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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양 여운형과 한국근현대사 / 김삼웅(현대사연구가, 전독립기념관장)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6-17



몽양 여운형과 한국근현대사

   

 



김삼웅(현대사연구가, 전독립기념관장)

   



1, 생애를 관통하는 독립과 통일의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몽양 여운형은 특출한 인물이다.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공간에서 그의 존재를 빼면 주연 없는 연극이 될 것이다. 조국해방이라는 씨줄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날줄로 교직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사상적인 스펙트럼에는 간혹 이물질이 섞이기도 했으나 이념의 원형질은 진보적 민족주의라 하겠다. 요약하면 몽양의 생애를 관통하는 DNA는 진보적 민족주의다.


몽양은 당대의 시류를 넘어 역사를 폭넓게 조망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격동의 시대인지라, 여러가지 시대사조와 국내외의 다양한 인물들과 접하게 되고, 활동면에서도 단순성보다 복합성을 띄게 되었다. 산골짜기 맑은 청량수이기보다 넓고 깊은 도저한 호수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시대에 한 발 앞서 민족의 미래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척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걸림돌이 많았고 폄훼와 모함도 적지 않았다. 우파는 좌파로, 좌파는 우파로, 때로는 중도파 또는 기회주의자로 따돌림 되었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다보니 친일파로 오해받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몽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첫째그룹에 속하는 민족지도자이고, 해방 뒤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한 1급의 인물이었다. 20세기 전반기 우리 민족이 포악한 일제에 병탄되고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몽양 여운형을 비롯하여 소수나마 백절불굴의 신념으로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몽양을 좌경 이념으로 색칠하려 하고 일제 말기의 반민족행위자로 낙인하려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몽양을 특정한 이념의 따옴표를 분류하기에는 활동 영역과 무대가 너무 넓고 그릇이 너무 커서 쉽게 묶이지가 않는다. 몽양에 대한 친일 음해는 친일파 후손들과 그 동조자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키기위해 몽양을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이다. 필자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마치면서 저들이 얼마나 극악스럽게 몽양을 물고 늘어지는가를 체험한 바 있다.


몽양은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이지만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몽양은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을 만나 그의 권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중화주의자는 아니였다. 몽양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고위 정객들을 만나고 총독부 고위층과도 접촉하였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


일제 패망 뒤 미군 환영을 위해 대표단을 인천에 파견하여 하지 장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유창한 영어로 미군정청을 드나들며, 미군 고위 장교들과 교우했으나 친미주의자는 아니었다. 소련 군정과도 접촉했지만 친소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해방 뒤 11차례에 걸쳐 김일성김두봉 등과 서신왕래를 하고 미군정 포고령을 무시하고 5차례나 평양을 방문했지만 친북주의자가 아니었다.


몽양을 일러 공산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민족적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진보적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적용되지만, 그는 오직 조국의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다.

몽양은 민족의 독립과 자주통일평화평등을 위해 온갖 이념을 섭렵하고 체제를 극복하면서 굽힘없이, 사심없이 민족주의의 대로를 당당하게 걸었다. 그릇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일제도 미군정도, 북한 당국도 함부로 어쩌지 못했다.


몽양이 일본의 적도에 뛰어들어가 조선독립의 사자후를 토하자 감동받은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까에(大彬榮)의 선창으로 참석자들이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할 만큼 담대한 호걸이였다. 당시 몽양의 연치 33세 때의 일이다.

몽양은 접두사첫 번째'의 여러 가지 기록 보유자이다.

   

반가집 자녀로서는 가장 젊은 나이(22)에 집안의 노비 해방

가장 먼저 근대적 정당인 신한청년당 조직(1919)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1918)

가장 먼저 31운동 추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

한국인 최초로공산당선언번역(1920)

 한국인 최초로 국민당군의 무한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연설(1926)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1936), 이로써선중앙일보 폐간

1945 8 15일 휘문중학에서 가장 먼저 민족해방의 군중연설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를 방문, 독립운동 수감자 석방(8 16)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많은(10차례 이상) 테러와 결국 암살당함

해방 뒤 짧은 기간(건국준비위원회 출범 한 달)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 설립 등 건준 조직활동.


