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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체육문화운동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1-03-04

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체육문화운동



'김광식(21세기한국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몽양 여운형은 정치가로서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쳐 나간 폭넓은 경륜과 깊이있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 중에서도 체육과 문화분야에서의 공헌은 독보적인 것이어서 뚜렷한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의 체육문화 활동은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활동이기도 하였지만, 여운형에게는 그것이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내용을 채워 나간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체육인으로서 몽양은 항상 스스로 스포츠를 즐겼고 체육인들을 양성하였으며 조선체육회 이사와 회장을 맡아 체육계를 발전시켰다. 또한 몽양은 문화인이었다. 몽양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으로서 스스로 많은 글을 집필했던 사람이며, 항상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던 사람이었다.
 여행가로서의 몽양도 주목할 만하다. 몽양은 이미 20대 말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동경, 동남아시아, 몽고, 모스크바, 시베리아, 북만주, 일본 등을 누비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여행과 관련된 웅장한 기행문을 남기고 있다.



2. 8·15 이후 몽양의 체육문화 활동


 몽양이 체육인이고 문화인이었다는 사실은 8·15 직후 몽양의 활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정책1) 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1) 여운형과 조선체육회

 여운형은 8·15 직후 재건된 '조선체육회'의 회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당시 '조선체육회' 의 강령과 간부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조선체육회 강령
 ● 본회는 조선민족의 강장한 육체와 정신의 육성을 기함.
 ● 본회는 체육운동의 이론지도와 기술향상을 도하야써 국민체육의 완성을 기함.
 ● 본회는 운동정신 투지력 급(及) 단결력 향상에 완전을 기함.
 ● 본회는 체육단체를 통일하여 체육행정과 국방의무의 충실을 기함.
 ● 본회는 국민체육의 최고목표를 현현하고 국제친선에 공헌함을 기함.

      조선체육회 임원
 ● 고문 : 김규식, 오세창, 조만식, 김성수, 원한경, 안재홍, 홍명희, 최규동, 이극로
 ● 회장 : 여운형
 ● 부회장 : 유억겸, 신국권
 ● 이사장 : 이병학
 ● 상무이사 : 이길용(사무국장), 조영하(체육부장), 김용구(총무부장)

 일제시대의 한국체육은 전통적인 체육과 갑오경장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근대 스포츠 그리고 일제당국이 추진했던 군사체육이 혼합되어 있었다.3) 이와 같은 체육사를 감안할 때 8·15 이후 한국체육의 과제는 식민지 체육정책에 따른 폐해를 일소하고 우리의 체육적 전통을 복원하며 근대적 국민체육의 부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체육회' 는 국민체육의 완성을 기한다는 내용을 그 강령으로 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체육회' 의 과제 확립은 단순한 상황적 대응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시대 이레 체육계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다. 일제시대 당시 한국의 체육활동은 상당 부분 민족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었다. 1920년에 '조선체육협회'4) 와는 별개로 설립된 '조선체육회'의 활동이 그러했고, 각 신문사와 청년단체들이 주최한 각종 경기대회도 민족적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따라서 일제당국은 1938년 7월 4일 '조선체육회'를 '조선체육협회' 에 편입시키고 각종 경기대회를 규제하는 데 나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8·15이후 '조선체육회'와 각종 경기단체들의 부활은 민족체육과 국민체육의 부흥을 통해 건국의 내용을 채워 나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여운형이 앞장서고 있는 것은 몽양 자신이 일제시대 체육계의 중요 인사로 활동했고, 또 건국준비위원회의 대표로서 정치 활동을 벌여 나가는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체육회의 임원 구성을 보면 당시 체육계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조선체육회의 고문인 김규식과 오세창, 조만식은 원로 독립운동가였고, 이 중 조만식은 일제시대 '관서체육회'5) 의 회장을 맡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학 체육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던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을 대표하여 김성수와 원한경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안재홍과 홍명희는 각각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장이었다.
한편 부회장인 유억겸은 '조선체육회' 가 '조선체육협회'로 통폐합되기 전 오랫동안 '조선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8·15 이후에는 YMCA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신국권은 건국동맹의 맹원으로서 상해방면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던 여운형의 측극인사였다.
이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여운형은 조선체육회를 부활시키고 아울러 국민체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2) 여운형과 문화활동
 여운형은 8·15 직후 건국활동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8·15 이후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여운형이 행한 연설6)은 여운형의 문화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나도 지난날 여러 번 생각하였지만 내가 무슨 운동가로서 등산을 한다거나 무엇을 하고 다니는 것을 오락으로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 자신은 문학가가 되지 않은 것을 퍽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객이 된다고 날뛰기 보다는 차라리 문학계에 들어갔으면 내 답답하고 서러운 시절에 시라도 한구절 지으면서 즐길 수 있었을 걸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제라도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책상자를 걸머지고 여러분의 뒤를 따르며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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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45년 11월 12일에 결성된 조선인민당은 30개의 기본정책 가운데 무려 9개를 문화정책에 할애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녀해방과 남녀평등권의 확립, ②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 ③ 건민(建民)운동의적극적 추진, ④ 의식주 개선 등 신생활운동의 전개, ⑤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및 사회교육의 실시, ⑥ 학술 및 교욱기관의 확충과 교육가, 연구가, 기술가 우대, ⑦ 우리 고유문화를 계발하여 민족적 긍지를 앙양, ⑧ 건실한 대중오락 기관으 설립 확충, 송남헌, 『 해방 3년사 』1, 까치, 1985, 179~180쪽

