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친일파 제외한 좌우대립 극복 최초 시도(노영기)
몽양살림이 2007-12-26

      여운형, 친일파 제외한 좌우대립 극복 최초 시도
                                        - 미국과 이승만 정권 의해 단선·단정 반대투쟁 좌절


1945년 8월 15일.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서 친일파를 제외한 우리 민족 거의 모두는 그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해방은 민족해방운동의 결실이 아닌 연합국의 승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비록 일제 36년간 민족해방운동이 계속되었지만 일본이 항복한 나라는 연합국이었다. 연합국에게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이었다.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남북분할을 소련에게 제안했고, 소련은 순순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원하지도 않는 영토분할이 이루어졌다.

남북분할은 많은 면에서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남은 농경지대, 북은 공업지대였던 탓에 남과 북은 결코 갈라질 수 없는 땅이었다. 남과 북은 각기 자원과 식량이 부족했고, 공장은 돌아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의 상태로 지내야 했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 못하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분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분단을 곧 극복할 수 있는 과도기의 상태로 받아들였다. 38선은 미소 양군이 지키고는 있었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는 경계선 아닌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에 이루어진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보통 신탁통치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이 결정의 핵심은 조선을 민주주의적으로 재건하겠다는 것이었다)을 둘러싼 대립은 정계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좌우가 분립되는 형세로 만들었다. 이같은 좌우대립을 깨치고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 모두가 힘을 합쳐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고자 시도했던 최초의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암흑같은 일제 말기에 건국동맹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이름 그대로 건국을 준비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시도는 미군의 진주와 친일파의 발호, 극좌적 경향의 박헌영 계열의 분파성, 완고한 아집에 사로잡혔던 김구계열의 반대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계는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싼 좌우대립의 형세로 변질되었고, 국제적 합의를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성과없이 1946년 5월 이후 기약없는 휴회상태에 들어갔다.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한 뒤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하였다.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우익 세력과의 합작을 시도하였다. 여운형의 구상은 이 운동이 성공한 뒤 남과 북이 힘을 합하여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몇 차례나 38선을 넘어 북에 가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김두봉과 만났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남한에서조차 성공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주도권이 빼앗길까 염려했던 박헌영,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 좌우 세력의 방해, 입법기구 창설과 좌익의 분열을 계획했던 미군정의 훼방 등의 이유 때문에 무산되었다. 여운형은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그의 상대편이었던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에 들어가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민족통일에 반대했던 세력들에 의해 암살당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에서 제대로 그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다. 
                                                  -  노영기(사학과 강사. 한국현대사)의 '38선을 넘었던 사람들 - 해방후∼ 한국전쟁까지의 통일운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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