 용인해주면 우리는 귀국이 잡고 싶어 하는 재일 베트남 독립운동가 콩데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운형과 친분을 맺은 윌당 총영사는 난색을 표하면서 “22명 대 1명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했다. 일본 측은 22명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숫자를 줄여 재교섭에 임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5.4운동이 터져 협상이 지연되었다. 5월 13일 아리요시 총영사는 다시 윌당 총영사를 만나 지난번의 22명 대신 여운형․이시영․손정도의 3명만 체포하는 것을 묵인해주도록 요구했다. 날조한 죄목은 여운형의 경우 사기협박죄, 이시영의 경우 강도․협박교사죄, 손정도의 경우 사기취재죄였다. 이때 윌당 총영사가 보인 반응에 대해 아리요시 총영사는 일본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프랑스 총영사는 그들이 정치범이고 때마침 일본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이 현저하며, 그들이 중국인과 연락하고 있는 사정 등을 고려하여 다수 조선인의 처분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훈령을 얻은 뒤에 착수하겠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이렇게 해서는 체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으나 프랑스 총영사의 우려도 일단 타당하다고 보았다. 51)

 

  일본 외무성은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권유했으나 마음이 급한 조선총독부는 5월 14일 오카모토 경시․선우갑 경부․니이사카 경부 등을 시켜 프랑스 조계 보창로 어양리 11번지의 여운형 숙소를 급습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앙리 A. 윌당 프랑스 총영사가 은밀히 보낸 사람의 귀띔을 듣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기습했는데 한 명도 잡지 못하게 되자 화가 치민 오카모토 등은 수색에 걸린 신석우와 윤원삼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다음날인 5월 15일 조선으로 이송시켰다. 이에 여운형은 즉각 임시정부 파리대표부의 김규식에게 연락을 취했다. 김규식은 곧 ‘국사범에 대한 국제법 위반’이란 항의서를 제출했고, 이를 받은 프랑스 외무성으로부터 신중히 조사해보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여운형은 또 프랑스인 고문 변호사를 통해 이를 규탄하도록 했고, <차이나프레스>, <상하이가제트> 등의 영자지에 일본 경찰이 영장도 없이 자의적으로 정치범을 사기 강도죄의 명목으로 체포하여 이송했다는 비판적 기사를 싣도록 자료를 제공했다. 여론을 들쑤신 효과가 나타났다.

 

  5월 20일,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은 공사대리 모그라 서기관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본건의 조선인은 사실상 정치범인데, 상해에서는 대대적인 물의를 일으킨 일본의 행동을 비방하고 있다”면서 일본 공사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어 상해 주재 프랑스 영사관은 앞으로 일본의 체포 교섭에는 임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프랑스 측이 이런 방침을 정하게 된 것은 중국의 5.4운동이 조선의 3.1운동에 자극받아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현재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한껏 고조된 시점에 조선인이 구속되는 것을 방치하면 어떤 예기치 못한 변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측은 단순 형사범 체포에도 증서작성을 일체 거부함으로써 일본 측의 활동에 커다란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독립지사들에게 프랑스조계라는 안전지대가 확보되었던 것인데, 이 안전지대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운형이 외무위원장으로서 활약한 외교활동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프랑스 조계의 상대적 안정성 확보를 계기로 삼아 정치력을 모으는데 주력했다. 각처의 독립지사들이 상해임정으로 다시 결집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여운형이 확보한 프랑스 조계의 안정성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10) 일본 정부의 초청

  3.1운동이 일어난 후 하라 다카시(原敬) 일본 수상은 그 후유증 때문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거족적인 3.1운동은 조선 내외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와 일본 정부로서도 무슨 근본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반발이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인을 달랠 ‘문화정치’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일본 조야의 분위기였다.

 

  거기다 조선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일제히 일본에 건너가 하라 수상을 예방하고 거족적인 항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총독부의 학정이 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하자, 크게 부담을 느낀 하라 수상은 어느 날 척식국 장관 고가 렌조오(古賀廉造)를 불러 조선에 자치운동을 벌일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알아보라고 했다. 고가 장관은 이 문제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에게 의뢰했다.