광복 직후매일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에서 몽양은 33%를 차지하여 첫 번째가 되었다. 존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극비 보고서에서 남쪽에서 대통령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 차점자는 중국파 김구이고 미국파 이승만은 3위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미군정이 아니었다면 몽양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과 비교할 때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몽양의 서거로 국민은 희망과 큰 지도자를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민족사의 비극이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몽양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진취적인 독립운동가와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로 갈리고, 투철한 민족주의자와 진보적 사회주의자라는 평판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는 방법과 수단을 달리했을 망정 조국해방과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큰 목표에서는 이탈하지 않았다



2. 3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몽양이 독립운동과 남북통일운동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큰 줄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몽양은 누구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민감하여 1918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주목하고, 1919 1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시도하였다. 강화회의 대표들이 극동의 변방에 자리한 한국의 존재에 대해 알 리가 없을뿐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회의장에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동지들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당의 이름으로 대표를 파견하려는 계획이었다.



여운형은 1918 8월에 터키 청년당의 강령에 준한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동하여 그 총무가 되었으며, 이 당을 통하여 국권회복투쟁만이 아니라 풍속, 문화, 도덕을 새롭게 한다는 진취적 목적을 가지고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년, 학생을 규합하는 데에 힘썼다. 이때의 여운형의 사상은, 망각된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신기원을 이룩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독립사상이었다. 신한청년당은 프랑스조계 백이부로(白爾部路)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조동호김철선우혁한진교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고, 부서는 총무만을 두기로 하되 국내의 손병희를 총재로 추대하기로 했으나,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몽양은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동양의 문화에 적지 않게 공헌을 했던 나라이지만 한일합방 후는 민족의 정치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상의 압박을 받아.”로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윌슨 미국대통령의 특사 챨스 클레인이 상해에 왔을 때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그로부터 고무적인 격려를 받자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2통을 작성, 미국 언론인에게 주었다. 만일 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1통은 윌슨 대통령에게, 1통은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서 몽양은 1919 1월에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초청하여 그를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장덕수를 국내로 보내어 이상재손병희 등과 접촉케하고 자신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동녕문창범박은식조완구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당시 국내외 각처의 지사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서,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대표파견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운형이 파송한 김규식만이 회의 중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규식의 파송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운형이 장래의 갈림길이 되었다. 각처의 단체들이 하고자 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함으로 해서 전도사 여운형은 무명씨(無名氏)의 신분에서 일약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은 몽양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31운동의 촉발재 구실을 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신한청년당의 역할이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도쿄의 유학생들은 영국인이 일본에서 발행하는저팬 에드버타이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신한청년당의 결성, 대표파견 기사를 알게 되었다. 또 국내에 파송된 장덕수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 국제정세와 신한청년당 대표의 파리 파송 등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김규식의 파송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에 도화선이 되었다. 31운동이 국내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그리고 불교계의 지도자들의 주동으로 조직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지도자들이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서 그 엄청난 사업을 추진했던가 하는 질문을 추궁해 보면 김규식이 상해를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로 귀착이 된다. 이 말은 그가 떠난 후에 국내의 지도층에게 전달이 되었고 31운동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여사가 이정식 교수에게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거대한 31독립항쟁 발발의 지하수맥’(地下水脈)에는 몽양의 숨은 역할이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찾게 된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주역 중의 주역

   

31운동 후 상해에는 국내외에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임시정부를 세워서 조직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려는 뜻이었다. 31운동 직후인 3월말 신규식 중심의 동제사와 여운형 등의 신한청년당 멤버들이 상해 프랑스조계 안의 보창로 329호에 합동으로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면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몽양은 1919 2월 말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있던 이 지역의 유력자 여준을 만나 파리대표 파송문제를 의논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저명 애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상해로 모일 것을 종용하였다. 귀로에는 북간도에서 정재면, 김약연 등을 만나 같은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상해로 돌아와 동제사와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열었다.


