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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운홍 저 <몽양 여운형> 서문에서 / 윌리엄 R. 랭던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5-27


『몽양 여운형』
서문에서

 

 

윌리엄 R. 랭던

 

1947년 7월 19일 오후 서울에 있는 구영사관 관저 「베란다」에서 나는 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여운형선생의 검은 빛 구식 자동차가 관저 가까이 와서 정차한 다음 여선생의 측근자인 황씨(영문으로 죠지 황)가 차에서 뛰어 내리더니 우리 집 쪽으로 급히 뛰어 오는 것을 보았다. 황씨는 얼굴에 울상을 하고 여선생이 차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절명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비통에서 오는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운전사를 진정시키려고 급히 차있는 쪽으로 갔다. 선혈이 낭자한 차 바닥에는 여선생이 애용하던 챙이 넓은 「파나마」모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순간이었으며 따라서 나는 지금도 그 참경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극히 매력적인 인품의 소유자인 친구 한 사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재건을 도와줄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이 가장 위급한 시기에 중심적 지도자 한 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십여년 전 한국주재 총영사로 근무하던 때 당시의 일본인 조선총독이 서울에서 베푼 원유회(園遊會)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여선생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외국인 한분이 인품이 탁월해 보이는 한국인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분이 여운형선생이라고 말하고 여선생은 역시 같은 자리에 참석한 고령의 윤치호선생과 같이 잠재적인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기 때문에 일인(日人)들이 항상 불안을 느끼는 존재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그 당시 윤치호 선생은 이미 일인들과 화해하였지만 여선생은 일인들의 심한 감시하에서도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국인들의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시키면서 일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일인들은 한국 국민을 동화시키고 이용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누구보다도 여선생을 참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선생은 그 자체는 무해무독하여 보이면서도 민족주의 색채를 띤 각종의 사회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일인들의 감언이설에 저항하였다. 마지막으로 일인들은 그들이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여선생을 향하여 장개석 총통과 화평 교섭을 할 수 있게끔 중개적 역할을 하여 주면 그 대가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약간의 양보를 하겠노라고 제의한 바 있었다.

 
여선생은 일인들의 이러한 제의를 거부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였노라고 나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즉 『당신들이 이와같은 곤경에 빠진 것은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니 당신들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타개해 보시오. 나는 이러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소.』 라고. 여선생의 이 대답은 아마도 『완전 독립이 아니면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고 하는 조국에 대한 그의 비타협적 신념을 표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때의 여선생의 감회가 어떠하였을 지는, 누구나 가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1940년경에는 한국인의 민족적 동일성은 조만간 소실되어 버릴 것 같이 보였다.

일인들과의 협력, 일본인인 척하는 행세, 심지어는 일인들의 이해관계 및 목적에의 동조, 이러한 여러 경향들이 일본통치의 첫 20년간에 나타났던 강한 반일감정을 대체하고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군사적인 승리와 일견 천하무적인 것같이 보이는 일본군의 위력 앞에서 제 정신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어찌 민족적인 독립을 달성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랴!

 
그러나 기적이 생겼고 한국도 다시 한번 한국으로서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

「포츠담」에서의 군사협정에 의하여 소련은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을 담당하고 미국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4일 일본군이 항복한 직후 북한 각지에 침투하였지마는 미군은 그해 9월 8일과 그 이후에야 겨우 남한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일인들의 권력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고 일본인 당국자들의 주요 관심은 일본인 주민들을 무사히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운형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지도자들은 인민공화국이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일본인들이 呂선생의 정권기관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편의를 동 기관에 제공하였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여선생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던가를 증시하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백만여명의 일인들이 아무런 박해나 모욕을 당함이 없이 질서 정연하게 한국을 떠나 귀국할 수 있었다는 것도 또한 여선생과 그의 정권이 분별있는 온건 정책을 취하였던 결과로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여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주한 미군사령관 「존.R .하지」중장에게 그와 그의 정권의 협조를 제의하였었다. 그러나 「하지」장군은 본국 정부의 훈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훈령은 미국 군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이었으며 인민공화국 정부와 지방위원회 또는 기타 행정기구를 조직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여운형 선생을 위시한 여러 지도자들과 여친 단체들의 협조 제의는 거부되었다.