2)조선통신사, 『 1947년 조선연감  』, 조선통신사, 1946년, 346 쪽

3) 이학래, 『 한국근대체육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0, 9쪽 참조 저자는 일제의 침략에서 민족자조적인 근대체육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민족문화의 한 요소로서, 근대체육을 정착시키려는 체육활동의 흐름을 민족주의적 체육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저자의 분류에 의하면 여운형의 체육활동은 민족주의적 체육활동에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4)'조선체육협회'는 원래 조선에 있는 15개 정구단이 모여 1928년 가을에 결성한 경성정구회와 1919년 1월에 결성된 경성야구협회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체육단체로, 1919년 2월 18일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협회에는 정구부와 야구부을 두었으며 기관지 <조선체육계>를 매월 1회 발행하고, 필요에 따라 기타의 운동부를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5)1925년 2월 27일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갖고 정세윤을 회장으로 선출하면서 창립되었다. 1934년 당시의 조직을 보면 회장에 조만식, 부회장에 조종완, 총무 김병연, 회계 송석찬, 상무이사 김건형,오기영, 이사 강증구 조상증 차재익 지용은 박윤상 박인목 최응천 안창현 최능진 김만형 한봉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경기대회 개최 실행부서로 축구부 빙상부 야구부 씨름부 수영과 일광욕부 농구부 정구부 배구부 탁구부 육상부를 두고 있었다. 위의 책, 166쪽
6)여운형, <제 1회 전국문학자대회 축사> 몽양여운형선생 전집발간위원회 편, <몽양 여운형 전집>1, 271쪽


 3. 성장기의 몽양과 체육문화 활동


몽양이 이와 같이 체육문화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개인적·사회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여운형의 성장과정을 깊이있게 살펴보려고 한다.
 성장기의 몽양은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10대 후반에 이미 상처를 하고 이어 조부와 부모를 잃었다.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힘을 잃지 않고 자기 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정신력과 함께 단련된 스포츠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운동에 대한 관심과 몰두는 여운형을 건강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여운형은 학창시절부터 축구와 철봉 등 스포츠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했고, 이러한 경험들은 몽양에게 삶의 의욕과 활력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몽양의 이런 특성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거이다. 불행중 다행으로 몽양의 성장시기는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얕보던 시기인 동시에 각종 근대 스포츠가 한국에 수입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근대 스포츠는 청년과 학생들을 통해 우리사회의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따라서 몽양 역시 배재학당과 흥화학교, 관립 체신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 다양한 스포츠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몽양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내 일찍이 유년기에 체질이 가히 약하고 또 다병하다가 거금 34년 전 처음으로 경성에 왔을 때에 각 병영에서 군인들이 철봉운동에 힘쓰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유희삼아 나의 처소에 철봉을 가설하고 조석으로 운동을 계속하였던 바 의외의 효과를 얻게 되어 약간의 잔병이 다 없어지고 신체도 강장한 이 쾌태로 되었다.
 몽양이 이와 같은 개화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족숙이었던 여병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여병현은 여씨 가문에서 일찍 개화한 사람으로, 배재학교 교사로서 한국의 초기 YMCA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강제합병 이전에 황성 YMCA 이사와 의사부 위원장을 지냈다.
 청소년 시절 개화의 물결과 마주한 몽양은 체육과 함께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아울러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여운형은 20대에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운형은 기독교를 신문물의 창구로 인식했고, 기독교를 통해 민족자강운동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여운형이 다녔던 교회는 승동교회로서 곽안련 목사의 조수 일을 보는 것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근대교육을 경험한 20대의 열혈청년 여운형에게는 안정된 직업을 구하는 일보다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여운형은 곧 고향인 양평에 기독교 광동학교를 설립했고, 이어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광동학교와 초당의숙과 같은 사설 학교들은 시사문제와 토론법 등의 강의와 함께 체조 등을 가르치는 애국계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강제병합을 단행한 이후에 이와 같은 학교들을 해산시키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운형도 1911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퇴거명령을 받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여운형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금강산을 둘러본 이후 단발령을 넘어 고향마을인 양평에 잠시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시 곽목사와 함께 교회일을 보다가 평양에 있던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력을 거론하는 것은 그의 문화적 활동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여운형은 교회의 조수 일을 통해 실무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동시에 광동학교와 초당의숙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교육과 문화활동의 프로그램을 자율적으로 입안하고 진행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와 교육활동은 다름아닌 문화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여운형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정치활동에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외교활동, 문화활동, 체육활동 등을 포괄하게 된다.