 

  총독부는 1919년 2월 20일 기무라 겐지(木村謙二)라는 변명을 사용하여 입국, 인천에서 검거된 장덕수(張德秀)를 통해 신한청년당의 지도자 여운형이 3.1운동의 촉발에 주도적인 막후 역할을 했음을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다.52) 이 점이 일본정부가 수많은 조선의 원로 지도자들 대신에 당년 34세의 새파란 청년운동가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빙하게 되었던 근본원인이다. 물론 3.1운동의 주동세력을 천도교·기독교·청년학생이라 파악하고 있던 일제는 이 점을 반영하여 임정 내무차장인 현순(玄楯) 목사를 회유대상으로 고려하기도 했다.53) 또 총독부가 여운형을 회유하기로 방침을 정한 이유를 조금 다르게 분석한 중의원 의원 야마미치 죠오이치(山道襄一)의 발언내용도 있다.

 

작년에 장덕수를 폭동 관계자로 취조했을 때 상해․동경․경성 사이의 연락을 누가 맡았는지 피의자에게 탐정을 붙여 조사해서 자백을 받아냈다. 그 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면서 상해의 소위 임시정부 내각이 교체되었는데, 당시 외무총장이던 여운형이 외무차장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여운형이 임시정부에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염증을 낼지 모른다는 장덕수의 말에 따라 여운형을 끌어들이기로 했다.54)

 

  하지만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해야 하는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역시 3.1운동의 막후였던 여운형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는데, 이 점은 아이로니칼하게도 26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총독부가 치안권을 맡기는 대상자로 여운형을 선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때도 민중에 대한 여운형의 지도력이 감안되었던 것이다.

 

  총독부에서 여운형을 회유한다는 냄새를 맡고 기밀비를 타내기 위해 달려든 앞잡이들은 조합교회의 와타세 쓰네기치(渡瀨常吉) 목사와 무라카미 다다키치(村上唯吉) 목사였다. 와타세가 조선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무라카미는 상해로 건너가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난 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입국할 수 없는 망명자다. 총독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여러분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55)고 연막을 치고, 상해에서 수년 동안 YMCA활동을 하면서 여운형과 친분이 있던 후지타 규우코오(藤田九皐) 목사를 공작책임자로 포섭하여 <협화서국>의 사장 피치 박사의 둘째아들 비오생(費吾生)과 함께 6월 22일 일요일날 북경로 제18호에 있는 한인예배당으로 여운형을 찾아갔다.

 

  당시 여운형은 상해 동포 7백 명 가운데 조선인 신도 170명이 참석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아이와 노약자를 빼놓으면 거의 3분의 1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여운형이 인도하는 주일예배에 다닌다는 것을 확인한 무라카미는 그해 6월 30일 일본으로 돌아가 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는 길은 외부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와해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진언했다.

 

  일본정부로부터 공작금을 타낸 무라카미는 7월 다시 상해로 돌아와 후지타 목사와 후루야 마고타로오(古屋孫太郞) 목사를 앞세웠고, 후루야는 상해YMCA의 비오생 총무를 움직여 여운형을 설득했다. 여운형이 응하지 않자 후지타는 다시 상해 일본인YMCA 총무 기무라 기요마쓰(木村淸松) 목사를 시켜 “일본 정부가 조선의 민족문제를 상담하고자 당신을 초청하는 것이니 응하라”고 설득케 했다. 여운형이 아무 신변보증도 없이 응할 수는 없다고 하자, 다음날 고가 척식장관으로부터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보증하겠다는 전보가 왔다. 또한 야마사키 게이이치(山崎馨一) 신임 일본 총영사가 프랑스 윌당 총영사를 통해 같은 의견을 전해 왔다.

 

  여운형은 고민하다가 손문을 찾아가서 상의했더니 그는 “가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라”고 권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기무라 목사, 후지타 규우코오(藤田九皐) 일본기독교교육청년회 총무, 조설경(曺雪庚) 중국기독교청년회 총무,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그리고 서양 신문기자 3명 등과 상의한 뒤 일본에 갈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그의 동경행에 대해 임정 안팎에서 분분한 물의가 일고 심지어는 “매국노를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극언까지 해대며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왜놈들이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도 아닌즉 교섭할 필요가 없다”며 임정 포고령 1호를 발동하여 금지령을 내렸다. 또 신채호나 한위건 같은 강경파들은 원수와 무슨 대화를 하느냐고 반대했으나, 이광수나 윤현진(尹顯振) 등은 적극 찬성했다. 특히 임정 실력자의 한 사람이던 안창호는 “적을 알아야 하니까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노잣돈 3백 원까지 마련해주었다.

