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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이 남긴 글

제목 자서전1 - 나의 청년시대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06-30


                                  자서전1 - 나의 청년시대



 
고향은 경기도 양주다. 나는 풍광이 明媚(명미)한 이 양주땅에서 소년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사상적 감화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조부는 이름을 圭信이라 하여 그 당시에 있어 우리 반도를 일종 정치상 屬領(속령)으로 알고 취급하는데 분개하여 중국정벌을 정부에 건의하고 또 몸소 그 계획이루기를 일생의 신조로 삼고서 조정의 현관과 초야의 동지들과 결탁한 뒤 무슨 결사인가 맺고서 동분서주하며 모사하다가 그것이 발견되어 首謀이든 某는 삼족멸족의 참형에 처한바 되고 나의 조부는 유배가기로 정죄되어서 평안도 영원의 山高人稀(희)한 窮谷(궁곡)에 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여러해를 지내시다가 내가 열살 되던때 돌아오셨는데 그렇게 좋던 풍채도 여러해의 뇌신(腦神)에 초췌하여지고 머리에는 이미 서리같은 백발을 이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暗淚(암루)를 흘리며 조부의 形容을 바라볼 뿐이었다.
 
렇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그의 기개였다. 그리고 중국을 응징하여야한다는 의사에는 一毫의 差滅도 없으셨다. 또한 書案에는 병서와 算學이 쌓여있었다. 병서라 하여도 只今의 전술이나 병기학은 아니고 六韜三略등이었으며 算學이란 우리들이 지금쓰는 아라비아 수자도 아니면서 한문의 일이삼을 가지고 가감승제의 사칙, 분수 등을 하고 있었는데 이 수자를 가지고 축성법 등을 항상 연구하고 있었다.
삼십삼사년전에 벌써 이러하였던 점으로보면 조부는 신학문에 비교적 조예가 있었던 듯이 추측된다. 비록 이와같이 펴지 못한 뜻을 위하여 병서를 읽고 산학을 연구하셨을지라도 定配갔다온 뒤로는 정부의 감시와 경계가 심하여 與人會談하시는 자유조차 별로 없으신듯하였다.
그뒤부터 조부께서는 유학을 숭상하시기 비롯하여 雲養 김윤식씨나 지금의 문중 여규형씨들에게 그 소양이 못지 않았다고 한다.
 
렇게 불우한 뜻을 유학에 돌리시고 여생을 보내시던 조부님은 흔히 맏손자되는 날더러 중국과 조선의 근세사를 이야기하며 北征의 경륜이 결코 그릇된 국책이 아니란 것과 그 경륜을 펴기 위하여 이러이러한 국가적 준비와 민족적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연소할뿐더러 하등 소양이 없는 나를 안으시고 여복하시어 나에게가지 이런 말씀을 반복하셨을까함에 나는 지금도 가슴이 막히어짐을 깨닫는다. 장차 이 아래에 기록하겠지만 조부의 그때의 감화가 나의 청춘시대의 사상에 큰 영향이 되어서 1912년 우리들이 모두 국외로 떠나버릴 때  아우 운홍은 아메리카로 갔지만 나는 오직 一路 중국상해로 향하였던 것이다.


    *****

  는 열네살 되던해에 부모가 시키는대로 娶妻(취처)하였다가 未幾에 상처하였으므로 열아홉살 되던 해에 다시 장가를 들었다. 그이가 지금의 나의 家妻다.
나는 그때 이렇게 열아홉 되던 때까지 고향에 있으면서 사숙에 다니며 사서오경 등의 한학을 배우고 있다가 이렇게 시골구석에서 초목으로 더불어 썩을 것이 아니라고 각오하고 상투튼 몸이 一朝에 여장도 없이 서울을 찾아 올라갔다.
서울에 와서 신학문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때 최초로 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은 미국인 아펜젤러의 창립으로 申興雨씨 등 실로 많은 신진인재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그때 마침 흥화학당이란 새 학교가 壽進坊谷(아마 지금 청진동의 柳一宣씨의 교회 부근이던 듯)에 창설되었음으로 다혈질의 여러 학우들과 함께 나는 그 학교에 입학하였다.  
 