독립사무소 출범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신한청년당의 대표들과, 일본에서 28운동에 참가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최근우, 미국에서 온 여운홍,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현순이 총무를 맡았다. 그 뒤 3월 말에 이르러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인물들이 여기에 집결하였으니, 대표적인 인물은 본국에서 온 최창식, 일본에서 온 신익희윤현진,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온 이동녕조성환이시영조성환조소앙김동삼 등이었고,  30명이 넘었다.


이들은 독립사무소에 모여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독립을 쟁취할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고, 마침내 의정원을 먼저 구성하기로 하였다. 몽양의 증언이다.


() 상해 조선인 중, 조선 각도별로 즉 경기도에서 나, 최근우최창식, 황해도에서 김웅섭이규홍장건상전라도에서 나용균김철, 함경도에서 동림이춘숙, 강원도에서 김세준, 평안도에서 선우혁이유필고일청을 위원으로 뽑아 의회의 조직관제의 제정 등을 맡기고, 우리 의원 일동은 동년 4 10일경 앞서 말한 빌린 집에 모여 이동녕을 의장으로 추대하여 합의한 후 먼저 의회를 창설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라 이름붙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를 설치했는데, 외무부 위원장에 나, 동부위원장에 장건상백남칠, 내무부 위원장에 조완구, 재무부 위원장에 김철을 뽑고 동시에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이 된 몽양은 외무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당초 그는 정부 수립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당 중심의 조직을 원하였으나 다수 의견에 밀리게 되었다.


나는 외무부 위원장의 자격으로 프랑스 영사 윌튼을 방문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의 전말을 진언하고 양해를 얻어 보호를 의뢰함과 동시에 프랑스정부에도 그 뜻을 타전
(打電)하였고, 중국 신문인신보,민국일보,시보, 영자신문인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챠이나 프레스,샹하이 더 타임즈등에 조선 독립운동 상황을 게재하여 각국의 이목을 끌고 성원을 얻기에 노력했으며.

       


4, 적도에서 당당하게 조선독립을 요구

   

몽양은 1919 11 16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정부의 초청에 의한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찬성했으나 이동휘신채호한위건 등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원수와의 대화는 악마들과의 대화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반역행위라는 매서운 성토가 따랐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일제는 이를 파괴할 목적으로 여운형손정도이시영 등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되면서 전략을 바꾸었다.


31운동 당시 일본군경의 무차비한 만행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규탄을 받고 있던 일본정부의 유화책을 보이고자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이었던 몽양을 초청하여, 조선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전략이었다. 그는 일제의 기만 술책을 꿰뚫으면서도 초청에 응하여 도일한 것은 이를 역이용해보자는 배짱이었다.


아무리 일본 정부의 신변안전의 약속이 있다하더라도 제국주의의 야만성이 지배하는 적도에 맨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호랑이 굴에 기어드는 것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몽양과 같은 배포가 아니고는 단행하기 어려운 모험이었다. 케네디스쿨의 데이비드 거젠이 올바른 대의를 위해서는 칼 아래 쓰러질 용기가 없다면 그 누구도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말했듯이 몽양은 왜적의 칼 아래 쓰러질 용기와 담력이 있었기에 도쿄행이 가능했다.


몽양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장덕수를 통역으로 대동한다는 단서였다. 전라도 외딴 섬 하의도의 유배생활을 그치게 하려는 동지적 배려도 작용하였다. 몽양은 11 14일 최근우와 신상완을 대동하고 상해를 출발하여 18일 오후 도쿄에 도착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장덕수는 현지에서 합류했다.

