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Youngman Mongyang
Revolutionaries of freedom and independence
National leaders ahead of the times

몽양 자료실 > 글과 논문

글과 논문

제목 여운형은 누구인가? / 김영식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1-18

The Left-RightConfrontation in Korea – Its Origin


A short history of modern Korea as seen from a Korean nationalist’seye.

Kim Young Sik

February 8, 2003, Portland, Oregon



여운형은 누구인가?


이 화 랑, 2002. 10. 15

 

 

여운형은 1886년 4월 22일(음) 경기도 양평군에서 출생하여 1947년 7월 19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그는 그 시대에 가장 능력있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그는 한국의 독립이 없이는 세계 평화도 있을 수 없다는 탁월하고 건전한 주장을 피력할 수 있었다. 한국의 모든 정치인중에서 여운형은 세계 정치세계에 있어서의 한국의 위치라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한국의 정치인들은 당시 한국에 몰려 오는 재난을 보고 자신들의 더러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는데…

어린 시절 여운형은 한문과 유학을 공부하였다. 1900년에 여운형은 유명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그 다음해에 흥화학교로 전학하였다. 1908년에는 승동교회에서 목사보조로 일을 하였고, 1910년 초당의숙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1년에서 1912년까지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914년에는 중국의 금릉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 1917년 졸업하면서 그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협화서국에 취업하였다.

한국독립을 향한 여운형의 평생에 걸친 헌신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임을 깨닫고 1918년에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다. 여운형은 상하이 교민들에게 세계평화에 있어서 한국의 자유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22년 1월 21일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 1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동휘는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온 52명의 한국대표단을 이끌었다. 이동휘의 부대는 백군 (White Army)과 시베리아의 외인부대 신속군을 격퇴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레닌은 이를 감사히 여겼다. 레닌은 한국인을 그의 개인적인 손님처럼 대했으며 여운형도 개인적인 자격으로 레닌을 만났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에 여운형은 장개석의 홍보관으로 일했으며, 쑨야첸 (손일선: 손문)과 마오쩌뚱(모택동)과도 만남을 가졌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은 중국내에서 점점 증가해가는 한국독립운동을 억압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혹독한 탄압과 교활한 회유를 병행하였다. 교활한 회유의 의도로서, 일본이 얼마나 현대화되었고 발전했는지 본다면 일본의 한국지배를 한국인들이 환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저명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도꾜를 방문하도록 초청하기도 하였다. 여운형도 일본에 초청되었으며,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여운형은 일본으로 갔다.

일본인들은 여운형이 다루기 힘든 사람임을 깨달았다. 여운형은 실망한 일본인들에게 한국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이 수천년간 독립국이었고 인류문명에 획기적인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으며, 한국문화는 독창적인 것이어서 동양의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아울러 주지시켰다. 또한 여운형은, 한국인이 계속해서 세계문화를 살찌우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당연히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중국이 일본에 적대적인 이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일본의 한국병합은 동양의 안정을 깨뜨리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동양의 평화가 회복되지 않으면 서구 열강들이 동양으로 밀고 들어 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동양의 불안은 세계대전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1929년 일본은 여운형을 구속하여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대전형무소에 투옥하였다. 출감하였을 때 여운형은 한국내에서만 거주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서울에 있던 조선총독부는, 1932년의 농촌자력 갱생 캠페인과 1938년의 중일전쟁 및 1940년 창씨개명운동과 1944년 중일 평화협정교섭 당시에 여운형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여운형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1942년부터 1943까지 다시 수감되었다. 1944년에 여운형은 중국과 미국에서 비밀 독립운동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서울에서 중앙일보에 편집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모택동 군대의 한국인 고급장교였던 무종은 서울의 여운형의 집에서 머물면서 서울중앙고보에 다녔다. 무종은 혁명적인 활동을 이유로 1923년 퇴학당했으며, 그해 3월에 그는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으로 갔다. 1944년에 여운형의 수행비서인 김명시는 무종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가지고 서울을 떠나 모택동의 은신처인 예난으로 향했다. 김명시와 무종은 여운형의 집에 머물던 유숙객이었으며 김명시는 무종을 사랑하고 있었다. 무종은 한국의용군을 지휘했고 여운형은 그 부대와의 연락을 원했다.