화학당은 근세교육사상 특서대필하여도 좋을곳으로 처음 미국공사로 가있던 忠正 민영환씨가 귀국하여 서양문명을 수입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略) 설립하고 그러고는 구라파에 유학갔다가 돌아온 신진학자들을 초빙하여 생전 들어도 못보던 물리화학이나 영어 등을 가르키었다.
그때의 동창으로 기억나는 이는 지금 동일은행의 윤고병과 그외 여러분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때 시국은 대단히 긴장된바 있어서 이 학교는 오래 가지 못하고 마침내 어떠한 이유 아래서 학생들과 선생들은 서로 통곡하고 갈라졌고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그 뒤 舊한국학부에서 설립한 우정학당과 전무학당이란 것이있었다. 泰西문명을 수입하기에 가장 첫 捷路인 우편대원을 편제키 위함이라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만국우편공법을 불란서 원문대로 배우고 또 새로 제정된 郵務규정을 순한문으로 배웠다. 그리고 諸외국의 우편제도등을 혹은 외국인 교수의 입으로 혹은 해외에 다녀온 선진학자의 입으로부터 배우기에 분주하였다.
 
럴 때에 日俄의 풍운은 급하여 바야흐로 遠東일대에는 포연이 날리려하였다. 그때 정부에서는 무슨 까닭인가 한국의 우편기능을 일체 일본에 위임한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후일의 5조약이나 모든 조약의 가장 선진에 섯던 조약으로 대단히 의미가 깊은 변혁이었다.
우리들 수십명의 학생은 (略) 궁궐앞에 繩席을 펴고 거기에 가서 울며 상소하려다가 경관에게 더러는 잡히여가고 더러는 쫒겨 나왔었다.
그때 그 우편행정의 引繼위원장이 죽은 정운복이었다. 이리하는 바람에 郵務학당도 폐쇄되고 마침내 日俄의 대전은 만주평온을 중심삼고 전개되었다.
나는 대세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서울을 떠나 고향 양주에 이르러 후진이나 교육한다고 광동학교를 붙들고 있다가 다시 생각한바 있어 강원도 강릉에 이르러 초당의숙에서 교편을 들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다.
 
는 마흔일곱 먹은 오늘에 앉아 과거 청소년 시대를 회상할 때 가장 감개가 깊은 것은 초당의숙의 수삼년간이었다.
중국유신을 일으켰던 영재를 - 가령 양계초 등의 新進氣銳한 지사학자를 많이 배출하던 康有爲가 主宰하던 그 학당도 초당의숙이었다.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당기었을뿐더러 그 학당의 여러분들이 간곡하게 붙잡음으로 그곳에서 교편을 들기로 하였는데 학도들은 모두 삼십사오세의 선비들로 한문은 사서오경급의 창달한 한학자들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학술에 주력하기보다 推移하는 세사를 말하여 주기에 급하였다. 그래서 자리 편 방안에 그 學員들이 쭉 들어앉고 나도 그 틈에 껴서 국가의 현상과 동양의 대세를 論及하였는데 논급하고 나면 학도들은 모두 격하여 울었다. 그때는 사제의 구분이 없이 서로 팔을 붙들고 울고는 이야기하였다.
 
렇게 긴장된 몇해를 보내다가 강릉 경찰서장으로 있는 安樂이라는 사람과 명치연호 사용문제로 마침내 정면충돌이 되어 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나는 그로부터 금강산을 중심삼고 영동팔경을 이리저리 찾아 勝地에 遊하면서 몸을 마련한 뒤 몇해뒤에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그때는 이미 병합 후이다.
1914년(大正四年 - 大正三年의 誤植인듯)에 마침내 歐洲大戰이 발발할 조짐이 보였다. 안에서 이미 뜻을 얻지 못한 몸은 외지로 遊할밖에 더 길이 없을 것을 각오하고 가재를 팔아 학비를 만들어 아우 운홍이가 먼저 미국으로 가고 나도 뒤미쳐 봉천을 거쳐 상해 금릉대학에 여장을 풀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스물여덟 나던 때이다.

                                                                                                   
  <삼천리, 1932.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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