 
소련군 점령 지구인 북한에 있어서는 소련 제도와 약간 유사한 점이 있는 여선생의 인민공화국 지방위원회들은 지방 행정 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 허용되었지마는 거기서도 또한 소련군이 완전히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독립이 즉시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차에 이와 같이 예기치 않은 장애가 생기고 보니 한반도 전역의 국민과 지도자들의 실망 내지 좌절감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함은 가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일이다. 이로부터 몇 주일 후에 이승만 박사와 구형(舊型)의 영웅 김구 선생과 1919년 이래 각각 미국과 중국에 망명해 있던 소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남한에 도착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남한은 두 개의 정치적 진영 즉 여선생의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과 이박사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명목상의 수석 김구(金九)선생은 그와 같은 무의미한 분쟁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양 진영은 모두 정부로서의 권한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하지」 중장은 현재 남한에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서 미 군정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1945년 12월 28일에는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합의를 본 한국 문제에 관한 협정이 발표되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 협정은 제한된 권한을 갖게 될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할 것과 이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하여 주한 미군 사령부와 소련군 사령부의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규정한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하에 임시정부 수립안을 작성하기로 되어 있었고 미소양국이 이 안을 영국과 중국에 제시하고 그런 후에 이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게 되면 공동위원회와 새로 수립된 민주적 「임시정부」와 「민주적」단체들은 한국의 발전과 자치와 독립을 지향하는 여러 방책을 작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리해서 제안된 방책들은 5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기 위한 4개국 간의 합의의 토대를 형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천년간이나 고도의 조직된 사회생활을 하여온 문화적인 한국민이 그들의 운명에 관한 성명을 듣고 대경 실색하였다는 것은 놀랄 것 없는 일이었다.

미소 양국 정부의 선의를 믿는다손 치더라도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번잡한 준비 조처와 신탁통치의 운영은 틀림없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와 같은 관계 상황하에서는 이러한 준비조치에는 끝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몇주일 전에 남북한 사이의 물물 교환에 관한 유익하고 간단한 협정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순조롭고 또 가장 신속하게 이 준비 조처가 강구된다손 치더라도 그 최종적 결과는 가장 수치스럽고 저열한 형태의 외국통치 즉 식인종과 원시적인 엘라네시아 인들과 중부 아프리카의 발가숭이 미개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종의 후견인, 그러한 신탁통치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남한에서는 서울 및 기타 여러 곳에서 노기를 띤 군중시위들이 일어났다. 소련군 점령지구인 북한에서는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사람들은 조용히 묵종(黙從)하는 것이었다. 여선생의 집단은 묵묵히 불가피한 사실 즉 「모스크바」협정이 앞으로 5년간 한국의 유기적인 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박사 및 김구 선생과 그 추종자들은 끊임없이 또 소리높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1945년 3월 20일 「모스크바」협정에 규정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소집되었을 당시에 있어서의 남한의 사태는 대략 이상과 같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되자마자 임시정부 조직에 관하여 협의하여야 할 한국의 민주적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의 명부작성 문제로 말미암아 회의는 정돈(停敦)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공공연히 반대한 지도자들을 협의 대상으로 하는 것을 약간 조리있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페어플레이」를 존중하는 우리로서는 남한 자유지역의 지도자들이 원칙적 문제들과 그들의 중대한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 그러나 한 번도 그들이 상의받은 일이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소견을 발표하였다고 해서 그들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실제적인 견지에서 미국은 협의대상으로 되는 지도자들이 후일에 임시정부를 조직하게 될 것이므로 그렇듯 많은 친미적인 남한 지도자들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게 되면 결국 불안정한 친공정부를 세우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이외에도 다른 논쟁점도 있기는 하였지마는 소련측이 신탁통치에 공공연히 반대한 지도자들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였으며 미국측도 이에 못지 않은 강경한 태도로써 신탁통치에 대한 견해표명이 어떻든간에 모든 한국 지도자들을 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에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1년 후 미소양국이 한국의 모든 지도자들과 협의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타협안을 작성하였을 때에 공동위원회는 재개되었다. 그리고 타협안이란 요컨대 「모스크바」협정 즉 신탁통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겠다는 약정서에 서명만 한다면 어떠한 한국 지도자라도 협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여운형 선생을 비롯하여 중립적인 지도자들은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환영하고 필요한 약정서에 서명을 하였지마는 굳게 결속하여 우세하여진 반탁을 주장하는 이들은 공동위원회를 「보이코트」하였을 뿐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군중시위를 조직하였다.