 
 4. 중국시절의 체육활동과 문화활동

여운형은 남경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상해에 있는 협화서국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 서점을 운영했던 사람은 미국의 선교사인 피취 박사였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항주대학교 교장이었고, 차남은 상해 YMCA 총무였으며, 막내인 딸은 아버지를 도우면서 협화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3남매는 모두 여운형의 동생이 다니고 있던 오하이오주우스터 대학의 동창들이어서, 나중에 여운홍이 상해로 온 다음 그 사실을 알고는 여운형 형제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협화서국 생활은 여운형에게 적지 않은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YMCA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곽안련 목사에 이어 외국인들과 다시 만남으로써 이후 그의 활동에서 외국인들 대하는 매너와 외교력을 익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데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운형은 30대 중반 시절 미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부하린의 <사회주의  ABC><직접행동>을 번역하는 등 상해의 독립운동가에서 번역가로서 활동하기고 했는데 이와 같은 활동들도 어쩌면 협화서국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운형은 어디서나 교육사업에 상당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상해에서도 국내의 경험을살려 인성학교를 인수하여 교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인성학교는 본래 상해 한국인 교회에서 운영했던 간이학교인데, 여운형과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이 인수 받은 후 1924년에는 국내 동아일보사의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기도 했다.
43세 되던 1928년 여운형은 상해 복단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복단대학 축구단을 인솔하고 동남아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를 방문하면서 원정경기를 주선하였다.물론 이 원정경기를 갖는 여행 동안에도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여운형은 동남아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식민정책을 성토하고 아울러 '아시아 피압박민족대회'를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운형에게 체육활동과 독립운동은 상호보완적이었던 셈이다.

여운형이 스포츠 경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려주는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즉 여운형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기에 이른 사건이 다름아닌 상해의 야구경기장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하루는 여운형이 상해의 원동 경기장으로 야구 구경을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여운형을 체포하기 위해 일본 형사들이 따라와 있었다. 결국 여운형과 일본 형사들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졌고,  결국 여운형은 영국 조계의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몽양의 신분을 확인한 영국경찰은 몽양을 일본경찰에 넘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비열하게도 이튿날 새벽 여운형의 신병을 일본 영사관에 넘기고 말았다. 1929년 7월 8일, 여운형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여운형은 싱가포르에서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국제국주의를 공격하는 연설을한 적이 있는데, 이때의 반영(反英)발언 탓에 영국 경찰이 몽양을 일본 경찰에 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때의 고막 파열로 여운형은 이후 영영 한쪽 귀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5. 여행가 여운형

 
"여행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취미이며 오락이다. 세상에서는 스포츠를 나의 가장 좋아하는 취미로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는 스포츠보다도 훨씨 더 여행을 사랑한다. 아니 여행이야말로 가장 종합적인, 가장 건전하고 인간적인 스포츠일 것이다.
만약 인류가 그들의 영구한 역사를 통해 꿈꾸고 열망하고 또 그를 위하여 찬탄하고 눈물지어오는 저 유토피아의 실현을 획득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인간생활의 가장 뚜렷하고 특징적인 조건은 만인이 다같이 제한없는 여행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점일 것이라고 말한 저 웰쓰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나는 여행의 애호가이며 예찬자이다."

여운형의 여행관이다. 이처럼 여운형은 여행을 즐기고 사랑하였다. 여운형의 활동공간을 보면 국내만 해도 서울 양평 강릉 평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중국에서는 남경과 상해 천진 등 전역을 누볐으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1929년에는 상해복단대학의 축구팀을 이끌고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청소년 시절, 야구선수로서 방문한 것을 비롯해 1919년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직후 일본 당국의 초청으로 동경을 방문했고, 1935년 조선중아일보사 사장 시절에도 오사카와 동경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많이 다닌 것도 중요하지만 여운형은 가는 곳마다 지기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여행의 느낌과 경험을 기행문으로 남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36년 3~7월 <조선중앙일보>의 자매지인 <중앙>에 실렸던 기행문은 몽고의 고비사막을 넘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시베리아와 북만주를 거쳐 다시 상해로 돌아오는 웅장한 여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다. 본래 여운형이 계획했던 여정은 천진에서 봉천을 거쳐 시베리아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일제의 밀정 때문에 북경에서 장가구 그리고 고비사막을 거쳐 울란바토르를 통과하는 여행계획을 세워 놓았다. 이 여행의 기행문들은 오늘날 읽어보아도 웅장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새까맣던 밤하늘은 차차 그 본래의 암람색을 회복하고 암흑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먼 지평선도 이제사 그 암시와 약속을 품은 희미한 선으로 대지와 천공을 나누어 놓는다. 그리하여 하나씩 둘씩 반짝거리기 시작한 별등은 삽시간에 온 얼굴을 덮어놓고 그 영원히 젊은 눈동자로 밤의 땅을 향하여 영구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속살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추위도 잊어버리고서 한참 동안이나 이불 밖에 머리를 내어놓은 채로 이 한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막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신비한 광경이었으랴. 그 광경은 이제 먼 옛날의 아득한 추억속에 희미해졌으며 또 나의 마음도 벌써 그때의 새롭고 보드라운 젊은 감수성을 많이 잃었으련만 그래도  그 밤의 기억만은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속에 새롭다.