 

  일본행을 굳히자 여운형은 전남 하의도에 유배중인 장덕수를 통역으로 해야겠으니 그를 석방해주는 조건이라면 가는 것을 승낙하겠다고 일본 영사관에 통고했다.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같이 거사했던 장덕수에 대한 우정과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좋다는 답이 오자 여운형은 임시정부가 일종의 감시역으로 붙인 최근우와 승려 신상완(申尙玩)을 대동하고 그해 11월 14일 아침 상해 부두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우편선 가스가마루에 몸을 실었다.

 

  11) 적의 심장부에서 외친 조선독립

  동경에 도착한 여운형은 고가 척식국 장관과 6회, 다나카 육군 장관과 2회, 미즈노 정무총감과 1회, 노다 체신 장관과 1회 면담했다. 일본 고위관리들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조선의 자치운동을 여운형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다른 회사와 합병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듯 일한합병 또한 그런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고가의 논리에 대해 “하필왈리(何必曰利)잇고 역유인의이이의(亦有仁義而已矣)리이다(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는가, 또한 인의가 있을 뿐이다)”56)라는 <맹자>의 일절을 인용하면서 “회사는 모리를 위해 성립한 것이지만.....국가는 사회의 실체요 역사의 장성(長成)이며 도덕의 존재요 사법의 실체이니 개인은 죽음이 있지만 국가는 영속하는 것인즉”57) 국가를 위해 이익을 희생시키는 애국이라는 의(義)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맞섰다.

 

  또 다나카 육군장관이 “우리 제국 군대는 조선인 2천만을 다 도륙할 만한 실력이 있다”고 협박하자, 여운형은 “삼군가탈수야(三軍可奪帥也)어니와 필부불가탈지야(匹夫不可奪志也)니라(삼군의 장수를 앗을 수는 있어도 필부의 뜻은 앗을 수 없다)”58)는 <논어>의 일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앗을 수는 있어도 조선독립의 의지는 앗을 수 없다고 기지와 담력으로 맞섰다. 동양적 논리의 경전인 <논어>와 <맹자> 등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그가 보인 확고한 신념과 조리 있는 논리, 뛰어난 언변은 일본 고관들을 압도했다. 동행한 최근우를 통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연재된 당시 여운형의 발언내용59)은 그의 단련된 독립사상의 높이를 볼 수 있게 한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여운형은 제국호텔에서 내외의 신문기자·통신사기자·교회관계자·교수·학생 등 홀에 가득 찬 각계 인사 5백 명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6척의 키에 강인한 체구를 지닌 여운형이 단상에 오르자 청중들은 그의 풍채와 뛰어난 용모에 압도되었다. 입을 연 그는 조선이 왜 독립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역설한 뒤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따라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이제 한민족은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60)

 

  장덕수의 명 통역을 통해 불을 뿜는 듯한 그의 사자후 연설이 끝나자 모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여운형은 조선어로 연설했고, 장덕수가 이를 일본어로 통역했으며, 이어 서양기자들의 자유질문에 여운형이 영어로 직접 대답했는데, 연설과 질의응답에 소요된 시간은 1시간 반가량이었다. 연설 내용 가운데는 일본정부가 그를 회유시키고자 했던 자치운동이나 참정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가 상해를 출발할 때 주변에 언급했던 자주독립과 즉시독립의 생각은 조금도 변절되거나 굴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날 여운형이 연설한 내용이 당초 “고가 장관과 교섭하여 만든 원고와 전혀 배치된 연설” 61)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약속을 어겼다며 난리를 피웠는데 여운형 자신은 이에 대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운동이라 해도 음모라든가 난폭한 부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62)면서 당시의 연설은 초안을 만들어 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훗날 행해진 검찰신문에서 답변했다.