 34세의 몽양은 국빈대우를 받으며 일본 정부와 언론, 학계 인사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연설을 하였다. 자신을 초청한 코가 척무성 장관에게 한 말이다.


한일합병을 말하면 그것은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
. 소수 당국과 즉 매국자들이 한 짓이며, 또 당시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도 아니었다. 일본은 합병이 양국민의 호의로 되었다고 하지만, 조선국민은 이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요컨대 이것은 강제로 된 정치적 불공정이라 즉 합병이 아니라 병탄이다. 일본사람들은 한일합병을 한인의 행복이오 동양평화라 하나 한국사람들의 재앙이요 수치요, 동양평화의 환란과 시기(猜忌)를 생기게 한 것이다. 소위 선정, 덕정을 표방한다는 현재의 총독정치를 보아도 우리 민족적 요구인 독립운동을 압박하고 있지 않는가?


몽양의 방일 중 하이라이트는 테이코쿠 호텔의 연설이다. 일본신문 기자단과 각계 인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였다.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 것처럼 한민족에도 생존권이 있고, 한국민이 민족적 자각을 하여 자유평등을 요구하는 데 대해 일본정부가 이를 방해할 권리는 없다. 세계는 약소민족의 해방, 노동자의 해방 등 세계개조를 절규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 신의 의사 및 한국민의 각성에 의해서 일어난 필연의 운동이다.

일본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이해타산적인 견해로 첫째, 자기방위상 한국병합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궤멸한 이상 이미 그 이유가 소멸되었다. 둘째, 한국민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하더라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한민족은 열화와 같은 애국심이 충만하여 피와 생명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유지하기에 충분하여 일본이 만약 솔선해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민주공화국으로 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족의 절대 요구이다.

   

몽양의 기자회견은 일본 정계에 태풍을 불러왔다. 일본 신문들은 그를 조선가정부’(임시정부)의 대표로 등장시키면서 연설과 기자회견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그를 초청한 일본 정부에 책임론이 제기되고 제국의회의 해산과 총선거를 불러왔다.

이른바 대정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사상가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몽양과의 회견담을 다음과 같이 썼다.


여운형씨의 주장 가운데는 분명히 침범할 수 없는 정의의 번득임이 보인다. 그 품격에 있어서나 그 식견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우리들이 그가 갖고 있는 일편의 정의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장래의 도덕적 생명은 결코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몽양의 연설이 끝나자 일본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오스키(大彬榮)의 주창으로 참석자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것은 일본 정계에 쓰나미 현상을 불러왔다.

몽양은 일본에서 다나까 육군대신을 비롯하여 내무대신, 체신성 대신, 척식국대신 등 각료들을 만나고, 재일 한국유학생들을 격려한 다음 12월에 유유히 상해로 돌아왔다. 그의 도일을 반대했던 이동휘는 무사귀환을 축복하고, 임시정부에서도 일본에서의 활동을 크게 환영하였다. 몽양의 도쿄 한 달여 활동을 시종 지켜보았던 수행원 최근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때 연설은 참 웅변이었다
. 만좌가 박수갈채를 하였고, 끝난 뒤태평양잡지사 사장은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명쾌하였다고 말하였다. 몽양은 당시 연령이 34세였다. 다나까 육군대신과 만나는 자리는 우스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하여 관동청도대만 각지의 군사령관과 미즈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노 체신대신, 코가 척식국장관 등 정계군계 거두들이 열석하였다. 다나까와 몽양을 비교해 보니 저 편은 연장자요, 주권국 대신이요, 군국 권위의 배경이 있는 사람이요. 여기는 나이 젊고 식민지 한민이요. 피압박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좌석을 몽양 혼자서 휘어잡고 압도적으로 압력을 내어 내리누르며 정의로 싸우는데 자기는 처음 느끼는 통쾌이었고, 정의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목도하여 깨달았다. 몽양의 호담, 웅변, 제압을 예를 들면 퍽 많다.

