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채워놓은 족쇄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
이규진 2016-12-15 156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사서(史書)를 약탈하고

역사를 악랄하게 조직적으로 왜곡하였다.

 

한국 강점 후 일제 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에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을 총동원하여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1차로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가 지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적인 첫 만행이었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은 교활하게도

조선 사람들을 반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듬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 조상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들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식민사관의 폐해는 반도사관(半島史觀) 주입, 고대사 말살,

특히 단군의 신화화, 한사군 설치, 광개토왕 비문의 조작 등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다른 분야에서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풀려 나왔지만

국사에 있어서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 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박기자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흥사단-알리는 말씀
여운형 선생님의 후손분 관련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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