 

  여운형에 대한 회유공작이 실패했다고 본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연설이 도하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에 발각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의 상해망명 사건을 터뜨리고 다시 여성독립단 적발사건을 공표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운형의 이날 제국호텔 연설은 <동경아사히신문> <동경일일신문> <오오사카마이니치신문> 등에 비중 있게 실렸으며, 당시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던 영자신문 <더 저팬 어드버타이저>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한편 여운형의 동경 활약상은 최근우를 통해 상해에서 발간되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연설후 모임에서 사회를 본 변호사 미야자키 류우스케(宮崎龍介)는 “여선생의 말과 같이 조선 독립이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조선이 독립함으로써 일본과 조선이 서로 화평할 수 있으니 안심이 된다. 일본인 중에도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달라”고 했고, 저명한 사회주의자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의 선창에 따라 강연장에 참석한 일본인들이 모두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종합 월간지 <태양>의 사장은 “조선 독립에 대한 이론이 참 명쾌했소. 잡지에 싣고 싶으니 글로 써주시오”라고 요청하여 여운형과 장덕수가 뒤에 공동집필한 글을 보냈으나 당국의 방해로 잡지에 게재되지는 못했다.

 

  여운형의 동경 행적은 당대의 사상가로 명망 높던 동경제대 정치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가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이 엿보인다.그 품격에 있어서, 그 식견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63)고 격찬하는 가운데 각 신문과 잡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으며, 문인․학자․사상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대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의회는 하라 수상 이하 관계 장관들을 소환하여 이 문제를 격렬히 추궁했다. 당시 일본 의회는 여운형 규탄장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족원 의원 다카하시 사쿠에(高橋作衛)를 비롯한 5명의 대의원이 14회에 걸쳐 대정부 질문을 벌였고, 하라 수상을 비롯한 7명의 대신이 답변을 하기 위해 12회에 걸쳐 의정단상에 나가야 했다. 세키와 사토루(關和知) 의원은 4회, 사카모토 산노스케(阪本釤之助) 의원은 6회나 질문했고, 하라 수상도 5회에 걸쳐 답변에 나설 정도였다.

 

  당시 <제국의회의사록>은 자기들 정부가 회유해보기 위해 초빙한 식민지의 한 청년 곧 ‘돼먹지 않은 조선인(不逞鮮人)’이 자기들 나라 한복판에 들어와 펼쳐 보인 것이 다름 아닌 항쟁예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 의원들의 정부질타로 가득 차 있다. “탄주지어를 그대로 놓아준 이유가 무엇인가?” 빗발치는 여론을 등에 업고 하라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일본 의원들이 사용한 탄주지어(呑舟之魚)란 일본의 고깃배를 삼킨 물고기 곧 여운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당초 동경행을 반대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많았지만, 그의 방일이야말로 독립운동사 전체 가운데서도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부각시킨 획기적 개가의 하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나서 거둔 첫 대외성과물이기도 했다.

 

  12) 맺는말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터키·이집트의 독립운동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3.1운동의 발발배경에 대해 그동안은 이것이 단지 종교단체와 학생들에 의해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되다가 민족적으로 터지게 된 것인양, 그리고 그들을 움직인 동력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나 2.8독립선언 또는 고종의 독살설 등이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물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설이 추가된 설명도 있기는 했지만,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것은 시차적으로 뒤에 생긴 상해임시정부였다는 식으로 사실을 슬쩍 왜곡함으로써 3.1운동을 촉발시킨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존재를 사실상 은폐시켜왔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이 호도된 것은 해방후 정치적으로 형성된 여운형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편협하고 경직된 좌우의 관점에서만 보던 냉전시대는 지나갔다. 기왕에도 연구자들 사이에는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운동가였다는 점이 알려져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2분법적 분류에 따라 여운형을 좌파 또는 중도좌파로 보는 현실이다. 첨예한 좌우갈등이 시작된 해방직후로부터 그가 암살된 1947년까지의 2년간을 두고 본다면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3.1운동이 발발하던 1919년의 시점에서는 좌우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이제는 해방후 형성된 냉전시대의 편협하고 자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숙하고 객관적인 관찰에 따라 당시 3.1운동을 촉발시킨 당사자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하고 그 사실을 국내와 일본과 만주·연해주에 알려 궐기를 촉구한 여운형이었다는 점을 사실대로 밝힐 때가 되었다. 이미 3.1운동이 발발한 그해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동지였던 장덕수를 체포함으로써 3.1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여운형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는 하라 일본 수상이 허다한 조선의 원로 지도자들을 제치고 당년 34세의 청년운동가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빙한 사실로 입증된다. 또 3.1운동이 발발한 직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종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만주나 연해주로 가지 않고 상해로 몰려간 것은 그들이 당시 여운형의 활동내용과 그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과 그들의 수발을 든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2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밑에서 사후처리를 담당했던 비서관은 엔도오 류우사쿠(遠藤柳作)였다. 그는 3.1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여운형이었던 것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제9대 총독부의 정무총감인 그가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였던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했다. 왜 그는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했던 것일까?