"장가구를 떠나서 닷새째의 석양 사막에 지는 해가 그 최후를 화려한 색채로 원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할 즈음에 우리 일행을 태운 자동차는 멀리 '우란 바톨호르' 곧 혁명정부에 의하여 '적색 거인의 도시' 라는 새 이름을 얻은 고륜의 시가를 바라보면서 탄탄한 경사를 시원스럽게 한숨에 다름질쳐 내렸다.
사방을 산에 에워싸인 분지의 한복판을 흐르고 있는 넓은 냇가에 그 침울하고 전아한 자태를 고요히 가로누이고 있는 이 아세아식 도시는 위선 구릉 사이에 뾰족 솟아 때마침 황혼의 장미색에 곱게 물들인 하늘에 그 금색찬연한 광채를 맘대로 자랑하고 있는 라마사원의 고탑으로서 우리에게 환영의 인사를 보내었다."

"오래동안 바다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조하고 우울한 대륙풍경 속에 질식할 듯한 우수의 압박을 무의식중에 느끼면서 긴 여행을 하여온 우리의 눈앞에 이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나 그 광활한 푸른가슴을 겨울아침의 젊은 태양아래 마음껏 벌려놓고 우리를 맞아주는 이 바이칼 호수는 마치 넓은 바다나 같았다.
감벽의 호면에는 연파가 아침 미풍에 춤추고 둥실둥실 떠돌아다니는 얼음덩이는 그것이 이 자유롭게  유쾌하게 몸부림치고 춤추고 아양부리는 보드라운 수면을 무감각하고 침묵한 한 장의 얼음판으로 변하게 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경쾌하게 물결 사이에 부동하며 태양의 반사에 이따끔 다시없이 고운 광선의 희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대러시아의 중앙을 남북으로 꿰인 우랄의 대산맥은 거대한 테이블형의 고원을 형성하여 우리의 앞길에 가로 누어 있었다. 기차가 이 고원의 경사를 올라갈 때에는 전후에 기관차를 달았다.
앞으로 끌고 뒤에서 밀고해서, 기차의 속력은 실로 미미하여 안타까울 만큼이었다. 이 우랄의 산맥을 지나고 나니 연선에 보이는 촌락과 도읍에는 훨씬 농후한 구라파색이 지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거장마다 눈에 띠우는 것은 이 광대한 나라를 한가지로 쓸어 덮고 있는 처참한 빈궁과 결핍의 상태였다.


 여운형의 이 기행문들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가 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내용들보다는 주변 경치와 여행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문의 요건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이 쓴 글들 가운데는 비교적 긴 글에 속하며, 또 본격적인 문필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 언론인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상해에서 체포된 여운형은 국내로 압송되었고, 대전형무소에서 2년8개월의 수형생활을 거친 이후 1932년 7월 26일 석방되었다. 여운형이 출옥 후에 한 일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일이었다. 그는 출옥 후 8개월만에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직을 맡았다. 당시 몽양을 사장직에 추대한 사람은 이 신문의 이관구 주필과 김동성 편집국장, 홍증식 영업국장, 그리고 출자주인 최선익과 윤희중씨 등이었다.
 당시 이 신문의 편집국 진용은 신전기예들과 유명인사들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설가 이태준·김남천, 조각가 김복진, 아동문학가 윤석중, 사회평론가 고경흠, 시인 노천명·박팔양, 화가 노수현·이승만 등이 바로 이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관구와 김동성, 홍기문 등 당시의 명논객들이 논설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각 지방의 지사는 지방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몽양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신문 제호를 《중앙일보》에서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도 중앙일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일제시대 3대 신문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중앙일보사 사옥은 당시 주소로 경성부 견지동 60번지, 현 농협 서울지부 자리였다.
 필자는 오래전에 사직동에 있는 종로도서관에서 《조선중앙일보》의 일부가 복사·제본되어 있는 것을 읽은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조선독립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을 균형있게 전하려는 편집진들의 노고가 잔뜩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중앙일보》는 우국지사들이 만드는 신문이었다.
 직원들 가운데에는 본사만 해도 20명 이상이 독립운동의 경력을 갖고 있었으며,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던 운동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축구선수 이영선과 정용수, 그리고 동양 챔피언이었던 권투선수 김창엽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각 지국의 인사들도 본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 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 였다가 독립운동을 배신한 박희도와 최린 등 총독부 권력에 기생하고 있던 친일파들의 비리에는 용감하게 필봉을 휘둘렀지만, 반대로 일반시민, 학생, 노동자, 세궁민, 농민들에 대한 기사에는 항상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게다가 이 신문은 부대사업으로 청년교육사업과 역사유적 가꾸기, 스포츠 정신 함양, 이재민 돕기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조선중앙일보》의 스포츠 지원

한편 몽양은 자신이 스포츠맨이었던 만큼 각종 경기를 주최하거나 후원하면서 청년학생들과 스포츠맨들에게 운동 정신을통한 조국사랑의 정신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썼다. 몽양에게 영향을 받은 스포츠맨들로는 체육이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서상천과 그의 제자인 김성집(태릉선수촌장 역임) 양정고보의 농구코치를 했던 이성구(대한농구협회 고문 역임) 《조선중앙일보》사원이었던 권투선수 김창엽, 구너투선수 김유창, 유도사범 장권, 유도선수 김성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1933년 4월 초 몽양이 사장에 취임한 후 《조선중앙일보》는 해외운동 선수 초청 친선경기를 후원했다. 당시 성의경 사범이 창설란 '조선권투구락부'가 주최학 조선중앙일보사가 후원한 일본 전수대학 권투부 초청이 그것이다. 그 무렵 권투도장이라고는 YMCA권투구락부와 조선권투구락부 둘밖에 없었을 때이다. 이 친선경기에서 몽양은 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개회사를 했다.