  


 5, 동방피압박자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몽양의 활동반경은 호방한 그의 성격 그대로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었다. 1921 11월 워싱턴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전후처리를 위해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에 대항하여 러시아는 1922년 몽양모스크바에서 동방피압박자대회를 소집했다. 태평양회의에 실망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스크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임시정부에서도 김규식김상덕김승학라용균 등이 파견되고, 조봉암을 비롯하여 사회주의계열, 학생 대표 등 무려 56명이 참석하였다. 몽양은 고려공산당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김규식과 함께 의장단에 한국대표로 뽑힌 몽양은 회의 기간에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의 지도자들과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였다. 다음은 레닌과의 대화 내용이다.



조선에 있어서는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또 계급의식이 유지함으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조선은 농업국으로서 일반대중은 민족운동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운동자는 독립운동을 후원 지지하라는 방침을 결정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만 너무 과대하고 실력이 이에 따르지 않고 있는고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바 있고, 이외 레닌으로부터 일본에서는 무산계급은 의회운동을 표어로 삼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손잡고 그 운동을 추진하여, 조선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후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한 바 있소.

다음은 몽양이 레닌과 나눈 대화 중에 그의 동방정책 즉 민족해방에 관한 부문이다
.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 그때까지는 러시아가 조선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레닌이 조선의 교통국어에 관해 물었을 때, 교통은 자동차로 하루 만에 달할 수 있는 정도, 언어는 하나라고 대답하자, 레닌은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이는 나의 이전부터의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몽양은 레닌과 만나서도 당당하게 조선은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리고 피체되어 심문을 받을 때에 이것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신념임을 일제 관헌에게 진술하였다. 해방 후 반대세력에서는 이 때 레닌을 만난 것을 두고 용공주의자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이 같은 음해는 아직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6, 손문 등 신해혁명 지도자들과 중한호조사 결성

러시아에서 상해로 돌아온 몽양은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을 만나 같은 처지에 놓인 한중 양 민족이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결성하였다. 몽양이 가산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은 손문이 주도한 1911년 신해혁명을 지켜보면서였다. 이런 연유로 1916년 중국 신문 기자의 안내로 손문을 만난 이래 1919 11월과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그와 만나 교분을 쌓게 되었다. 중한호조사의 결성은 이와 같은 교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한호조사의 중국측 발기인 중에는 모택동도 들어 있었다.



중한호조사는 유형무형으로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각 지방의 능동적인 유지들에게 두 민족 간 공감대를 이룩한 것이 우선 큰 성과였다. 상해의 경우는 중국인 52, 한국인 104명이 참가했고, 광주의 경우는 광동정부 사법부장 쉬젠과 국민당의 왕징웨 등이 참가하여 중한협회를 설립했는데 중한호조사 또는 중한협회에 관여했던 모든 인사들은 한국문제, 즉 한국의 참상과 한국인들의 염원을 알게 된 것이었다.


몽양은 러시아의 레닌과 트로츠키 등 혁명의 최고 지도자, 베트남의 호치민, 중국에서는 손문을 비롯하여 장개석 등 신해혁명의 지도자들과 만나거나 교분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였다. 장개석의 중국국민당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에서 특별 당원 대우를 받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할 만큼 그의 교우 관계와 보폭이 넓었다.



나는 손문이 살아 있는 동안 십 수년 간의 지기(知己)였다. 1925년 봄 국민정부 고문인 러시아인 보로딘 부인이 상해에 와서 손문 부인과 회견하고 중국혁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상해에서는 손문의 추도식이 있었다. 나도 거기에 참석했는데 손문 부인으로부터 보로딘 부인을 소개받았는데, 그이는 나더러 중국혁명은 점차로 발전해왔는데 이를 위해 전력을 기울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카라한(대사)과 만나라고 하면서 소개장을 써주었기 때문에, 나는 같은 해 4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하여 노농(정부) 대사 카라한과 회견을 가졌다.

