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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03.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몽양 여운형 선생'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0-11-03


03.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몽양 여운형 선생'
 
세나토리움 추천 0 조회 115 08.07.22 23:2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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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이니찌 신문, 1919월 11월 28일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조선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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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운동의 주창자 여운형 입경 (신문기사내용)
 
-그것은 일제의 심장부에서 얻어낸 여운형의 승리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승리였다.
 
여운형이 돌아간 뒤 이듬해 일본제국의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3.1운동의 중심점에 있던 인물이 일본을 뒤흔든 사건에 대한 책임공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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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회 중의원 의사록 (19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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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의원
: 여운형은 작년(1919) 3월폭동에 이르기까지 조선내지의 폭동자와 연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이 3.1운동의 핵심인물임이 한번 더 드러났다.
당시 하라케 내각은 여운형회유공작실패의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제국의회 중의원은 해산된다.
 
강덕상 / 재일한국역사자료관 조사위원장
그래서 (하라수상은) 궁지에 몰리자 그는 여러 가지 공작을 하여 이를 완화시키려고 했지만 반대파가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그럼 해산하자’ 그러한 의미에서 여운형국회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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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상해임시정부발행
(1920년 1월 17일)
임시정부역시 이러한 그의 활약을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성과로 보면서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자리잡는다.
이후 여운형의 행보또한 인상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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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선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중국에선 손문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국.공합작에 참여해 공산당을 도운 인물, 이념과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조선독립을 위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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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9년 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3년행을 받았다.
비록 수인의 몸이었지만 여운형의 귀국은 그와 민족의 운명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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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견지동 입구 (조선중앙일보 옛 자리) 일제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된 2층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제때 조선중앙일보사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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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후 여운형이 선택한 행보는 뜻밖에도 신문사사장이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언론사사장이라는 직위를 충분히 활용한다.
취임 이듬해 상해의 김구와 연락해 당시까지 국내에 있던 어머니와 아들이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 여운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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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한다.
당시 조선청년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사진을 개재한 것 역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해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신문도 폐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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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후 그가 머문 서울 계동집이다.
당시 여운형은 일제의 보호관찰대상 1호 였지만 그의 집에는 조국을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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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역시 청년들에게 연설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는 식민지조선청년들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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