"피를 흘리면서도 싸우고 다운되어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권투정신은 우리 청년들이 의당 본받아야 할 훌륭한 정신이다. 남성답게 씩씩하게 싸우라, 비겁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스포츠맨쉽으로 싸우라. 나는 청년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무릇 청년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불가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권투구라부에 갓 들어온 김유창 소년도 이때 몽양을 처음보고는 몽양의 펜이 되었다. 1934년경 조선 플라이급 챔피언이었고 해방 이후 우리나라 복싱계의 원로였던 김유창 옹은 몽양을 처음 본 그날을 다음과 간이 회고한 적이 있다.

'운동을 하도 좋아하고 운동선수라면 무척이나 사랑해서 모두 친부모 이상으로 따르고 숭배했지요. 몽양은 YMCA권투구락부와 조선권투구락부 그리고 황을수의 동양권투구락부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시합장에는 꼭 나와서 관전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흥미로운 운동경기가 있었다. 노동육상경기대회(老童陸上競技大會)가 바로 그것이다. 노동육상경기대회는 청장년이 함께 참여하는 운동경기대회이다. 제 1회는 1934년 7월 7일 유억겸씨의 개회사로 열렸는데, 여기에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씨와 유명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씨 등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하여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제 2회 대회는 여운형의 개회사로 1935년 7월 6일 용산철도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여운형은 투포환에서 1등을 하고 동생 여운홍은 100미터 결승에서 1등을 함으로서 강인한 체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2)여운형의 청년지도 활동
조선중앙일보사는 각종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마다 여운형은 심사를 맡았다. rfl고 애국적인 청년인재들을 속속 발굴하였다. 한편 여운형은 청년들이 결혼할 때 주례로 모시고 싶은 인물로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따라서 여운형은 상당수의 젊은이들에게 결혼식 주례를 서 주었고 이렇게 해서 청년들과의 접촉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여운형의 주례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월간지 <삼천리>에까지 소개될 정도였다.
"결혼 행진곡!  이 풍금 소리가 들리는 곳곳에 여운형 씨의 시원시원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때가 없다 하리만치 씨는 결혼식주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 대체 이 분이 한 해 잡고 몇차례나 재자가인의 원앙의 꿈을 맺어주게 하는가 하면 작년에 53쌍 금년에 57쌍(11월 24일 현재)이라 실로 한달 잡고 두 번 의례히 결혼식 주례를 하신다. 금년만 해도 동짓달 스무나흘날까지 오십칠쌍이요 섣달 들어서 십여 곳의 예약을 받고 있다니 아마 올해에는 70쌍도 더 넘을 것 같다. 이 모양대로 늘어가서는 명년은 아마 백쌍을 넘을 듯 성재라 결혼주례인저." <삼천리, 1936, 1>
여운형은 또한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시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조선중앙일보》와 월간 중앙에도 청년에 대한 간곡한 당부의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여운형이 청년들에게 강조한 것은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라." "배움에 힘쓰라, 배움을 위해서는 정관(正觀)과 직각(直覺)이 필요하다." "농촌청년, 근로청년, 학원청년, 종교청년, 인테리 여성들이 각기 자기 자리를 닦아 나가야 한다"는 것들이었다.
여운형의 청년에 대한 관심과 격려, 그리고 체육에 대한 관심은 청년 활동과 체육활동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또 이를 통해 독립을 획득한다는 여운형 특유의 독립운동관이 깔려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된청년인재들과 체육계 인사들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3)《조선중앙일보》의 역사유적 복구활동

여운형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좋아했다.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몽양 여운형이 생각하는 가장 한국인다운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민족의 자주성과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왜적과 싸우되 벼슬자리를 문제 삼지 않은 사람이 이순신이었고, 또한 문무를 제대로 겸비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한 장군이었음에도 부구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과학정신이 투철했으며, 또한 <난중일기>와 시조를 남기는 등 문학과 학문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인물이었다. 여운형 역시 이순신을 닮고 싶었을 것이다.

계동 자택의 응접실 삼면에는 이각경, 이철경 자매가 쓴 이순신 장군의 시조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기 때문에 몽양은 1934년 11월 어느날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순신 장군의 묘소는 황폐해 있어서 몽양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몽양은 이순신 장군의 묘소단장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웠던 점을 잘 알고 있던 총독부측의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몽양은 1935년 봄 현직 신문사 사장이라는 방패막이를 가지고, 이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황폐한 묘소의 토역작업을 말끔히 마치고 나무를 심었으며, 이만규의 딸인 이각경의 글씨로 이순신 장군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몽양은 이순신 장군의 조국애와 멸사봉공의 위업을 기리고 후손들을 위로하였다
.