   

2차 중국 국민당대회에서 호치민모택동 등과 함께 연설을 했던 몽양은 뒷날 국내언론 대담에서 당시의 모택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모택동을 잘 압니다. 그 사람은 지금 수도 루이진(瑞金)에 있으면서(소베트) 중앙정부의 주석으로 부주석 장국도와 함께 정치공작에 열중하고 있지요. 그런데 외형으로 보기에는 몸이 가늘고 약하고 허술구레하게 생기어서 풍채가 보잘것없지요. 그래서 누구나 그가 주석인가 하고 모르는 사람은 다 놀랍니다. 또 히틀러나 뭇소리니 모양으로 풍우(風雨)를 부르는 웅변가도 아니고 말할 때 보아도 조용조용 말하지요. 촌부자(村夫子) 식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같이 뜻이 굳은 사람이 없어요.

   

7, 일제에 피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몽양은 1929 7 10일 상해 대마로 경마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총독부의 유죄 판결내용은, 신한청년단 조직, 미국인 중국 파견특사 크레인에게 파리강화회의윌슨대통령에게 청원서 제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상해임시정부 조직, 임시의정원 조직, 임정 외무부장, 미국의원단 방문, 국민대표회의 조직, 고려공산당 입당, 상해 노병회 조직 등이었다. 15년간 중국 망명시절 몽양의 주요 항일운동이 그대로 드러난다.

몽양은 1932 7월 만기 4개월을 남겨놓고 가출옥할 때까지 3년여를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치질, 신경통,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등 건강악화로 병보석을 신청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대전형무소에서는 기결수로서 하루종일 앉아서 그물뜨기의 노역으로 소화불량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총독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몽양에게 검사가 15년 만에 돌아온 고국의 산하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부산에 상륙해 해안 일대의 산들을 보았소. 20년 전에 본 민둥산이 일변하여 청산(靑山)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놀라웠소. 그러나 철도 연선에 있는 동포의 부락의 상태를 보니 10년이 하루와 같이 하등의 변화 진보의 자취를 보지 못해 자못 실망했소. 총독정치가 민둥산을 청산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국민의 생활과 풍속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중에 일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소.

   

심산 김창숙은 몽양이 서대문형무소 수형생활을 할 때 옥리를 보면 반드시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했고, 안창호 역시 감옥의 규칙에 잘 복종했다고, 회고록심산유고에서 썼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보석을 바랐던 행동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보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몽양은 1942 12월 치안유지법, 육해군형법, 조선임시보안령의 위반혐의로 경성헌병대에 검거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하고 1943 4월 경성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반년 동안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옥중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구상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8, 신문사 사장 등 국내활동

   

몽양이 15년 간의 중국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후 새로 시작한 국내 활동은 어쩌면 그 자신에게는 행운이었다. 1933 2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공통된 환경 속에 있는 조선의 언론기관이 마땅히 우리의 생활, 우리의 요구에 부합하는 목표를 세워 동일한 보조로 협력해야 한다, 언론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의 전위가 되겠음을 밝혔다.동아,조선의 친일성향을 경고하면서 차별성을 천명한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대거 신문사 편집, 논설진에 포진시켰다. 따라서 1936년 한 해 동안 13차례의 신문사 수색발행금지 조치를 당할만큼 일제와 맞섰다. 1936 8 15일자에서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시켰다. ‘일장기말소사건을 처음 시도한 것이 몽양의조선중앙일보였다. 이 사건으로 몽양은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1937년 신문사를 자동폐간시키는 길을 택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일보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조선중앙일보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식민지 백성들의 언론인 몽양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9, 건준 조직,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

   

해방 후 몽양의 활동은 단연 물 만난 용이었다. 1943년에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민족해방동맹과 1944년 이를 발전시킨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여 해방 직후에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출범 한 달 만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를 결성할만큼 국민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점령한 미국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건설이 더욱 신속했을 것이다.”(에드가 스노우)

건준은 3대강령을 세웠다.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  전체 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하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 일시적 과도기에 자주적으로 국내 질서 유지와 대중생활의 회복 등이었다.