 

  3.1운동의 사후처리를 담당했던 엔도오의 머릿속에는 3.1운동 발발 3개월 만에 전국의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4만 6,948명, 소각당한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나 되었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것이다. 이 같은 혼란이 재연된다면 재조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이 결코 보호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그로 하여금 치안권 이양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고, 그 대상자로 민중 지도력을 갖고 있던 여운형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었다.

 

  해내외를 막론하고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공식적으로 처음 거행한 사람도 여운형이었다. 상해교민단장이었던 그는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높이 올린 중국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상해 동포 7백 명과 함께 올드랭사인 곡의 애국가를 부른 뒤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 민족이 노예가 된지 어언 10년, 앞서 감옥에 갇혀 목숨을 바친 많은 지사들과 2천만 동포가 독립을 선언한지 이미 1주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를 떠난 이래 7년 동안,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중국의 쌍십절인 10월 10일 등 남의 나라 경축식에 참석할 때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국기를 다시 게양하고, 10년 동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애국가를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저 게양대에 높이 올린 저 태극기를 다시 접어 도로 장롱 속에 처박아둘 것입니까? 한번 높이 게양한 깃발은 이제로부터 영원히 빛나게 합시다!” 64)

 

  여운형의 연설은 그곳에 참가한 7백여 동포들의 가슴을 휘저어 놓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우리도 이민족의 압제와 망국의 설움을 털어버릴 민족적 기념일을 갖게 되었다는 자긍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전에는 이렇다 할 민족적 기념일이 없었다. 여운형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민족적인 기념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가슴을 끓게 만들었고, 그리고 높이 게양된 태극기 아래 모두가 하나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식장 전체는 울음바다로 변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연설 말미에 이제는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민족적 기념일을 갖게 되었으니 매년 3.1절 기념식을 갖도록 하자고 제창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3.1운동은 그 시발부터 1주년 기념행사까지 그 막후 연출자 여운형을 빼놓고서는 결코 역사적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몽양 여운형은 2005년 3월 1일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에, 2008년 3월 1일 행정자치부로부터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에 서훈됨으로써 사후 60여년만에 정치적으로 사면복권된 셈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3.1운동을 둘러싼 그의 독립활동에 대해서도 올바른 자리매김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각주-----------

 


1)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논문 각주 26)을 참조할 것.

2) 길선주(吉善宙)·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박동완(朴東完)·박희도(朴熙道)·신석구(申錫九)·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오화영(吳華英)·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昇薰)·이필주(李弼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


3)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병헌(金炳憲)·김좌진(金佐鎭)·김창환(金昌煥)·김태연(金泰淵)·박은식(朴殷植)·여준(呂準)·이동녕(李東寧)·이상재(李商在)·이승훈(李承勳)·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조성환(曺成煥)·주시경(周時經)·최남선(崔南善)·현순(玄楯) 등이 다 그런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4) <여운형신문조서>, 1930년 4월 9일 진술. <몽양여운형전집1>, 한울, 1991(이하 동일).

5)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6) 이수영, <여운형론>, <전선>, 1933년 3월호.

7) 이범석, <나의 교우반세기>, <신동아>, 1970년 12월호.

8) 이상수, <송철회고록>, 로스앤젤리스, 개인출판, 1985;이정식, <몽양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에서 재인용.