 4)일장기 말소사건과 여운형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조선중앙일보 가 결국 손기정 선수의 세계제패 소식과 함께 제기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을 이기형의 <몽양 여운형>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몽양은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한국인 선수들인 농구의 이성구 임은현 장리진 육상의 손기정 남승룡 축구의 김용식 권투의 이규환 등 7명에 대해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간곡한 격려인사를 전한 바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승리의 월계관을 쓴 것이다. 그 시각은 바로 1936년 8월 10일 새벽이었다.
8월 10일 자 아침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마라톤 세계제패'라는 제목의 기사와 심훈 시인의  <오오 대한 남아여!>라는 즉흥시가 실려 있는 호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어있던 일장기는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총독부 당국은 이것을 크게 문제삼았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신문은 정간되고 몽양과 관계자들이 소환되었다. 여러 날을 두고 숙고한 총독부 당국은 사장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 속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주들은 속간대신 폐간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몽양의 조선중앙일보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36년 9월 5일(4일 석간 제 3035호)이었다.


 
 7. 몽양의 체육활동



출옥 이후 여운형이 일을 맡은 것 중의 하나가 조선체육회 임원이 된 것이었다. 몽얃은 1933년 5월 제 14회 정기총회에서 '조선체육회' 이사가 되어 체육단체의 행정에 참여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체육협회'라는 별도의 단체를 가지고 있을 때였다. 당시 여운형은 박승빈, 김동철, 김영술, 이길용 씨와 함께 전형위원으로 참여하여 회장에 윤치로, 부회장에 유억겸을 선출하고 아울러 이사에 여운형 외에 박승빈, 송진우, 백관수, 김성수, 현동완, 주요한, 김규면, 김철선, 서병의, 구자옥, 최재환, 김동철, 이원상, 김영술(이상 개인) 보전, 연전, 세전,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배재, 양정, 휘문, 경신, 중동, 대동상, 조선축구협회, 고려육상경기회, 조선권투구락부 등을 추천하게 된다.

1937년 조선체육회'가 총독부 당국에 의하여 강제로 조선체육협회에 통폐합될 때까지 몽양은 악전고투해 가면서 한국체육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몽양은 체육을  스포츠 그자체로서만 본 것이 아니라 민족체육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동시에 체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몽양의 영향을 받은 일제시대의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역할을 운동선수인 동시에 민족운동가로서 설정하고 스포츠에서의 기록만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몽양의 체육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운형은 또한 체육이론가였다. 체육이론가로서 여운형은 참여체육을 강조하였다. 관전체육이나 상업체육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참여체육을 통해 건강을 증진하고 억센 체력을 기르는 것을 체육의 목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모든 운동경기의 끝에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경기에 참여하는 노동(老童)시합이 열리곤 했고, 이 자리에은 몽양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젊은이들 못지 않은 활력과 기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문사에서도 매일 편집이 끝나는 오후 5시만 되면 전 사원이 교대로 운동경기를 즐기기도 했다. 사장실은 글자 그래도 체육구락부를 방불케 했던 것이다.
몽양은 말로만이 아니라 참여체육을 솔선수범해서 실천하는 체육의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같은 적극성이 그로 하여금 체육 이론서의 모델로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몽양은 체육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스포츠 철학자이기도  했다. <중앙> 1935년 5월 호에 쓴 <체육조선의 건설>에 의하면 , 우리 조상들은 건전한 체질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조선시대를 통해 문약(文弱)에 흘러버린 결과 식민지 상태에까지 도달했다고 보고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찬란한 공훈을 가지려면 먼저 체육적 갱생을 도모하여야 하고 다시 민족적 광채를 회복하려면 먼저 건전한 체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육적 갱생을 몽양은 '억센 체육조선의 건설'로 표현하였으며, 그를 위해서는 ①체육의 보급, ② 체육정신의 함양과 체육을 통한 민족정신 회복, ③ 과학적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세가지 방안을 통해 힘을 기르로 기운을 돋워야만 거기에 아름다운 문화도 있고 아름다운 생활도 있음을 몽양은 강조하고 있다.
몽양이 운동과 스포츠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연설문 내용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은 1935년 2월 평양축구단을 천진에 원정보낼 때의 격려사 내용이다.

 
"오늘 저녁은 우리의 자랑할 만한 축구조선의 의기를 국제적으로 스포츠 무대에 휘날려보려고 멀리 천진(天津:텐진)과 상해방면으로 가게 된 <무적강군>인 평양을 대표한 평양축구단을 위해서 체육과 경기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역사상에서 고대희랍사람의 건강한 그 체격을 살펴봅시다. 그 얼마나 건전한 체격을 가졌는지요. 우리도 아침저녁 단련시켜 이렇듯 건강한 체격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대체 아름답다는 그 미중에는 곡선미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곡선미를 잊어버리고 양도야지 같이 된다든가 수수대 같이 가늘게 되어서야 무엇에 쓰느냐 말입니다.


