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근,「조선기독교의 사회주의 크리스천들」
몽양살림이 2007-12-26

양(夢陽) 여운형.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지주 가문인 여씨문중의 9대종손으로 태어난 몽양은 1907년 무렵 상동교회와 접촉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또한 승동교회의 클라크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신학교 2년과정을 수학하기도 한 그는 1914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확인하면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됐다. 그러나 그는 ‘소련적’ 사회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상황에서는 민족해방을 선취한 후에 점차적인 사회개혁 및 민주혁명을 실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몽양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이념이든 주체적·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몽양이 1930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재판받을 때, “나는 기독교 신앙에서 ‘신’이라는 관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물론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밝혔던 것도, 그의 이러한 능동적인 수용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몽양은 해방 후, 극우·극좌의 분열을 막고 좌우합작을 통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두고 있었다.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성사시켜야만 통일정부로서 온전한 해방을 맞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들은 극우, 극좌들의 완고한 정치놀음에 의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다.
1947년, 김규식 박사와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한 후 평양을 수차례 방문하는 등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다가, 이승만과 그 세력을 배후로 하는 하수인에게 피살되고 만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지식 계급에 득죄할지언정 결단코 노동대중에게는 득죄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노동자, 농민을 사랑했던 몽양 선생. 또한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의 골고다 희생정신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조선 기독교의 존재는 사회에 해독만 줄 것”이라고, 식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던 몽양 선생의 신앙. 그것은 마땅히 우리에게 ‘진정한 기독교신앙’의 지표로 고백돼야 할 것이다.

“기독교사회주의 목사와 신도야말로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교회 통치에 반대하여 ‘민족교회’의 형성을 주장했던 조선 기독교의 진정한 상속자였으며, 또 미제국주의의 군사침략과 그 반공통치에 항거하여 분단된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참민족교회의 증인들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건축자의 모퉁이 머릿돌(마 21:42)’을 버렸다. 여운형, 김규식, 이대위, 김창준, 최문식의 이름들이 한국교회에 머리 둘 곳이 없다."
                                                               (홍동근,「조선기독교의 사회주의 크리스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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