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Youngman Mongyang
Revolutionaries of freedom and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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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 몽양 연보

몽양 연보

우리의 자율통일이 없는곳에 조선제(朝鮮製)
정부도 없을 것을 잊지 말자

몽양 여운형(1886.05.25 ~ 1947.07.19)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피격으로 서거하기까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교육자, 신앙인으로 민족계몽운동가로 활동하다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한청년당을 결성,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함으로써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씨를 지폈으며,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는 등 항일 독립운동가, 외교정치가로 활동, 국권회복에 힘썼다. 해방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목숨을 담보로한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직후"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주독립국가의 건국과 민족분단을 막기위해 중도 정치노선으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다 흉한의 총탄에 쓰러진 시대를 앞선 선각자요, 민족의 지도자로 알려져있다. 2005년 3월 1일에 비로소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에 추서되셨고(국가보훈처), 다시 2008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에 추서되셨다(행정자치부).

1886
04
4월 22일(음력)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 출생
1900
03
배재학당 입학.
1901
03
흥화학당으로 전학.
1903
-
흥화학당 중퇴,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 입학.
1907
-
사립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설립.
1908
-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 해방시킴. 기독교 입교. 장로교 C. H. 클라 크(곽안련) 목사의 조수(전도사)가 됨.
1910
-
강릉 초당의숙에 교사로 초빙되다.
1911
-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 입학.
1912
-
황성YMCA야구단장으로 일본 원정경기. 우리나라 최초 해외 원정경기.
1913
-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품다.
1914
-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이후 항일비밀단체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1916
-
상해 거주 동포 자녀들 교육을 위해 ‘상해 기독교 소학교’ 설립. 이듬해인 1917년 정식초등학교인 인성(仁成)학교로 개교
1918
11
상해 고려 교민 친목회(이후 상해 교민단) 설립 초대총무 이후 회장 역임.
11월,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자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
1919
01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 이와 함께 조소앙, 김철, 장덕수, 이광수 등 신한청년당원들을 국내와 일본에 파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전달. 이 시기, 여운형 자신은 간도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림.
02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
03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에 고무된 국내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킴. (이 불씨는 결과적으로 몽양이 지핀 것임)
04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근거지는 만주였으나, 몽양이 파리 강화회 의에 대표를 파견한 이후 각지의 지도자들은 몽양이 있는 상해로 집결함. 여기서 이곳 터줏대감이던 몽양이 사실상 이들 망명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하며, 뒤이어 이들에 의해 상해임정이 탄생하게 됨. 그러나 당시 몽양은 아직 30대 초반의 청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명망가들이 큰 감투를 차지하고, 몽양은 외무부 차장에 취임하게 됨. 같은 해,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포자제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함.
11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 등과 함께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
일본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회담하여 조선 자치제 안을 공박하고 즉시독립을 주창. 특히 <제국 호텔>의 사자후 연설은 유명함.
12
상해로 귀환, [독립신문] 등에 일본 활동상이 대서특필되면서 광범한 여론을 불러일으킴.
1922
01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 개회식에서 연설함.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논의함.
03
상해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의를 추진.
10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 조직.
1923
-
상해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사로 취직.
1925
-
북경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국공합작에 일조. 이 무렵 모택동과도 만남. 한편 손문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
1926
-
국민당군의 무한·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
1928
-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 체육담당으로 축구부와 함께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
마닐라에서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
1929
07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1932
-
출감.
07
조선총독부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함.
1933
-
[조선중앙일보] 사장.
1934
-
조선체육회 회장.
1935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재건 추진. 조동하,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음.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김신 형제의 상해 탈출을 도와줌.
1936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8월13일자에 보도(동아일보는 8월25일 보도)하며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자진폐간.
1939
-
이상백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연계 시도.
1940
-
동경왕래(1942까지 5차례). 일본 수뇌부는 중국 모택동과 장개석 양쪽과 가까운 여운형의 특이한 존재를 이용하여 중일화평공작을 시도해보려고 했음. 여연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무렵 몽양은 일본 천황까지 만났다고 함. 그만큼 일제는 중국에 투입된 병력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돌리고 싶었던 것이나 몽양이 이를 거절. 하지만 이들과 회담 하면서 몽양은 일제가 패망할 것을 확신하게 됨.
1942
-
이정구에게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그리고 장권에게는 치안대 조직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지시함.
02
주변에'일본이 패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됨. 서대문형무소에서 건국에 대비한 결사체를 구상함.
1943
-
가출옥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여기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 돌입.
1944
-
봉안에서 만군(滿軍)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 해방시 일본군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었음. 이와 함께 염윤구, 이 혁기 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 시킴.
08
경성 경운정의 삼광한의원에서 [건국동맹]을 결성.
10
용문산에서 농민동맹 결성.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짐.
1945
03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공 급에 대한 약속을 받음.
04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
05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
08
8월초, 건국동맹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 됨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 위원으로 선출.
08. 15 엔도오 류우사쿠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위임 받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동 위원장에 취임.
08. 16 건국치안대를 조직.
08. 17 건준 1차 조직 완료.
08. 22 건준 2차 조직 확대개편.
09
09. 04 건준 3차 조직 개편.
09. 06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됨. 인공 부주석.
10
10. 05 청년들이 주도한 좌우합작 수뇌회담에 참석.
10. 15 군정장관 아놀드와 하지 중장 만남.
10. 17 귀국한 이승만을 방문.
10. 23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
12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
1946
02
이승만의 참모인 굿펠로우로부터 미군정 지문위원에 참여해줄 것 을 권유받고 승락했으나, 이 자문위원회가 결국 이승만과 친일파 일색 의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자 즉시 탈퇴함.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임명과 동시에 탈퇴.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05
미 국무성의 지령으로 미군정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에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참여.
07
좌우합작위원회 회담 참석.
08
하지 사령관, 합작격려친서를 보냄. 인민당 당수직 사임.
10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 입법기구 문제 의견교환.
11
또 다른 ??민주의원??이 된 입법기구에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자회견.
12
3당합당의 과정에서 극좌파에 시달린 몽양은 정계은퇴 의사를 신문에 발표.
1947
04
제2차 미소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몽양은 신당을 새로 결성하기로 함.
05
근로인민당 위원장.
06
미소공위 협의규정에 따라 개최된 서울 합동회의에 참가, 통일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
07
서재필 박사 귀국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인천항에 출영 나감.
07.19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됨.(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