그러고 늘 하는 말이지만은 정신을 건전히 가지기 위해서 운동이 필요합니다. 만사에 건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하면
사업에 성공치 못합니다. 그럼으로 건전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 제일로 우리의 몸을 건전하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어째서 체육을 장려해야 하겠느냐 하면 그는 건전한 신체를 자지기 위하여 꼭 해야 합니다. 이 운동이 아니고는
도저히 튼튼할 체구를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우생을 낳기 위하여 체육을 장려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좀 더 나은 사람을 낳기 위하여 좀 더 훌륭하고 튼튼한 국민을 만들기 위하여 운동을 아니하여서는 못 씁니다.우생학적 견지에서 체육이 필요합니다.
넷째로는 위생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살아가는데 있어 질병은 위생을 잘하고 못함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없는 튼튼한 몸을 가지려면 위생이 필요합니다. 이 위생에 제일 조건은 운동입니다.
다섯째로 오래 살기 위하여 또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오래 살려면 백살을 살아도 오히려 약하여 질줄 모르는 튼튼한 몸을 가져야 합니다. 오래 살려는 사람이 튼튼한 몸을 아니 가지고는 도저히 오래 살 수 없으니 우리는 오래 살려거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경기는 즉 취미를 재미를 부치기 위해서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내기는 남보다 이기려는 즉 투쟁심을 양성하여 냅니다.
우리 조선에만 있다고 볼 수 있는 철학인 <남에게 져라. 때리거든 맞아라.남을 때리지 마라>하는 이런 놈의 철학이 어데
다시 있겠소. 오직 망할 조선만 있는 철학입니다.(만장박수)
그리고 운동은 판단력을 양성하여 줍니다.
또한 운동은 책임감을 양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단결력에 대하여 봅시다. 우리 운동선수는 화목해야 합니다. <네버마인>(염려마라) <내가 잘못했다> 저편에서 잘못한 것도 <야! 염려마라 내가 하마!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실수하더라도 서로 잘못했다고 하여야 이것이 운동의 정신일 것입니다. 나는 잘했는데 "네가 왜 그러했니"하고 서로 잘못한 것을 남에게 미루는 정신을 응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너는 경기도 나는 평양 이렇게 지방관념을 버리고 한번 씩씩한 젊은이가 단합해서 모든 난관을 싸워나가면 어떻겠나 말입니다. (만장박수)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조로병(早老病)이 있습니다. 실은 흑사병보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조로병입니다.
나이 많다고 운동을 못한다는 것이 이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아무리 많더래도 나이 많을수록 운동은 해야 합니다. 신사체면 찾고 무엇 차리고 그래서 조로하고 마니 이런 무서움 병이 어데 있습니까. 이런 조로병은 하로 바삐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선여자는 대문밖에도 못 나오던 것이 지금 보아요. 공중에 여비행사로 육상경기로 수상에 수영선수로 점점 나아가지 않는가? 더구나 건전한 자식을 얻자면 건전한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기는 깨끗하게 하는 신조를 지켜야합니다. 모든 경기는 깨끗하게 합시다. 나는 근래에 가끔 운동장에서 불쾌한 일을 봅니다.
일전에도 축구대회 어떤 곳에서 야비한 행동과 언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까라"하고 마구 외칩니다. 대체 무엇을 까란 말입니까? 사람을 어찌 깐단 말입니까? 짐승이 아니고야? 도살장인줄 압니까?(만장박수)
 
게다가 여운형은 체육인재들을 양성하고 그들의 미래에 대해 항상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원로체육인들의 회고담은 여운형의 관심과 사랑, 포용력을 증언하고 있다.
1934년 10월 어느날, YMCA 체육관의 역도시합에서 당시 휘문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홍안의 소년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서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였다. 바로 곁에서 어린 아들의 손목을 잡고 이 경기를 지켜보던 몽양은 김 선수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여간 흐뭇해하지 않았다.
"여선생은 시합 때마다 자제분의 손목을 잡고 내 곁에서 관전해 주셨습니다. 댁이 바로 저의 학교옆이었으니까요. 비인기종목인데도 빠지지 않았지요." 김성집 태릉선수촌의 증언이다.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의 역도 미들급에서 당당히 동메달을 따낸 세계적인 역도선수였다.