9) 김홍일, <나의 교우록-황야의 선각자들>, <월간중앙>, 1971년 1월호.

10) 이상수, 앞의 책.

11) <原敬の一言と呂運亨の態度>, 게재지 미상;姜德相, <呂運亨 評伝2:上海臨時政府>, 新幹社, 東京, 2005에서 재인용.

12) 高警第27096号, <耶蘇敎諸職會ニ於ケル不穩言動>報告, 1918年 9月9日;姜德相, <呂運亨 評伝1:朝鮮三一獨立運動>, 新幹社, 東京, 2002에서 재인용.

13) 여운형, <나의 어머니는 여장부>, <신여성>, 1933년 12월호.

14) 김기석, <남강 이승훈>, 현대교육총서출판, 1964.

15) 이 친목회의 회장은 당년 25세의 신석우(申錫雨)였다. 여운형이 갑부의 아들인 그를 친목회 회장으로 영입한 것이지만 실제 친목회를 이끈 것은 총무 여운형이었다.

16) 여운홍, 앞의 책.

17) 신한청년당의 창당시기에 대해서는 1918년 8월설, 11월설, 1919년 1월설 등이 있으나, 파리강화회의에 진정서를 보내기 위해 터키청년당을 본떠 갑자기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크레인 특사의 환영연이 열린 날(1918년 11월 28일)로부터 하루, 이틀 뒤가 맞다. 당시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던 날짜가 토요일이었으므로 창당일은 11월 30일이다. 또 창당시의 당원수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모체가 되는 최초 인원은 6명설이 맞고, 그후 김규식, 김순애, 손정도, 이광수 등 새로운 인물들이 가담하여 체제가 강화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30명설이 맞는다. 또 3.1운동 이후 신한청년당이 한껏 확대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50명설도 가능하다. 김구(金九)를 위시하여 장붕, 김인전, 도인권, 안정근, 이유필, 최일, 김위택, 이규서, 신창희, 이원익, 양헌, 김병조, 임성업, 조상섭 등도 한때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독립신문>, 1922.3.31). <여운형신문조서>에 보면 여운형은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기 위해 상해에서 청년학생을 교양하고.....나아가 풍속·문화·도덕 등을 일신하려는 목적”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는데, 신한청년당의 강령과 당헌이 성문화된 것은 1920년 1월 또는 2월이었다.

18) Thomas F. Millard, 'Democracy and the Eastern Question:The Problem of the Far East as Demonstrated by the Great War, and Its Relation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Century Co., New York, 1919.

19) 1850년 영국인 Henry Shearman이 상해에 설립한 신문. 통칭 <자림서보(字林西報)> 또는 <자림보(字林報)>라고 불렀다.

20)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21) 여운형 자신은 만주를 향해 상해를 떠난 것이 1919년 1월 20일이라 했고(<여운형신문조서>), 그해 1월 28일 상해를 떠난 장덕수는 자기가 떠나기 1∼2일 전이라 했으니(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여운형이 상해를 출발한 날짜는 1월 20∼27일 경이 된다.

22) 앞의 <여운형신문조서>.

23) 여운형이 그곳에서 만난 동포들은 이동휘(李東輝)부친․김치보(金致甫)․정재관(鄭在寬)․강한택(姜漢澤)․오영선(呉永善)․김구하(金九河)․이강(李剛) 등이었다.

24) 앞의 <여운형신문조서>.

25)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26) 1918년 12월 1일자에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명이 조선의 독립열망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참가키로 되었다’는 짤막한 예고기사가 실렸고, 동 12월 15일자에는 ‘한국, 독립을 선동(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하에 이승만 등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날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자금 30만 엔을 모았다’라는 기사가 실렸고, 1918년 12월 18일자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27) 김도연(金度演)·김상덕(金尙德)·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송계백(宋繼白)·윤창석(尹昌錫)·이종근(李琮根)·전영택(田榮澤)·최근우(崔謹愚)·최팔용(崔八鏞) 등 10인. 뒤에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를 추가하여 11인으로 늘어났다.

28) 이광수, <나의 고백>, 춘추사, 1948.