미군정기 초기 남한에는 5개의 정치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 1. 미군정부. 2, 김구 등 임시정부세력. 3, 이승만의 미주세력. 4, 송진우 등 국내 우파세력. 5, 박헌영 등 민족주의 좌파세력이다. 이들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에 있었던 몽양은 미군정 당국이 점령 초기 주로 친일파와 일본측의 정보를 통해 몽양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고, 전국 규모로 확대되는 건준을 불법단체로 차단시키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송진우장덕수 등 우파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임시정부 봉대를 명분삼아 건준 참여를 거부한 것도 몽양의 좌절을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건준 내의 좌익세력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인 9 6일 전격적으로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 몽양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미군정 고위 당국자가 몽양을 외모는 그럴듯해도 쓸모가 없는 은도끼라고 비아냥을 퍼부을 만큼 조선민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그를 홀대 또는 적대시했다.


그런 속에서도 몽양은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하고 5차례나 방북을 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다. 해방 후 11차례에 걸쳐 김일성김두봉 등과 서신왕래를 하고 미군정포고령을 무시한 채 평양을 방문한 것을 두고 미군정이 문제 삼자 집주인이 제집에서 아랫방으로 내려가건 윗방으로 올라가건 손님들이 왠 참견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에게는 통일조국 건설 이외에 미국도 소련도 안중에 없었다.

   

   

10, 의문투성이의 암살배후 밝혀야

   

1947 7 19일 북한에서 한 달 전에 내려왔다는 19세의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배후에는 백색테러 조직인 백의사(白衣社)가 지목되고, ‘독립운동가 잡는 귀신이라는 노덕술 등 친일경찰과 이들을 비호하는 정치세력이 거론되지만 사건은 오늘까지도 미궁에 빠져있다.


1992 6월호월간 말에는 몽양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실렸다. “여운형 암살배후에 노덕술이 있었다 - 몽양 암살범 4인의 최초고백이란 제목의 글이다.

몽양은 해방공간에서 10여 차례의 테러와 암살위기를 겪었다. 암살당하기 바로 전날 밤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을 만나 자신에 대한 테러위협에 대책을 요구했던 기록이 전한다. 다음은 미군의 정보자료 중브라운이 하지에게 보낸 비망록이다.


여운형은 7 18일 저녁에 브라운 장군과 개인면담을 가졌다. 여운형은 장택상 청장이 그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만약 그가 서울에 남아 있으면 자기는 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몽양에 대한 모종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암살음모를 저지하지 않고 서울을 떠나라고 오히려 겁박했다. 몽양 암살에는 이승만도 관여했던 것으로 G-2의 주간보고서 99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는 몽양 암살 20일 전에 이승만에게 몽양 암살계획을 중단하도록 충고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 장군은(1947) 6 28일자로 이승만에게 발송한 편지에서 이승만과 ○○의 테러계획에 대한 고발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 장군은 한국인의 애국심이 건설적인 방법을 통해야지 유혈을 포함하는 낡은 방법을 통해 그 출구를 발견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몽양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독립운동, 해방 후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헌신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 같은 인재가 해방된 조국에서 암살당하게 되는지, 가슴 아프면서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조차 주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도벌꾼이 곧게 잘 자란 나무를 선호하듯이, 해방공간에서 정치도벌꾼들은 몽양과 백범 김구 등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치고, 통일운동에 여생을 아끼지 않던 거목들을 골라서 도끼질을 했다. 하나의 대들보감이 자랄려면 100년의 풍상을 필요로 하듯이, 한 사람의 국가민족의 동량(棟梁)이 성장하기에는 이에 못지않는 시련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도벌꾼들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거나 작은 이해관계 혹은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도끼질을 한다. 민족사의 비극이고 국가적으로 손실이다. 몽양이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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