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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47. 7. 20 서울신문 / 여운형 혜화로터리에서 피격 절명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2-24



[발생일자] 1947년 07월 19일

[게재지명] 서울

[게재일자] 1947년 07월 20일

[제목] 여운형 혜화로터리에서 피격 절명

 

== 내용

 

여운형은 혜화동에 있는 서울써비스 주인 정무묵댁에서 독립신보 주필 고경흠과 더불어 2001호 자동차로 경비원 박승복(26)을 태우고 보성중학에서 나오는 혜화우편국 앞길을 19일 오후 1시15분에 다달았을 즈음, 돌연 바른편 골목에서 괴한이 여씨 자동차 후부에 올라타고 소지한 권총을 발사하였다. 이를 본 경비원 박승복은 곧 차에서 뛰어 내려 바른편 유내과 의원 골목으로 도주하는 범인을 추격하였으나 동 범인은 혜화동 71의4번지 홍순정댁 담을 뛰어 넘어 도주하였다. 그런데 발사한 권총은 1발은 여씨 왼편 어깨에 맞아 바른편 가슴으로 관통하고 1발은 배부(背部)급소로 들어가 흉부에 머물렀다. 이에 자동차로 급거 대학병원으로 향하였으나 1분 후에 절명하였으며 시체는 대학병원 외과 중앙수술실에 안치하고 있다.

 

방동규 談

 

우편소 옆 길목에 서서 있으려니까 일본군대 양복 웃옷에 흰 양복바지를 입은 사나이가 서 있다가 자동차가 오니깐 주머니에서 길이가 긴 피스톨을 꺼내어 발사하였다. 발사하자 자동차는 스톱되고 마침 자동차로 달려오던 국방경비대원이 달려 오고 스톱된 차속에서 경비원이 내리며 유내과 골목으로 도망가는 범인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이럴즈음 파출소에서 뛰어 나온 경관이 추격하는 경비원을 범인인줄 알고 붙들고 야단할 적에 범인은 그 골목에 있는 홍순정댁 담을 넘어 성북동 방면으로 도망 갔다.

 

이오분 談 

 

범인이 막다른 골목 혜화동 80번지의1 홍순정댁 담을 넘어 그 이웃집인 혜화동 71번지의4 이길호댁 정원을 지나 달아났는데 이씨댁의 이오분양은 범인도주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집에 아무도 없고 대문간에 서 있으려니까 국방복 웃저고리에 흰 양복바지를 입은 사나이가 사랑문에서 튀어나오더군요. 그래서 누구요 그랬더니 아무 소리없이 태연한 태도로 걸어서 골목을 빠져 혜화동 파출소 뒷길로 사라졌습니다.

 

급보를 받은 수도경찰청에서는 곧 시내 각 경찰서를 총동원하여 현지를 임검하는 동시 성북동 돈암동 신설동 혜화동 인근에 범인을 엄탐중에 있으나 오후3시 현재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시체가 있는 서울대학 부속병원 중앙수술실에는 급보를 듣고 달려온 가족과 근민당 장건상의 여러 간부와 안민정장관 등 다수가 검은 복도를 묵묵히 서서 있었다.

 


여운형 약력

 

고 몽양 여운형은 향년 62세로 경기도 양평에서 나 일찍이 남경 금릉대학을 중도퇴학한 후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노령 만주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1919년 상해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였고 다시 상해에서 조선노병회를 조직하고 1923년 1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그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됨과 동시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명아래 3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고 출옥 후 1933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하였고 1942년 동경에서 귀국중  하관下關에서 체포되어 예심 8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해방직전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였으며 해방되자 즉시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그동안 수차 테로단의 피습에서 여러번 위기를 면하였으며 현재 민전의장 노동인민당 당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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