29) 機密第28号, <在支那特別全權公使(小幡西吉)가 外務大臣 앞으로 보낸 편지>, <要視察朝鮮人李光洙ニ關スル件>, 1919年 2月18日.

30) 강덕상, 앞의 책.

31)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32) 여운홍, 앞의 책.

33) 이광수, 앞의 책.

34) 현상윤, <3.1운동의 회상>, <신천지> 1946년 3월호.

35) 총독부 정무총감(山縣伊三郞)이 외무차관(幣原喜重朗)에게 보낸 편지, <上海不在不逞鮮人逮捕 ニ關スル件>, 1919年 4月11日;高第10719号, <騷擾事件と在外排日鮮人との關係>, 1919年 4月11日;姜德相編, <現代史資料>, みすず書房, 東京, 1967에서 재인용.

36) 朝鮮總督府, <上海在住不逞鮮人の行動>, 1920年 6月.

37)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편, <의암손병희선생 전기>,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1967.

38) 總督府 警務總長 兒島惣太郞, <朝鮮人身元調査の件>, 1919년 4월12일;강덕상, 앞의 책에서 재인용.

39)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김순애>, 1997.

40) 이경남, 앞의 책.

41) 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박준승(朴準承)·손병희(孫秉熙)·양한묵(梁漢默)·오세창(吳世昌)·이종일(李種一)·이종훈(李鍾勳)·임예환(林禮煥)·최린(崔麟)·홍기조(洪基兆)·홍병기(洪秉箕)·

42)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울신문사출판국, 1946.

43) 1919년 3월 28일에 창간된 이 일간지의 주필 김홍숙(金弘叔), 편집위원 조동호와 배동선(裵東宣)은 모두 여운형과 같은 금릉대학 출신들로서 이밖에 이광수·김성근(金聖根)·백남규(白南圭)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했지만, 사실상 이 신문을 발간한 것은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조직이었다.(강덕상, 앞의 책).

44) 김대지·김동삼·김철·남형우·백남칠·선우혁·손정도·신석우·신익희·신채호·신철·여운형·여운홍·이광·이광수·이동녕·이시영·이한근·이회영·조동진·조동호·조성환·조소앙·조완구·진희창·최근우·한진교·현순·현창운./그밖에 이규갑·이봉수·이춘숙·한남수·홍도 등도 참가했다.

45) 회의에 참가한 신한청년당 당원:김철·선우혁·여운형·조동호·한진교 등 5명. 회의에 참가한 여운형 우호세력:여운홍·이광수·최근우 등 3명.

46) <여운형신문조서>. 1930년 2월 28일 진술.

47) 외무부 차장 자리는 여운형이 취임하지 않음에 따라 장건상(張建相)으로, 장건상의 자리(교통부 차장)는 김철(金澈)로 바뀌었다.

48) <여운형신문조서>, 1930년 4월 9일 진술.

49) 이만규, 앞의 책.

50) 김동조․남형우․배형식․서병호․서세원․선우혁․손정도․신규식․신석우․신익희․신채호․여운형․여운홍․윤원삼․이광․이광수․이동녕․이시영․조○․조성환․현순 등.

51)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상해총영사가 우치다 코오사이(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 1919년 5월 16일자, 機密公 第53号. 강덕상, 앞의 책에서 재인용.

52) 조선총독부 정무총감(山縣伊三郞)이 외무차관(幣原喜重朗)에게 보낸 1919년 4월 11일자의 편지, <上海在住不逞鮮人逮捕方ニ關スル件>;강덕상, 앞의 책에서 재인용.

53) 拓植局, <呂運亨東上に關する調査報告書>;강덕상, 앞의 책에서 재인용.

54) <第42回帝國議會豫算委員會 第3分科會議錄>, 1920년 2월 2일.

55) 박은식, 앞의 책.

56)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57) 이만규, 앞의 책.

58)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

59) ‘여운형씨일행도일기(呂運亨氏一行渡日記)’,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2월 3일.

60) 이만규, 앞의 책.

61) <第42回帝國議會議事錄>, 40쪽.

62) <東京日日新聞>, 1919年 11月 28日.

63) 吉野作造, <所謂呂運亨事件について>, <中央公論>, 1920年1月号.

64) <독립신문>, 1920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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