 
이 우세한 반공세력을 임시정부 수립에서 제외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반공세력을 지지하여 공동위원회를 와해시키느냐 하는 양자택일이 불가피하게 된 미국측은 반탁세력을 협의에 참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측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지도자들의 견해를 공동위원회에서 청취하도록 하는 대안을 소련 측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였으며 7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공동위원회는 절망적인 정돈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워싱톤」정부와 「모스크바」 정부는 이 난국을 타개하여 보려고 시도하였지마는 양국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공동위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리해서 1947년 7월 17일 미국정부는 한국문제를 UN총회로 옮겨가겠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반탁 진영은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선생이 공동위원회와 협력을 한 대가로 그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내가 주지되고 있는 한국의 최근세사를 대충 살펴 본 것은 다만 여선생의 역사적 위치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여선생은 한국을 떠나가는 일인들도 반대하지 않았던 그의 인민공화국이 미소양군 사령부들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또는 해체를 당하였을 때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생을 통해서의 긍지높은 애국자였던 여선생은 「모스크바 협정의」 공표와 동시에 조직되었던 반탁연맹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부과된 굴욕적인 신탁통치에 대하여 불만을 느꼈다. 그리고 신탁통치안은 일인들의 항복이후 여선생이 장악하게 되었던 지도권을 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여선생 자신에게 제일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협정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계획표가 있었으며 이 협정은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양 대국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리적인 정치인으로서의 呂선생은 이 협정 구현에 전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1946년 5월에 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간 후 여선생은 공동위원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한국 독립문제를 에워싼 중대한 사태에 관하여 북한 지도자들과 협의하기 위해서 평양을 방문하였다. 여선생이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의 북한 여행담과 아울러 사태 수습책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왕능(王陵)(본문에는 동편 언덕 수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고 능의 위치는 말하지 않았음)으로 나와 함께 소풍가도록 여선생과 이 책의 저자인 그의 계씨(季氏)와 황씨를 초청하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여선생의 신중하고 이론적이고 또 예리한 말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마는 반탁연맹에 관한 그의 수사학적인 질문 한가지를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즉 그는 묻기를

 『이승만씨와 그의 반탁연맹은 소련사람들을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좀 말씀해 주시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하지」장군은 한국 국민의 실망을 완화하기 위한 강력한 조처를 취하였다. 즉 「하지」장군은 그의 자문기관의 역할을 할 한국 지도자 협의회를 임명하고 일부는 민선의원으로 조직하게 될 과도 입법의원을 소집함으로써 그의 책임과 모순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군정부를 최대한으로 한국인화하였다.

 
이와같은 여러 조처에서 여선생에게도 다른 한국 지도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한과 미군정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여선생은 사실상 이러한 초청들을 수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인즉 아마도 처음부터 탁월한 위치에 있던 그는 이 경우에도 최고의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미군정 당국자들은 한국지도자들 사이에서 정실로 기운 편파적 태도를 취할 생각이 없었을 뿐아니라 그들중에는 여선생의 친공적 경향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이점과 관련하여 여선생에게 불리한 두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즉 하나는 그가 1920년대에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던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인민공화국의 인민위원회가 공산주의적 정치제도와 방불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으로 말한다면 1920년대의 「모스크바」는 식민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유일한 안식처였고 희망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모스크바」 방문을 그에게 불리한 점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정부형태가 문제로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있어서의 편의주의적 고려에 기인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내가 여선생과 접촉하고 또 의견을 교환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여선생은 공산주의적 교조나 사회이론 혁명적 폭력이나 계급적 증오에 대한 아무런 흥미 내지 편애를 표시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나의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여선생은 한국의 분할을 고정시키기 쉬운 고식적인 정치적 조처에는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며 그럼으로 해서 그는 남한에서 미군정이 세우고 있던 몇가지 제도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선생이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의 공산지도자들은 미쏘공동위원회에서 미국대표단이 취한 입장에 대하여 틀림없이 신랄한 비판을 하였을 터이지마는 이에 대하여 그가 서울에 돌아온 직후 반탁연맹에 관해서 나에게 하였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북한의 공산지도자에게 하였으리라는 것을 나는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다.

 

『좋습니다, 아마도 그럴겁니다. 좋은 말씀이예요 그러나 여러분은 미국사람들을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

라고 그는 질문하였을 것이다. 여선생이 작고하셨을 때에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의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여선생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왔지마는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의 목적은 미소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하에서 한 분의 진정한 애국자에 대하여 이 이상의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여선생이 암살당한지 일년 후 한국을 영원히 떠나기에 앞서, 내자(內子)와 나는 여선생 영전에 화환을 바칠 수 있도록 그의 묘지로 안내하여 줄 것을 이 책의 저자인 여운홍 선생에게 요청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여 주시었다. 이리해서 우리들은 넓고 아름다운 한국 농촌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여선생 묘지 앞에서 모여 위대하고 고귀한 선생의 뛰어난 덕성을 추모하였다. 끝으로 대한민국 참의원 의원인 여운홍 선생이 그의 백씨 여운형 선생의 전기를 집필하심에 있어서 본인에게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셨는데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알고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1961년 4월

매서추세츠주 웰슬리 힐스에서



〈여운홍 저 , 『몽양 여운형』에서>

 

덧, 서문을 쓴  미국의 랭던은 일제하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로서 여운형과 오랜 교분이 있어오다가 미군정 시에는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었고 미소 공위시에는 미측 대표의 한사람으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운형과  상종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여운형의 사상경향, 정치이념. 내지는 개성까지도  잘 아는 내외국인 중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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