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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시 온라인 뉴스에 소개된 <조선중앙일보> 2013-04-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자 2020-04-27
서울시 온라인 뉴스 매체인 <서울 톡톡>에 <조선중앙일보>가 소개됐길래 옮겨 놓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님의 글이라 그런지 사료적으로 잘 정리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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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까지 당한 조선중앙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사옥 터

사종민 | 2013.01.10


[서울톡톡] 1936년 8월 10일 독일의 베를린 올림픽, 식민지 조선의 청년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 경기 풀코스를 죽을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마침내 당시 세계 인류의 꿈인 2시간 30분 벽을 깨고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테이프를 가르며 통과하여 우승을 하였다. 시상식에 선 손 선수의 얼굴은 당시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승리한 이의 벅찬 감동과 환희가 아닌 무표정이었고 오히려 침울하기까지 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애와 울분을 느껴서 그랬을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낭보를 보도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장한 조선의 건아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고를 저지른다. 유니폼 가슴에 단 일제의 국기인 일장기를 지워버렸던 것이다. 이름하여 '일장기 말소 사건'. 역사적인 올림픽 시상식에 선 영웅의 울분과 비분을 천만 리 머나먼 조국의 신문사도 동조를 하여 일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던 것이다.
 
흔히 동아일보가 유일하게 보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손기정이 우승을 한 지 3일이 지난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그의 활약을 극찬하였고,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 2면에 실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인쇄기 품질이 좋지 않은 편이어서 일장기를 지웠다고 하지만 흐릿하다보니 이를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문제는 2주 후인 8월 25일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선명하게 지운 사진을 보도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발각되었고, 일장기 말소는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시도했음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停刊)을 당한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두 신문의 경영진이 사퇴하고 기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조선중앙일보는 급기야 1937년 폐간까지 당하였던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로 나와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조계사 앞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대로변에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외벽 간판에는 농협 종로지점으로 되어 있다. 한눈에 보더라도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이 없는데 건물의 내력을 설명하는 입간판에 보니 1926년 7월 5일 신축한 2층 양옥으로 조선중앙일보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사옥으로 사용하던 곳이며 주소는 종로구 우정국로 38(견지동 111)로 되어 있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3대 신문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얼핏 보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합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신문일까?
 
조선중앙일보의 전신은 중앙일보이다.(지금의 중앙일보는 1965년 9월 22일 삼성그룹 이병철이 창간한 신문으로 일제강점기 중앙일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앙일보는 1926년 창간한 중외일보의 판권과 신문호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경성부 견지동 60번지(현재 우정국로 45, 견지동 59-1)에서 1931년 11월 27일 속간된 일간신문으로서, '여론의 대표기관, 정의의 옹호기관, 엄정한 비판기관'이라는 3대 신조를 바탕으로 민중의 공기(公器)로서의 소임을 다짐하였다. 다른 신문과 달리 일요 부록으로 2면을 발행하여 학예·가정·운동·아동·산업 등을 다루고 독자의 교양과 취미를 넓히고 저렴하면서 가장 양질의 신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더불어 재정난으로 사원의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해 분규가 일어나고 휴간이 거듭되는 등 불운이 겹쳐 1932년 11월 개성 출신의 최선익이 인수해 여운형(呂運亨)에게 사장을 맡긴 다음부터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1933년 2월 16일 사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3월 7일부터 신문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바꾸게 된다. 신문 이름을 바꾸게 된 동기로는 당시 중국에서도 중앙일보가 발행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선'을 붙이게 된 것은 민족을 내세워 독립정신과 의지를 자각시키려는 의도도 함축되어 있었다.
 
1933년 6월 18일 견지동 111번지(현 우정국로 38)현재의 농협 종로지점 건물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지면의 혁신을 단행해 신문사를 안정적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종래 4면의 지면을 6면으로 늘리고, 11월에는 월간지 중앙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1934년 7월부터는 6면의 지면을 조석간 4면씩 하루 8면으로 늘리고 1936년 7월에는 조간 4면, 석간 8면 등 하루 12면으로 증면하면서 1936년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구독자수는 동아일보의 3만 1,666명보다 앞선 3만 2,782명이었다.(조선일보는 6만 명을 넘어섰다) 사업 확장을 위해 경비행기를 도입하여 백두산 탐험비행을 하기도 하였으며, 민족 반역자의 행태를 폭로 보도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고, '조선민란사화(朝鮮民亂史話)'를 연재하는 등 민중의 지지와 여론의 환기에 매진하였지만 그만큼 총독부의 탄압으로 수없이 차압을 당하고 기사삭제의 수난을 겪음으로 재정과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폐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2군데인데 첫 번째는 우정국로 45 옛 평화당 인쇄소 건물이다. 농협 종로지점 건물 맞은편 도로로 조계사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대로변에 우정국로 45 간판이 붙은 하얀 벽면의 건물이다. 현 농협 종로지점은 두 번째 사옥인 셈인데 이 건물은 1970년부터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해 오고 있으며 2002년 서울시 고시 제 2002-27호에 의해 건물 전면 원형보존이 요구되는 근대 건축물로 지정되었고, 2003년에 증축되었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출구로 나와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도보 3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편으로 151, 162, 172, 401, 406, 704번(간선), 7022번(지선), 종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조계사 앞에서 하차하면 찾기 쉽다.

■ 조선중앙일보 사옥터 찾아가기



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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