1936년 5월,  휘문고보 5학년의 18세 소년인 김성집은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 1회 전일본역도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파견선발대회에 참가하여 미들급에서 라이트급의 김용성과 함께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여 당시 신문들을 떠들썩하게 했다. 조선에 돌아오자, 김성집 선수는 제일 먼저 몽양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여선생님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어요. 만면에 웃음을 띠시고 어쩔 줄을 몰라해요. 그 좋아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몽양 선생과 서상천 선생님, 김용성 선수와 넷이서 찍은 기념사진을 6.25때 잃어버렸는데 여간 아쉽지가 않아요. 이런 인연들 때문에 김성집 선수는 1947년 8월 3일 몽양의 장례식 때 손기정, 석진경, 이제황, 김유창, 정상윤, 이성구, 이순재 등 체육인들과 함께 운구와 하관을 맡았던 것이다.
요컨대 여운형은 스포츠의 육성이야말로 훌륭한 국민을 만드는 첩경이라고 생각했고, 건강하고 튼튼한 국민이야말로 독립된 나라를 만드는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8. 여운형의 '참 그리스도'신학


교회의 조수일을 보고 신학대에 다녔던 여운형은 신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일제시대의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종교개혁과 새로운 참그리스도의 신학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의 종교를 말하자면 기독교와 불교 두 가지를 들겠는데 현대의 종교란 것은 세상과 간음한 종교다.
말하자면 오늘의 예수교 안에는 '벌거벗은 나사렛 인사', '골고다의 희생의 예수'는 잊어버리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매매의 예수교인들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직업적 예수교인인 목사와 일반교역자들에게 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청년들은 마치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과 같고 이리를 따라가는 양의 무리와 같다. 블쌍한 처지에 있는 조선청년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조선청년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보내고저 하는 말은 이렇나 현황에서 탈퇴하지 못하겠거든 하루바삐 이 현상을 파괴하고 '참 그리스도',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 '골고다의 희생의 예수' - 그의 정신을 다시 부흥시키지 아니하면 현상의 조선기독교의 존재는 그 종교 자체의 존재가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조선사회에 해독만 줄 것이다.

불교 또한 그렇다. 불교의 정통은 실론(錫蘭)을 제한 이외에 없고 세계각지에 헤어져 있는 불교는 석가의 진종을 다 잃고 각각 그 국가의 환경에 따라 속화돼 버렸다. 더욱이 조선에 있어서는 석존의 대승의 진리를 찾아 볼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그 타락된 현상은 예수교의 그것보다도 몇 십배 더 심하다.
최근 도시근교의 사찰은 청정해야 할 곳이 유흥장으로 화하여 버리고 각 본산 주지와 지도계급에 있는 이들의 대다수는 그 사생활의 추태는 말할 것도 없고 공생활의  '밥싸움'은 야소교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 안에 있는 청년들은 이것을 답습해서 더욱 타락의 길을 밟는다면 불교개체의 운명은 조종을 질타할 뿐이다. 만일 그대들이 추잡한 이 세계를 정토화할 능력이 없다면 그 모순된 생활에서 빨리 탈퇴함이 자비용감한 석존의 본의일 것이다."

이처럼 여운형은 종교의 타락과 친일종교의 폐해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종교의 본령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계속했다.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였다. 김용기 청년은 몽양의 육촌동생인 여운혁과 함께 몽양의 계동 사택을 방문하여 여운형의 솔선수범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지사적 삶을 보고 감화를 받았으며,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솔선수범하면서 살기로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용기는 1944년 10월에 결성된 농민동맹에 참여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9. 조선 중앙일보 이후


몽양이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을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도 폐간된 1930년대 후반부터 8.15를 맞이하는 10년 동안 한반도의 정세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에는 드디어 태평양전쟁을 개시하게 되었다. 긔록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전시총동원정책으로 재산과 노동력과 희망을 박탈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사 사장을 지냈던 몽양은 향후의 정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몽양은 정보를 취합하고 판단할 수 있는 소식통들을 갖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파방송이다. 이와 같은 정보력을 기초로 해서 몽양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일 전쟁 이후 몽양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일본의 패망에 대한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이 방법론도 어떻게 하면 민족을 보호하면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가에 모아졌다. 몽양 스스로도 일본을 드나들며 동경에서는 일본의 최고정책과 외교 동향을 알아내고 조선에서는 총독부 고관들의 정치적 동향, 특히 법무국과 경찰국의 사정을 끊임없이 주목하였다.

몽양은 이 어려운 전쟁의 시기를 살아가는 데 소극적 저항과 적극적 준비 양면을 견지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44년 '조선건국동맹'과 '조선농민동맹'의 결성이다. 조선건국동맹과 조선농민동맹에는 이상백 신국권 김유창 김용기 등 여운형을 가까이 했던 체육문화인들과 청년들이 즐거이 참여하여 다가올 해방을 기다리면서 통일된 새나라의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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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한국스포츠의 선구자, 몽양 여운형 / 손환 몽양사랑지기 2021-04-15
61 평화통일 시대에 다시 보는 몽양 여운형 몽양사랑지기 2021-04-01
60 여운형 선생 관련 중앙선데이 기고문 중 몽양사랑지기 2021-03-28
59 몽양 여운형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관한 의견서 몽양사랑지기 2021-03-20
58 독립기념관에 몽양 어록비를 모시는 까닭은? /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장.. 몽양사랑지기 2021-03-17
57 우사 김규식 몽양 여운형 어록비 제막식 유족 인사 /여인성 몽양사랑지기 2021-03-17
56 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체육문화운동 몽양사랑지기 2021-03-04
55 2) 몽양과 6.15 시대 3) 6.15시대와 몽양 4) 날로 새로워지는 몽양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54 몽양과 6.15 시대(1) / 조영건 몽양사랑지기 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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