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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 시대를 앞서간 민족지도자

시대를 앞서간 민족지도자

조선 건국을 준비했던 선견지명의 전략가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보호관찰대상 1호였던 몽양 여운형. 그런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몽양은 1942년 이미 해방 뒤 식량사정과 치안문제를 염려해 이에대한 조사와 준비를 청년들에게 지시했으며 1944년 비밀리에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4만명이 넘는 맹원들을 확보했으며, 해외 독립운동 조직들과도 연계해 공동투쟁을 도모했습니다.
몽양은 곧 일본이 패망할 것을 확신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몽양 여운형이라면 믿을 수 있었기에 이런 지하 조직이 가능했습니다.

항복 직전 일제의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치안을 몽양 여운형에게 맡깁니다. 실질적으로 조선인민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있는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보름도 안돼 전국적으로 145개가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인민위원회들은 건국준비위원장 여운형에 대한 인민의 신뢰와 해방 전 몽양의 사전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통일 조선의 첫 번째 국가원수가 되었을 진정한 민주주의자

몽양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노력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찢어진 민족을 합치려고 노력할때, 우익은 몽양을 '빨갱이'라하고, 좌익은 '철저한 친미주의자'라고 하고, 또 어떤이들은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몽양은 어떤사람이었을까요?

1945년 10월 5일 국내에 있던 각 정당 수뇌부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인 인민공화국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이냐의 문제로 국내정치세력간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점입니다. 당시 간담회에는 여운형을 비롯해 허헌, 최용달, 최근우(인민공화국), 송진우, 김병로, 백관수, 장덕수(한국민주당) , 조동호, 이현상, 김형선(조선공산당), 안재홍(국민당) 등이 참석해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모여 건국을 위한 단결을 논하는 간담회였습니다. 이 간담회에서 몽양은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대회를 소집하야 임시정부를 지지하느냐 인민공화국이냐 또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것이냐를 국민의 총의에 물을 것입니다. 즉 최후의 재판은 반드시 국민이 내려야 할 것입니다. 무슨 주장명령보다 지금의 조선에는 복종이라는 것이 즉 결의에 따라 간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결의라도 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여기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아직 이승만도 김구도 귀국하기 전이었고, 인민공화국의 몽양 여운형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을 때입니다.그렇지만 몽양은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런 몽양의살신성인(殺身成仁)의 노력으로 인해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가 구성되고 통일적인 건국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그의 유아독존(唯我獨尊)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통일위원회는 깨져버리고, 이후 찬탁, 반찬탁 논쟁으로 좌우익 갈등은 첨예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몽양은 좌우합작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몽양이 피살되던 해인 1947년, 냉전으로 치닫는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통일국가 수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근로인민당을 세울 때도 몽양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즉 선통일 후 국민투표를 통해 인민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멀었던 극좌, 극우세력들은 그런 식의 통일보다는 분단정부 수립 후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이념을 관철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극단적 대결 속에서 좌우를 아우르려했던 몽양은 숱한 테러에 시달렸으며 결국 테러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예견했던 몽양 여운형은 1947년 7월19일 그의 말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친일.분단세력의 하수인이 쏜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몽양은 좌우합작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몽양이 피살되던 해인 1947년, 냉전으로 치닫는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통일국가 수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근로인민당을 세울 때도 몽양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945년 11월 12일 우익성향의 한 단체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해방 후 첫 여론조사에서 최고득표를 받았던 몽양 여운형. 1946년 초 미국과 소련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하면서, 양국은 각각 그 통일정부의 수반으로 몽양 여운형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을 아울러 조선을 하나로 묶을 포용력있고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