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Youngman Mongyang
Revolutionaries of freedom and independence
National leaders ahead of the times

몽양 자료실 > 언론보도

언론보도

제목 몽양 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충북대학교 학보에서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4-02-01

몽양 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건국의 주역이자 민족 지도자로 활동

좌우합작운동 등 거국적 독립운동 전개


“나는 완전독립이 아니면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2005년, 우리 독립운동사의 주역이자 건함인 여운형 선생이 복권되었다. 여운형 선생은독립운동 활동과 광복 전후 민족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그 동안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 서훈이 보류되었었다. 독립운동의 사령탑이자 사회주의 계열 최고 독립운동가인여운형 선생의 복권의 의미는 앞으로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에 포상을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작년에 이어 올해 독립운동가 포상 명단에는 상당수 사회주의 계열도 포함돼 있었다. 이는 정부가 당시 여운형 선생이 남겼던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몽양 선생의 초기 삶

몽양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까지 조부의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가 되는 1900년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봉건체제에서 깨어나 개회의 꿈에 부풀게 된다. 23세 때 몽양 선생은 노비 문서를 불지르는 등 봉건 악습 타파에 앞장서는 노력을 기울였다.



상해 국외 독립운동 시절

1906년 몽양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합방의 애통한 소식을 듣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918년 33세의 몽양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그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 민족의 독립 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게 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펴는데 이는 3.1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외무위원장을 맡아 대외 선전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또한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일본 기자들 앞에서 역설하는 등 외교적 독립 노선을 펼쳐나갔다.



레닌과 만나다

1921년 몽양 선생은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조선 독립을 논의했다. 레닌은 그에게 “조선이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힘들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답했다. 몽양 선생은 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신념으로 삼았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독립운동이 분열, 침체된 시기에 몽양 선생은 중국 혁명 운동에 참가했다. 이 사실을 통해 몽양 선생이 중국 혁명을 통해 조선독립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활동으로 1929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독립 운동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국외에서 더 이상 독립 운동을 할 수 없었던 몽양 선생은 국내에서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48세에 <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해 신문을 발행하게 된 이다. 그러나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어 신문이 폐간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후 1940년, 일본이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몽양 선생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에 대해 정세를 돌아보고 조국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해방, 그리고 건국 준비

 1944년 일본의 패전을 예감한 몽양 선생은 비밀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게된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새로운 국가 건설 준비를 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1946년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여 완전한 독립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몽양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소 냉전의현실 상황에서 남북은 갈라지게 된다.



 민족 지도자, 몽양 선생의 생과 죽음

 “청년 학생은 조선의 희망이다. 너희들이 있는한 조선은 죽지 않는다”

 이기형 시인은 그를 “인자라며 대담성을 갖추었다. 좌우의 사상을 떠나 거국적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1946년 뉴욕타임즈와 AP통신 등 외신은 몽양을 “한국의 위대한 민주주의자‘, ‘한국의 진보적 실력자’라고 전했다.

또한 그는 정치에 대해 “정치를 하다 보면 서로 이념이나 사상이 다를 수 있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해방된 조국의 가을 하늘 아래서 우리 청년들이 늠름하게 걸어 들어오는 그 순간만은 함께 흐뭇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야. 나는 정치를 무엇보다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 정치란 결국 인간의 문제 아닌가”라고 말하며 삶을 정치와 결부시켜 바라보았다.

 몽양 선생은 1947년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한 후 평양을 수차례 방문해 민족의 극단적인 분단 상황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어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평생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민족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 그의 업적과 인품은 후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충북대학교 학보에서 (2006년 09월 11일)

 

학술부김지혜  <kimjh1@chungbuk.ac.kr>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