1945년 8월 14일, 아베 총독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이됨)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여운형은 한국에서 모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남한에는 700,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북한에는 200,000명의 일본인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건준은 한국내 13개도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인민위원회는 일본당국으로부터 지방행정과 치안 기능을 넘겨받았다.

아베총독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협상을 하는 동안, 한국내 일본주둔군 사령관 고주키 요시오는 미군측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요시오는 (자신들이 통치해야하는 나라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는) 미국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공산주의 선동가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요시오는 한국인들이란 미군이 한국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만 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인을 계속 통제할 수 있도록 충분한 협조를 하겠다고 미군에게 제의했다.


(사진 설명)좌에서 우로,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하는 서재필과 함께

 대략 30,000명의 정치범들이 한국내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그들은 건준에 참여하여 여러 형태의 지부 조직을 결성하였다. 15,0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강제로 징집당했던 일본군과 징용 현장에서 풀려났다. 건준의 지도자들은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동맹과 공산주의자라는 두개의 계파로 나뉘었다. 여운형은 친일파와 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을 위한 통일된 민주정부의 수립을 원했다. 여운형의 세력은 몇 명의 공산주의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른 쪽 계파는 서울에 거주하는 나이많은 국내파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결성한 '장안'이라는 이름의 조선공산당이었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힘을 합쳐 미소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전국적인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에 정면으로 반대하였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테러 공격을 사주하였다.


(사진설명) 1947년, 김구의 수행비서인 엄항섭과 함께 한 여운형(우). 여운형은 김구의 노골적인 적의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엄항섭은 김구의 암살 이후 북한쪽으로 돌아섰다.


1946년 2월 14일 서울에서 이승만의 [ ]가 첫 회의를 가졌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 진영에 합류하였다. 여운형과 공산주의자들은 [ ]에서 배제되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박헌영이 이끄는 국내파 공산주이자, 연안 지역의 공산주의자, 김원봉이 이끄는 좌익계파 그리고 여운형의 추종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지방지부의 인민위원회의 지지를 함께 받고 있었다.

1947년 7월 19일 미국 C.I.C.와 연계된 우익테러집단인 백의사의 일당이 여운형을 살해한다.

미국 C.I.C. 관리 Major Cilley의 증언 안두희는 염응택(백의사 우두머리)의 공작원 중 하나로서 특수행동대의 제1조직의 일원이었다. 나는 안두희를 한국내의 C.I.C.에 대한 정보제공자로서 알고 있었는데, 후에 백의사의 공작원임을 알게 되었다. 만일 안두희가 염응택으로부터 암살을 지시받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피로써 맹세했을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여운형과 장덕수와 같은 한국의 출중한 두 정치지도자의 암살은 백의사라는 이 지하 조직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믿어졌다. 

*김영식 박사님은 이화랑이라는 예명으로 글을 쓰시기도했습니다. 관련하여 1장부터 10장으로 정리해서 보내주셨는데 원본이 있으며, 그 당시 몽양사랑 회원이셨던 전종배님께서
좋은 번역으로 수고해주셨는데 다행히 그 번역본이 일부 남아있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기회봐서 원문도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항목선택

카테고리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56 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체육문화운동 몽양사랑지기 2021-03-04
55 2) 몽양과 6.15 시대 3) 6.15시대와 몽양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4 몽양과 6.15 시대(1)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3 해방정국과 몽양 / 송남헌 몽양사랑지기 2021-02-09
52 몽양 여운형을 생각하며 / 문익환 몽양사랑지기 2021-02-01
51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수립에 대한 몽양의 심정 / 이기형 몽양사랑지기 2021-01-29
50 여운형은 누구인가? / 김영식 몽양사랑지기 2021-01-18
49 몽양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 김형민PD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8 신한청년당과 몽양 여운형 - 3ㆍ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 김삼웅 몽양사랑지기 2020-12-07
47 몽양 여운형의 독백 (2) 몽양사랑지기 2020-11-22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